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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5월 23일 신사 2번째기사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심대부가 묘호가 적당치 않음을 간하였으나 논의하지 않다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대행 대왕의 묘호를 조(祖)자로 의정(議定)해 올려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다고 합니다. 신자(臣子)의 숭배해 받드는 생각에서는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이 조자로 의정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의리에 맞지 않고 정론에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대행 대왕의 성대한 공덕으로 볼 때 이 명호(名號)를 받으신 데 대하여 아마 비의(非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는 이와 다름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優劣)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업한 군왕만이 홀로 조(祖)로 호칭되었던 것은 기업(基業)을 개창(開創)한 1대(代)의 임금이어서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니, 역대의 태조(太祖), 고조(高祖)의 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모두 조로 호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깨뜨릴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오직 한(漢)나라의 광무(光武)는, 먼 종실(宗室)의 후예로 왕망(王莽)이 찬역(簒逆)한 뒤 도적떼가 봉기한 때에 난리를 평정하고 잃었던 나라를 광복(光復)하여 한나라를 하늘에 배향(配享)해 제사지내어, 이름은 비록 중흥(中興)이지만 실지는 창업과 같기 때문에 위로 압존(壓尊)되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대통(大統)을 전하는 시조(始祖)가 되어 조(祖)로 호칭하였으니, 그 이치 또한 실로 당연합니다. 저 명나라의 태종(太宗)같은 이도 비록 건문(建文)의 난리010) 를 평정하였으나 실은 고황제(高皇帝)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라고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정(嘉靖) 17년에 와서 성조(成祖)로 추호(追號)하니 당시에 식자들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세조 대왕은 친히 노산(魯山)011) 의 선위(禪位)를 받아 위로 문종(文宗)의 계통을 이었는데도 오히려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의 견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태평을 이룩한 치적(治績)이 하늘에까지 알려진 큰 공이 있었으되 묘호를 의논하던 날에 조자로써 의정(擬定)하려 하자 윤근수(尹根壽)가 의례(義例)가 없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그 의논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허균(許筠),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리가 없는 사실을 엮어 만들어 공을 나라를 빛낸 공에 비기어 존호(尊號) 올리기를 광해(光海)에게 청했습니다. 광해는 혼자 담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다시 조로 호칭하는 의논을 일으켰는데, 당시에는 문헌(文獻)에 밝고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해 말을 다 하기를 윤근수처럼 할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의논이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의리로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신은 일찍이, 당시의 군신들이 의리에 밝지 못하여 한갓 숭배해 받드는 것만이 높임이 되는 줄만 알고 위로 성대하신 덕에 누를 끼침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서 전례가 없는 이런 예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여겼습니다. 저 오대(五代) 남북의 임금들 중에는 혹 아들로서 아비를 잇고 아우로서 형을 이은 자들까지도 대부분 조라고 호칭하여, 예를 더럽히는 혐의는 생각지 않고 구차하게 일시의 호칭만을 분에 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함부로 한 일에 대하여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선대를 이어받은 임금은 비록 공덕이 있어 영원히 체천(遞遷)하지 않는 묘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종(宗)이 되는 것이지 조(祖)가 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창업하여 대통(大統)을 전했는데도 단지 세실(世室)만을 만들었을 뿐이니 이것이 곧 종이 된다는 증거이며, 당나라 태종은 집안을 나라로 만들었으되 묘호를 종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곧 조가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한 문제(漢文帝)여씨(呂氏)의 난리를 평정하고, 당 현종(唐玄宗)위온(韋溫)의 난리를 평정하였으며, 진 원제(晋元帝)송 고종(宋高宗)은 혼란한 뒤에 나라를 부흥시켰으니 역시 한 시대를 중흥시켰다고 할 만한데도 그 신하들이 모두 감히 조(祖)의 호칭을 쓰지 않은 것은 의례(義例)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무(尤袤)가 ‘고종이 비록 중흥한 공이 있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인 휘종(徽宗)의 대통을 이었으니 묘호를 종이라 칭해야 마땅하지 광무(光武)와 같이 조로 칭해서는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다만 당시의 정론(正論)일 뿐만 아니라 만고(萬古)의 정론(定論)으로 고종의 성덕(盛德)에 훼손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차례로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면, 그러한 흔적을 징험할 수 있으니 이른바 공이 있으면 조라 칭하고 덕이 있으면 종이라 칭합니다만 그 뜻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체천하지 않는 종묘에 모셔진 것이라면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조라고 해서 종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종(太宗)·중종(中宗)·세종(世宗)·고종(高宗)은 묘호를 모두 종이라 칭하였으나 체천하지 않는 묘가 되는 것은 진실로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를 어기는 혐의를 무릅쓰고 계통(繼統)의 의리를 어지럽히면서 호칭해서는 안 될 조(祖)의 호칭을 쓴 뒤에야 비로소 체천하지 않는 종묘가 되어 성대한 덕에 빛을 더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탄생하신 처음부터 유달리 귀여워하시는 성조(聖祖)012) 의 사랑을 많이 받아 나라를 부탁하여 맡기려는 뜻이 이미 이름을 지어주시던 날에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화란을 평정하여 다시 윤기(倫紀)를 바로잡고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 드디어 왕위에 오르시어 낳아주신 부모를 추존하는 전례(典禮)를 이미 거행하셨으니,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은 계통이 절로 있는 것입니다. 묘를 체천하지 않고 묘호를 종이라 칭하는 것이 어찌 성상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와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는 의리에 부족한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지금 의리도 헤아리지 않고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 예(例)를 무시한 전례를 따라 그대로 조(祖)의 호칭을 사용한다면 일이 경(經)에 의거한 것이 아니어서 예의 뜻과 크게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원종(元宗) 이상 열성(列聖)의 묘에 대해 능멸하고 억압하는 혐의를 면할 수 없어 하늘에 계시는 대행 대왕의 혼령께서 저승에서 불안해 하실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다만 대행 대왕께 비례(非禮)를 씌워 백세의 비난을 부르는 것이 될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중종 대왕께서는 연산(燕山)의 더러운 혼란을 깨끗이 평정하시고 다시 문명의 지극한 정치를 열으셨으되 조라고 호칭하지 않고 단지 종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미천한 신은 식견이 고루하여 관직도 낮고 말도 천박한데 상께서 상중(喪中)에 계시는 이때에 이미 결정된 막중한 의논을 재론하여 주제넘게 말씀을 올렸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빈전(殯殿)에 책명(冊命)을 올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이때를 놓치고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면 선왕(先王)께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할 직분을 시행하지 못하여 평생 한(恨)을 안게 될 것이니, 외람되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미안함이 되는 정도일 뿐이 아닐 것입니다. 며칠 동안 상소문을 올리려 하다가는 다시 말곤 하였으나 끝내 말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통행하던 전례(典禮)이니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함부로 망령된 의논을 내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6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註 010]
    건문(建文)의 난리 : 건문은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명 태조(明太祖)의 태자 의문(懿文)의 둘째 아들로 태자가 죽자 황태손(皇太孫)에 봉해졌고, 태조가 죽은 뒤 황제가 되었음. 정권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제왕(諸王:태조의 아들들)을 제거하려 했는데 연왕(燕王)이 군대를 일으켜 3년 전쟁 끝에 그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사건을 가리킴.
  • [註 011]
    노산(魯山) : 단종.
  • [註 012]
    성조(聖祖) : 선조.

○應敎沈大孚上疏曰:

臣竊聞, 大行大王廟號, 以祖字議上, 已經稟裁。 在臣子崇奉之意, 固無所不用其極, 則宜其有是議也, 或恐其有所未安於義理, 而不允於正論也。 夫以大行大王功德之盛, 受此名號, 似無容議, 而抑臣之所聞, 則有異於此。 自古祖宗之稱, 非有所優劣也。 創業之君, 獨得稱祖者, 以其爲一代開創之主, 而子孫祖之也, 於歷代太祖、高祖之類可見, 而其餘繼體之君, 則雖有大功、大德, 而俱不得稱祖。 此從古以來, 不可破之定理也。 惟光武, 以宗室遠裔, 撥亂於王莽簒竊之後, 群盜蜂起之餘, 而光復舊物, 祀配天, 雖名中興, 實同創業, 故上無所壓, 自爲子孫垂統之祖而稱祖, 其理亦固當然也。 乃若皇 太宗, 雖除建文之難, 而實繼高皇之體, 其始未嘗稱祖。 至嘉靖十七年, 追號成祖, 當時頗有識者之議。 至如我世祖大王, 親受魯山之禪, 上繼文宗之統, 而廟號猶以祖稱, 則臣所傳聞, 固有未及者。 宣祖大王有光國格天之大功, 而議號之日, 擬以祖字, 尹根壽以無義例, 上箚而止。 厥後許筠李爾瞻輩, 造僞搆虛, 擬功光國, 請上尊號於光海光海愧於獨當, 更發稱祖之論, 時無文獻老成, 爲國盡言如尹根壽者, 而其事遂行, 此皆未安於義理。 臣嘗痛恨於當時君臣, 義理不明, 徒知崇奉之爲尊, 而不知上累乎盛德, 俑此無例之例也。 惟彼五代南北之君, 或以子繼父, 或以弟繼兄者, 亦多稱祖, 不顧誣禮之嫌, 苟侈一時之號。 其屯難之世, 妄作之事, 尙何足論哉? 是以繼體之君, 則雖有功有德, 爲百世不遷之廟, 而亦皆爲宗而不爲祖。 如武王, 開創垂統, 而只爲世室, 此則爲宗之驗也; 太宗, 化家爲國, 而廟號稱宗, 此則不爲祖之驗也。 , 殲之亂; , 興板蕩之餘, 亦可謂一時之中興, 而爲其臣子者, 皆不敢以祖號加之者, 以無義例也。 故尤袤之言曰: "高宗雖有中興之功, 而纉徽宗父子之統, 廟號自當稱宗, 不當同於光武。" 此不特當時之正論, 自是萬古之定論, 而非有損於高宗者也。 故歷考前史, 其跡可徵, 所謂以功稱祖, 以德稱宗者, 其義蓋不外此, 而俱爲不遷之廟, 非宗貶於祖, 而祖加於宗。 故曰太宗、曰中宗、曰世宗、曰高宗, 廟皆稱宗, 而其爲不遷, 則固自若也。 亦何待於冒越禮之嫌, 亂繼統之義, 而稱不當稱之祖號, 然後方爲不遷之廟, 而增盛德之光輝也哉? 惟我大行大王誕降初, 大被聖祖所嘉異, 屬托之意, 已見於肇錫之日。 卒能戡定禍亂, 復正倫紀, 奉承慈敎, 遂陟大位, 追隆所生, 典禮旣行, 則以聖繼聖, 自有統緖。 廟則不遷, 號則稱宗, 夫豈有歉於聖上顯親之孝乎, 有歉於群臣尊上之義乎? 今若不揆義理, 不師古昔, 踵無例之例, 而仍用祖號, 則不但事非經據, 大違禮義, 恐於元宗以上列聖之廟, 不免有凌壓之嫌, 而大行在天之靈, 亦將踧踖不安於冥冥之中也。 夫如是, 則其所以尊顯之者, 適所以加大行以非禮, 而來百世之譏豈不惜哉? 我中宗大王蕩平燕山之穢亂, 復開文明之至治, 而不稱以祖, 只稱以宗, 此非今日之所當仰法者乎? 微臣識見孤陋, 職卑言賤, 當諒闇煢疚之秋, 論已定莫重之議, 煩聒猥越, 罪合萬死, 而第以殯殿上冊之日, 祇在不遠, 失今不言, 後悔無及, 則其所以報先王, 忠殿下之職分, 蓋無所施, 而抱恨於平生, 不止於煩猥之爲未安也。 封章屢日, 將上復已, 而終不能已也。

答曰: "自古通行之典, 勿爲謬執己見, 橫生妄議也。"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6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궁관(宮官)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