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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50권, 인조 27년 5월 8일 병인 1번째기사 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상이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다

상이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승하하였다. 미시에 상의 병이 위독하므로 세자가 의관에게 하령(下令)하니, 의관들이 약을 받들고 달려 들어갔다. 약방 도제조 김자점(金自點), 제조 조경(趙絅), 부제조 김남중(金南重), 주서 이후(李垕), 검열 서필원(徐必遠), 조사기(趙嗣基) 등이 희정당 동쪽에 들어와 앉고, 이윽고 좌의정 이경석(李景奭)도 들어왔는데, 어의(御醫)들이 다 증후가 위독하다고 하였다. 세자가 월랑(月廊)에 자주 나와 어의에게 상의 증후를 말하면 죽력(竹瀝)·청심원(淸心圓) 등의 약을 잇따라 바쳤다. 신시에 세자가 하령하기를,

"상후(上候)가 이에 이르렀는데 중전(中殿)께서 현재 경덕궁(慶德宮)에 계시니 서둘러 모셔왔으면 한다."

하니, 대신이 함께 아뢰기를,

"하령이 매우 마땅하십니다."

하고는, 목메어 울었는데, 사관·의관 등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승지 박장원(朴長遠)·가주서 이만길(李晩吉)·검열 조귀석(趙龜錫)·병조 참의 김수익(金壽翼)으로 하여금 가서 중전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는데, 내시가 안에서 잇따라 나와 매우 급하게 재촉하니, 중외가 황급하였다. 대신이 내관에게 말하기를,

"힘써 진정하고 일체 동요하지 말라."

하고, 물러나오려 할 때에 내시가 말을 전하기를,

"동궁께서 머물러 기다리라 하십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밖에서 와서 말하기를,

"예조 판서 자리가 비었으니 빨리 차출하소서."

하고, 대신이 김육(金堉)을 예조 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공조 판서로 권차(權差)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대신이, 대장(大將)들은 궁성(宮城)을 호위하라는 뜻을 원두표에게 말하여 내보냈다. 세자가 하령하기를,

"대신은 들어오라."

하여, 대신과 제조들이 들어가려 하는데, 조사기가 동열(同列)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따라 들어가야 한다."

하니, 이경석이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올 것 없다."

하였다. 조사기가 말하기를,

"어찌 대신이 안에 들어가는데 사관이 따르지 않는 이치가 있는가."

하고, 이후도 말하였다. 그래서 이후·서필원·조사기 등이 따라 들어가 침전(寢殿)에 이르니, 상은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자점·이경석이 방 안에 들어가니, 세자가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사관 등은 드디어 문 밖에 서고 조경·김남중도 문 밖에 있었다. 세자가 상의 귓가에 대고 말하기를,

"들리십니까? 신이 누구입니까?"

하기를 세 번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못하였다. 김자점·이경석도 말하기를,

"신들이 여기 왔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또한 답하지 못하였다. 대신들이 다 물러나왔는데, 김육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빙궤고명(憑几顧命) 등의 일을 빨리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김자점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경석이 말하기를,

"대제학은 빨리 유교(遺敎)를 지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그때 조경이 대제학인데 불가하다 하며 말하기를,

"유교가 없었는데 굳이 거행하려 한다면 곧 명을 사칭하는 것입니다."

하니, 김자점도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세자가 또 대신을 불러 김자점·이경석조경·김남중·이후·서필원·조사기 등이 들어가 침방 안에 이르렀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이미 궁중에서 났다. 세자의 왼 손가락에 피가 줄줄 흘렀는데, 이는 세자가 손가락을 잘랐으나 대군(大君)의 도움으로 뼈가 절단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중전이 경덕궁에서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협양문(協陽門)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돌아올 때에 상이 승하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막 유시(酉時)를 알린 때였다.

이날 아침에 김자점이경석에게 말하기를,

"산천에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이경석이 글로 김신국(金藎國)에게 묻기를,

"임금의 질병에는 반드시 기도를 거행하는데, 선조(先朝)의 고례(古例)는 어떠하며 종묘에 비는 축문(祝文)의 머리말은 또한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김신국이 답하기를,

"전에 들으니, 인종(仁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중종(中宗)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축문의 머리말에 인종의 어휘(御諱)를 썼다 합니다. 이 일이 《회재집(晦齋集)》에 실려 있다 하는데, 그 상세한 것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백관(百官)이 기도하는 경우는 전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이 말을 세자에게 아뢰니, 조경을 시켜 글을 짓게 하였다. 이 날 중신(重臣)을 보내어 세자를 대신해서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게 하려 하였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김자점·이경석·조경·김육·김남중 등이 곧 들어가 대행왕(大行王)의 침상 앞에 이르렀는데, 원두표도 들어왔다. 대신이 내시를 시켜 대행왕의 침상을 옮겨 머리를 동쪽으로 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속광(屬纊)039) 을 행하였다. 속광이 끝나고 내시 두 사람이 전(殿) 지붕 위에 올라가 ‘상위복(上位復)040) ’이라고 세 번 부르니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왔다. 정원(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의 관원이 옷을 갈아 입고 합문 밖에서 곡림(哭臨)하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곡림하였다. 내관 나업(羅嶪)이 안에서 나와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거느리고 들어가 호위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를 수릉관(守陵官)으로,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을 대전관(大奠官)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세자의 영으로 구인전(具仁廛)정선흥(鄭善興)을 불러 대내에 들어와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는데, 두 사람은 다 내척(內戚)이다.

닷새가 지난 5월 12일에 의례(儀禮)대로 대렴(大殮)하고, 엿새가 지난 13일에 의례대로 성복(成服)하고 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인조(仁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다섯 달이 지난 9월 20일에 장릉(長陵)에 장사지냈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행장(行狀)을 지어 바치고, 대제학 조경이 지문(誌文)을 짓고, 대사헌 조익(趙翼)이 시책(諡冊)을 지어 바치고, 제학 김광욱(金光煜)이 애책(哀冊)을 지어 바쳤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5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39]
    속광(屬纊) : 임종(臨終) 때의 한 절차. 햇솜을 코 밑에 놓아 숨졌는지를 알아보는 것.
  • [註 040]
    상위복(上位復) : 초혼(招魂)의 한 절차로 ‘상감은 돌아오소서.’라는 뜻. 임금이 평소에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마루 위에 올라가 왼손으로 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향하여 이렇게 세 번 부른다. 《오례의(五禮儀)》 흉례복(凶禮復).

○丙寅/上升遐于昌德宮大造殿東寢。 未時, 上疾大漸, 世子下令于醫官, 醫官等奉藥物趨入。 藥房都提調金自點、提調趙絅、副提調金南重、注書李垕、檢閱徐必遠趙嗣基等入坐于熙政堂東, 已而左議政李景奭亦入來, 御醫等皆言證候之危篤。 世子頻數出來于月廊, 言上證候於御醫, 連進竹瀝、淸心圓等藥。 申時, 世子下令曰: "上候至此, 而中殿方在慶德宮, 欲及時迎還矣。" 大臣僉曰: "下令甚當。" 仍哽咽, 史官、醫官等莫不揮泣。 遂使承旨朴長遠, 假注書李晩吉、檢閱趙龜錫、兵曹參議金壽翼, 往迎中殿, 內侍自內相繼出來, 促之甚急, 中外遑遑。 大臣言於內官曰: "務宜鎭靜, 切勿驚擾。" 將欲退出, 內侍傳言曰: "東宮令留待矣。" 戶曹判書元斗杓自外來曰: "禮判有闕, 宜速差出。" 大臣請以金堉權差禮曹判書, 鄭世規權差工曹判書, 世子答曰: "可。" 大臣以大將等宮城扈衛之意, 言於斗杓而出遣之。 世子下令曰: "大臣入來。" 大臣、提調等將入, 趙嗣基謂同列曰: "吾等亦宜隨入。" 李景奭曰: "史官不必入來。" 嗣基曰: "豈有大臣入內, 而史官不隨之理乎?" 李垕亦言之。 於是, 李垕徐必遠趙嗣基等隨入, 至寢殿則上已不能言矣。 自點景奭進入房內, 世子曰: "史官勿入。" 史官等遂立於戶外, 南重, 亦在戶外。 世子呼於上耳邊曰: "聽之否乎? 臣爲誰?" 者三而上不能答。 自點景奭亦曰: "臣等來此。" 上亦不能答。 大臣等皆退, 金堉自外入曰: "憑几顧命等事, 宜速行。" 自點曰: "然。" 景奭曰: "大提學速撰遺敎爲當。" 時, 趙絅爲大提學, 以爲不可曰: "旣無遺敎, 若欲强行, 則是矯命也。" 自點等亦以爲然, 遂止。 世子又召大臣, 於是自點景奭南重必遠嗣基等入至寢房之內, 號哭之聲, 已發於宮中。 世子左手指血出淋漓, 蓋世子斷指, 而賴大君救之, 得不斷骨。 中殿自慶德宮, 由敦化門, 入協陽門, 還御于大內, 上升遐, 日官纔報酉時矣。 是日朝, 自點景奭曰: "山川祈禱, 不可不爲也。" 景奭以書問於金藎國曰: "君父疾病, 必行祈禱, 先朝故例如何, 宗廟祝文頭辭, 亦何以爲之?" 藎國答曰: "曾聞仁廟在東宮時, 爲中廟祈禱, 祝文頭辭, 以仁廟御諱書之。 此事載《晦齋集》云, 而未能記其詳。 至於百官祈禱, 則未知前例有無矣。" 景奭以此白于世子, 使趙絅撰辭。 將於是日, 遣重臣, 代世子祈禱于社稷宗廟, 而未及行。 金自點李景奭趙絅金堉金南重等卽入, 至大行王床前, 元斗杓亦入來。 大臣請使內侍, 移大行床東首, 仍行屬纊。 畢, 內侍二人升殿屋上, 三呼上位復, 大臣以下哭而出。 政院、玉堂、春坊之官, 易服擧臨於閤門之外, 大臣率百官易服擧臨於仁政殿庭。 內官羅嶪自內出來, 率武藝別監入衛。 以咸陵君 李澥爲守陵官, 錦林君 凱胤爲代奠官, 李景奭爲摠護使。 以世子令, 招具仁廛鄭善興入內治喪, 二人皆內戚也。 越五日庚午大斂, 越六日辛未成服如儀, 世子卽位于仁政門, 率群臣, 上謚曰憲文烈武明肅純孝, 廟號曰仁祖。 越五月丙子, 葬長陵。 左議政李景奭撰進行狀, 大提學趙絅撰誌文, 大司憲趙翼撰進謚冊, 提學金光煜撰進哀冊。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5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