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산림 독점의 폐단·생업을 잃은 시민·변경 수비 등을 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산림(山林)과 천택(天澤)을 백성과 공유하는 것이 제왕의 정사입니다. 그런데 동대문 밖부터 평구역(平丘驛)의 산야까지 모두 차지한 자가 있어서 나무꾼이 가지 못하고, 강과 바다까지도 모두 임자가 있어서 고기잡이하는 자들이 생업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경각사(京各司)에서는 하인들이 점점 달아나는데,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형세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이 참으로 어떠한 때인데 토목일이 전보다 더합니까. 삼강(三江)의 백성은 한성부와 공조에서만 부릴 수 있는데, 궁가(宮家)와 세력 있는 집에서도 혹 복태(卜駄)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자가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영선(營繕)하는 일은 대내(大內)를 막론하고 햇수를 한정하여 정지하고, 산림과 강해(江海)를 그대로 차지한 자는 가까운 곳은 헌부에 책임지우고 먼 곳은 혹 어사를 내보내어 귀근(貴近)과 호세(豪勢)까지도 낱낱이 징계하여 다스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북사(北使)014) 가 발매(發賣)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어서 시민이 생업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창고에 저축된 것을 한번 내어서 시장에 미리 주어 물건을 바꾸어 이익을 불리면서 잡물을 장만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시민이 생업을 잃을 걱정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미처 답하기 전에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미리 주어 장만하게 하는 일은 대신이 전에 신에게 말하였으나, 해조의 저축은 전세(田稅)와 삼수량(三手粮)뿐인데, 한번 저축을 죄다 내어 주어도 시민이 사재(私財)처럼 불리고 아끼지 않으면, 한번 칙사의 행차를 겪은 뒤에는 이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어가기 어려운 형세일 뿐만 아니라, 청인(淸人)이 관가에서 값을 주어 장만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발매하는 수가 또한 훨씬 많아질 것이다."
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아뢰기를,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으니, 수시로 비국의 한두 신하를 인견하시기도 하고 옥당의 신하를 소대(召對)하시기도 하여 위아래의 뜻이 통하게 하소서. 또 봄에 순안사(巡按使)를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지금은 봄철이 깊어졌으므로 농사에 방해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를 보내면 출척이 많아질 것이니, 농사철에 영송하는 폐단이 있을 듯하다."
하였다.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이 아뢰기를,
"여러 궁가(宮家) 시장(柴場)의 폐단에 대해 대신도 지적하여 말하지 않고 범연히 궁가라 말하였는데, 동대문 밖은 다 인평 대군(麟坪大君)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흥군(仁興君)과 경평군(慶平君)은 전하께서 난처하신 바가 있겠으나, 능원대군(綾原大君)과 인평 대군도 금단하실 수 없겠습니까. 또 인평 대군 집에 머무르는 한인(漢人)은 무슨 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길에서 한림(翰林)을 때렸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법부(法府)에서 죄를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으나 대군이 숨기고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였다. 김남중이 아뢰기를,
"한림 이후(李垕)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자, 이후가 대답하기를,
"신이 공무로 길에 나갔다가 술에 취한 한인을 만났는데, 그가 갑자기 끌어내렸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 돌려 보낼 것이다. 형추할 수 없으니, 형조에서 결장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서로(西路)에는 믿을 만한 곳이 있는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대답하기를,
"자모 산성(慈母山城)이 첫째입니다."
하고, 김자점은 아뢰기를,
"신은 강도(江都)가 첫째라고 생각합니다. 육지를 죄다 잃더라도 배로 호령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구(海寇)는 강도에서 막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해구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국가의 호령이 행해져야 일을 성취할 수 있는데, 자모 산성은 형세가 좋기는 하나 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좋은 방책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의견도 좋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청국의 자문(咨文) 가운데에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거조인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여기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제는 숙(叔)자를 제거하고 조하(朝賀)하는 일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칙서 가운데에는 그 말이 없으나 이미 태상(太上)이 된 듯합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옛말에 ‘어진이를 찾기에 힘쓴다.’ 하였습니다. 접때 부른 사람들이 다 오지 않으니, 해조를 시켜 탁용(擢用)하여 반드시 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지포(紙砲)는 이기(利器)이니 주사(舟師)도 쓸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사가 쓰기에는 자포(子砲)가 가장 좋고 지포는 불편한 듯하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지금 남북의 근심 중에서 어느 곳이 급한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청국이 염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왜가 염려되나 군사를 움직이려면 먼저 한 가닥 말썽부터 일으킬 것이고, 몽고(蒙古)가 혹 마음을 먹더라도 북경(北京)을 버려두고 우리에게 먼저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청국이 버티지 못하고 의주(義州) 근처에 와서 우리가 접제(接濟)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장차 어찌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근심하는 것도 그것이다. 치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논사(論思)의 장(長)015) 은 오래 비워두지 말아야 할 것인데, 접때 부제학을 다음 정사(政事) 때에 차출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차출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빨리 차출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문(文)·무(武)의 도(道)는 한 편도 치우치게 폐기해서는 안 되는데, 근래 무사(武士)는 자주 재주를 시험하나 문교(文敎)만은 매우 쇠퇴하였으니, 옥당의 유신을 더 권장해야 하겠습니다. 혹 어병(御屛)을 내어 시를 짓게 하기도 하고 소대(召對)하시어 경사(經史)를 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규(舊規)에 전경 문신(專經文臣)016) 이 있으니 이러한 일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천도(天道)도 오래되면 변하고 성왕(聖王)의 변통도 그러합니다. 이경여(李敬輿) 등이 죄받은 지 지금 4년이 되었는데, 요즈음 들으니 이경여와 홍무적(洪茂績)이 다 병이 있다 합니다. 만약 그들이 먼 변방에서 죽는다면 성도(聖度)에 흠이 될 듯합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당초 신이 이경여와는 죄가 같은데 벌이 달랐으므로 전후에 아뢴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또 그의 심적(心迹)에 혹 다른 마음이 있었다면 신이 어찌 감히 좋아서 당악(黨惡)이 될 짓을 하겠습니까. 홍무적은 간관(諫官)으로서 말을 다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스스로 대죄(大罪)에 빠지는 것을 몰랐고, 심로와 이응시도 한때 망령스레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저 역적에게 붙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영상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44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농업-임업(林業)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註 014]북사(北使) : 청 나라 사신.
- [註 015]
논사(論思)의 장(長) : 홍문관 부제학을 이르는 말. 경사(經史)를 강독(講讀)하고 시사(時事)를 논담사려(論談思慮)하는 것은 경연의 직장(職掌)인데, 홍문관 부제학은 경연의 참찬관 한 자리를 겸직하고 시강관 이하는 모두 홍문관 직제학 이하가 겸직한다. 경연과 홍문관은 모두 정3품 아문으로 홍문관 부제학이 그 장관이 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경관직(京官職).- [註 016]
전경 문신(專經文臣) : 오경(五經)을 전공하도록 권과(勸課)된 문신. 전경 문신은 예조가 통훈 대부 이하이고 37세 이하인 자를 초록(抄錄)하여 임금에게 아뢰고 매년 사계절의 첫달에 전강(殿講)하거나 고관(考官)을 임명하여 오경 중 한 서적을 번갈아 고강하게 하여 상벌을 시행한다. 《속대전(續大典)》 예전(禮典) 장권(奬勸).○壬寅/上引見大臣、備局堂上。 左議政李景奭曰: "山林、川澤, 與民共之者, 帝王之政, 而自東大門外, 至平丘驛山野, 皆有占斷者, 樵蘇不得往, 至於長江、大海, 無不有主, 漁採失其業。 以言京各司, 則各司下人, 漸就逃散, 此必有難堪之勢而然也。 此誠何時, 而土木之役, 有加於曩時哉? 三江之民, 惟漢城府、工曹, 可以役使, 而宮家、勢家, 或有責立卜駄者。 臣謂營繕之役, 勿論大內, 限年停罷, 山林、江海之冒占者, 近者責之憲府, 遠者或出御史, 雖貴近、豪勢, 一一懲治。 且北使發賣, 無歲無之, 市民之失業甚矣。 臣意, 不如一發庫儲, 預給市上, 使得以轉換滋殖, 措置雜物, 則市民無失業之歎矣。" 上未及答, 戶曹判書元斗杓曰: "預給措備之事, 大臣曾言於臣, 而該曹所儲, 只田稅、三手糧而已。 一番盡儲而發, 而市民之生殖愛惜, 不如私財, 則一經勑行, 後必難繼。" 上曰: "非但勢有難繼, 淸人若聞自官家給價措備, 則發賣之數, 必且倍矣。" 金自點曰: "日氣向暖時, 或引見備局一二臣, 或召對玉堂之臣, 以通上下之情。 且曾有春間發送巡按之敎矣, 今者春節已深, 恐妨農務。" 上曰: "若送御史, 黜陟必多, 恐有農時迎送之弊。" 大司憲金南重曰: "諸宮家柴場之弊, 大臣亦不斥言, 泛稱宮家, 而東大門外, 皆麟坪大君所占也。 如仁興、慶平, 則殿下雖有所難, 綾原、麟坪, 亦不可以禁斷乎? 且麟坪家所留漢人, 未知何事而率來耶, 路上歐打翰林, 甚可驚愕。 臣欲自法府治罪, 而大君匿之不出矣。" 上曰: "何故至此?" 南重曰: "翰林李垕在此。" 垕對曰: "臣以公事出路, 遇漢人被酒者, 猝被曳下。" 上曰: "近當還送。 不可刑推, 自刑曹決杖。" 上又曰: "西路有可恃處耶?" 鄭太和對曰: "慈母山城爲第一矣。" 自點曰: "臣意江都爲上。 雖盡失陸地, 可以舟楫行號令矣。" 上曰: "海寇則江都恐不能防。" 自點曰: "海寇亦可防禦。" 斗杓曰: "國家號令行, 然後可以濟事。 慈母形勢雖好, 僻處一隅, 恐非長策。" 上曰: "此見亦好。" 上又曰: "淸國咨文中, 有皇父攝政王之語, 此何擧措?" 自點曰: "臣問于來使, 則答云: ‘今則去叔字, 朝賀之事, 與皇帝一體。’ 云。" 太和曰: "勑中雖無此語, 似是已爲太上矣。" 上曰: "然則二帝矣。" 景奭曰: "《語》曰: ‘勞於求賢。’ 頃日所召之人皆不至, 更令該曹擢用, 期於必致。" 上曰: "卿言是矣。" 景奭曰: "紙砲乃利器, 亦可用於舟師。" 上曰: "舟師則子砲爲上, 紙砲似不便矣。" 仍問曰: "當今南北之虞, 何處爲先?" 自點曰: "淸國可慮。" 上曰: "右相意如何?" 太和對曰: "倭雖可憂, 若欲動兵, 必先有一條開釁。 蒙古雖或生心, 必不舍北京而先我。 所可慮者, 淸國若不支而來投近灣之地, 欲望我之接濟, 則將奈之何?" 上曰: "予之所憂者此也。 宜預講綢繆之策也。" 景奭曰: "論思之長, 不當久曠。 頃者副提學有後政差出之敎, 而久未差出矣。" 上曰: "從速差出。" 景奭曰: "文武之道, 不可偏廢。 近來武士則頻數試藝, 而文敎獨甚廢弛, 玉堂儒臣, 宜加勸奬。 或出御屛, 使之製詩, 或賜召對, 論及經史何如?" 上曰: "舊規有專經文臣, 如此事, 著實行之可也。" 自點曰: "天道久則變, 聖王之弛張亦然。 李敬輿等被罪, 今已四年, 近聞敬輿、茂績, 俱有疾病。 若死於絶塞, 則恐有慊於聖度矣。" 景奭曰: "當初臣與敬輿, 罪同罰異, 故前後所達如此矣。 且其心迹, 或有他腸, 則臣豈敢甘心爲黨惡之歸哉? 洪茂績徒知諫官之盡言, 而不知自陷於大罪, 沈𢋡、李應蓍, 亦不過一時妄言耳。 豈有附托於彼逆之理哉? 領相言是也。"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50책 5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44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친(宗親) / 농업-전제(田制) / 농업-임업(林業)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註 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