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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7월 18일 정사 1번째기사 1647년 청 순치(順治) 4년

통제사 김응해가 표류한 복건의 장사치 51인을 잡음을 장계하다. 중국의 소식을 듣고 송환시켜주다

통제사 김응해(金應海)가 표류해 온 복건(福建)의 장사치 51인을 잡았는데, 공작(孔雀) 3마리와 검창(劍槍) 8자루를 얻었다. 김응해가 역관을 시켜 물으니, 그 가운데 서승(徐勝)이라는 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배 주인으로 복건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晋江縣) 사람이다. 중원이 크게 어지러워져 양경(兩京)이 모두 함락되고 숭정 황제(崇禎皇帝)도 붕어하였으며 복왕(福王) 또한 을유년 5월에 패하였다. 정지룡(鄭芝龍)·정지봉(鄭芝鳳)당왕(唐王)을 받들어 7월 1일에 황제의 위에 나아가게 하고 도읍을 복건으로 정하고 융무(隆武)라 개원(改元)하였다. 당왕은 곧 신종(神宗)의 24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이비(李妃)이니, 숭정 황제의 숙부이다. 천하는 13성(省)인데, 오랑캐가 9성을 함락하여 융무가 거느리는 바는 단지 절강(浙江)·복건·광동(廣東)·광서(廣西) 등 4성뿐이다. 재상은 내각(內閣) 마사영(馬士英)이란 자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었는데 지금은 이미 죽었고 하오추(何吾騶)·장덕경(蔣德璟) 등 10 여 인이 있다. 무장으로는 정지룡·정지표(鄭芝豹)·임찰(林察)이 곧 두드러진 자이다. 영월(寧粤)은 군문(軍門) 임찰이 지키고 양광(兩廣)은 군문 정괴초(丁魁楚)가 지키고 있다.

황제께서는 정지룡을 태사(太師)로 삼아 평로후(平盧候)에 봉하고 병사 40만을 거느리게 해서 남경과 북경을 회복하고자 한다. 남군(南軍)은 모두 보병으로 기병이 적고 화수(火手)가 많다. 이자성(李自誠)은 청나라 병사에게 패하여 섬서(陝西)로 달아나다 죽었고, 그의 아들 이틈(李闖)은 운남(雲南)·사천(四川)목국공(沐國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의지하며 황제에게 죄를 청하니, 목국공을 조서로 불러 군사를 합쳐 중원을 도모토록 하고 의 죄를 용서하고 공을 세워 자속(自贖)토록 허락하였다. 정지룡은 경비가 부족하다 하여 황제에게 청한 다음 우리들로 하여금 관은(官銀)을 가지고 가서 무역하여 군량을 돕도록 하였다. 우리들은 금년 5월에 동포(東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였는데, 7월 7일에 귀국으로 표류하게 되었다. 대포에 맞아 배 안의 모든 재보가 온통 불에 타고, 같은 배에 탄 60인 중에 죽은 자가 10인이고 부상한 자는 태반이다."

하였다. 김응해서승 등을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기고 장계하여 아뢰었다. 조정에서 역관을 보내 중원의 사정을 다시 묻고 송환토록 허락하니, 서승 등이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달 9일에 안해성(安海城) 사람 임동영(林東榮)이란 자가 또한 장사일로 복경(福京)에서 일본으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임동영만이 부서진 배조각을 타고 3일 동안 표류하다가 경상 좌수영 용당(龍堂)에 정박하였는데, 그가 하는 말 또한 서승과 같았다. 복경은 바로 복주(福州)인데, 황제가 도읍으로 정한 곳이기 때문에 복경이라 칭한다 한다. 남경과 북경이 청나라에게 함락되면서부터 중원의 소식이 오랫동안 끊겼다가, 이때에 와서 서승 등을 통하여 비로소 듣게 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0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丁巳/統制使金應海福建商賈漂流者五十一人, 得孔雀三、劍槍八。 應海使譯官問之, 其中有徐勝者自言: "我是舡主, 而福建 泉州府 晋江縣人也。 中原大亂, 兩京皆沒, 崇禎皇帝旣崩, 福王亦以乙酉五月繼陷。 鄭芝龍芝鳳等奉唐王, 以七月初一日卽皇帝位, 定都于福建, 改元隆武唐王神宗第二十四子, 母曰李妃, 於崇禎叔父也。 天下十三省, 而虜陷其九, 隆武所統, 只浙江福建廣東廣西四省也。 宰相則內閣馬士英者, 出將入相, 今已死, 有何吾騶蔣德璟等十餘人存焉。 武將則鄭芝龍芝豹林察等, 乃其尤者也。 寧粤軍門林察守之, 兩廣軍門丁魁楚守之。 帝拜芝龍爲太師, 封平虜侯, 統兵四十萬, 欲以恢復北京。 南軍皆步卒, 少騎兵, 而多火手矣。 李自誠見敗於兵, 走死陝西, 而其子往依雲南四川沐國公所, 請罪於皇帝, 有詔召沐國公, 合兵以圖中原, 而赦罪, 許其立功以自贖矣。 芝龍以經用不足, 請於皇帝, 令我等領官銀貿販, 以助軍餉。 我等於今年五月, 駕船於東浦察向日本, 七月七日, 漂到貴國。 爲大砲所中, 全船財寶一火燒盡, 同舟六十人, 死者十人, 傷者太半云。" 應海等, 移置巨濟縣以狀聞。 朝廷遣譯官, 更問中原事情, 且許以送還, 等感泣。 是月初九日, 有安海城林東榮者, 亦以商販, 自福京日本, 遇颶風船覆, 東榮獨得敗船一板而乘之, 漂浮三日, 得泊于慶尙左水營龍堂, 其所言亦與等同。 福京福州也, 以皇帝定都之故, 稱福京云。 自北京陷於淸人, 中原聲問久絶, 至是因等, 始聞之。


    • 【태백산사고본】 48책 48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06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