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이형남·한상국을 파견하여 왜사를 따라가 대마도주를 위문하게 하다
역관(譯官) 이형남(李亨男)·한상국(韓相國)을 파견하여 왜사(倭使)를 따라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위문하게 하였다. 【 도주가 강호(江戶)에 가서 오래 머물다가 대마도로 돌아왔기 때문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가 먼 길 다녀온 것을 위로하였다.】 당초 왜사가 온 것은 전적으로 치조(致吊)하기를 바라서인데, 【 도주가 새로 모상(母喪)을 당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조정이 내간상(內艱喪)에는 조문한 그전의 규례가 없고 뒷날의 폐단만 있다고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귤왜(橘倭)가 일찍이 연향(宴享)을 인해서 민응협(閔應協)·임중(任重)에게 묻기를,
"달단이 벌써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남경(南京)의 이 장군(李將軍)이 패배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 바로 이지성(李志誠)이다.】 그리고 병자년050) 난리에 왕자가 사로잡혔다고 하던데, 국왕과 왕자가 함께 같은 곳에 있습니까? 왕자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사신과 폐백의 숫자는 한결같이 명나라를 섬기던 때와 같이 합니까? 달단이 순치(順治)051) 로 기원(紀元)한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는 지금 무슨 연호(年號)를 씁니까?"
하였는데, 민응협 등이 말하기를,
"당초 표류했던 왜인을 들여보낼 때의 우리 나라 서계(書契) 가운데 청국(淸國)에서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하였소.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달단이란 두 글자가 있어 바야흐로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또 달단에 대하여 물으니, 이른바 달단이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이며 어느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소."
하니, 귤왜가 말하기를,
"명나라를 더러 강남(江南)이라고 일컫기도 하며 조선(朝鮮)을 더러는 고려(高麗)라고 일컫기도 하니, 이것은 역시 서로 호칭(號稱)하는 말이오."
하므로, 민응협이 말하기를,
"양국(兩國)의 서계에 더러는 청국(淸國)이라고 쓰고 더러는 달단이라고 써서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모름지기 곧바로 고쳐 쓰는 것이 옳겠소.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서계를 그대들이 늘 고쳐서 써주기를 바라면 조정이 굽혀서 따라주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 나라의 서계는 어찌하여 두어 글자 고치는 것을 아끼시오."
하자, 귤왜가 말하기를,
"서계는 모두 도춘(道春)의 손에서 나오는데 도주(島主) 역시 한 글자도 고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어떻게 멋대로 고칠 수 있겠소. 귀국이 만약 받지 않으면 의당 가지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또 서계를 이미 전한 뒤에는 한 장의 휴지(休紙)가 되는 데 불과한데 장차 어느 곳에 보이려고 합니까?"
하고, 【 조정이 왜의 서계를 북경(北京)에 알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임중(任重)이 내려 갈 때에 그로 하여금 타일러서 그 두 글자를 고치도록 하였는데 왜의 답이 이와 같았다.】 귤왜가 또 말하기를,
"우리는 처음에 달단을 청국의 총칭으로 여겼을 뿐인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우리도 또한 청국으로 호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청국이 왕자를 잡아간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니, 민응협 등이 말하기를,
"처음에 화친을 핑계대고 왔다가 이런 뜻밖의 거사가 있었으며, 그 뒤에 왕자는 곧바로 돌아오셨고 지금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소."
하였다. 등왜(藤倭)가 또 편지를 보냈는데 작은 종이에 쓰기를,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에 있을 때에 대군(大君)이 도주에게 묻기를 ‘주 황제(朱皇帝)가 복주(福州)에서 피난하여 우리 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남경과 북경이 모두 달단이 차지하는 바가 되었는데도 조정이 일찍이 그대에게 언급하지 않던가?’ 하니, 도주가 답하기를 ‘북경이 함락당했다는 것은 이미 들었지만 남경에서 패배당한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바입니다.’ 하였더니, 대군(大君)·숙부(叔父) 두 사람이 말하기를 ‘조선에 길을 빌어 구원병을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 하니, 도주가 말하기를 ‘조선은 전쟁을 겪은 뒤에 해마다 기근이 들었으며, 도로가 험하고 멀어 군사들이 행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고 하니, 대군이 말하기를 ‘군량은 조선에 의뢰할 필요가 없고 우리 나라에서 배로 운반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며, 이웃나라의 도리로 어찌 길 빌려주기를 꺼리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또 등왜(藤倭)가 치조(致吊)하는 일을 민응협 등에게 간절히 바라면서 더러는 역배(譯輩)를 시키거나 더러는 서찰(書札)로 여러 차례 주고받은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민응협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막았다. 이형남(李亨男) 등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내려감에 이르러서는 등왜에게 말하기를,
"치조(致吊)는 전례(前例)가 없으니 지금 처음으로 시작할 수 없으며 단지 위문하려고 왔을 뿐이오."
하니, 등왜가 말하기를,
"단지 위문하는 것으로만 일컫는다면 가지 않는 것이 나으니 빨리 조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적당하겠소. 우리들이 일본의 사정을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듣고서 위협하는 말로 여기니, 앞으로 만약 조처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면 귀국을 위한 우리의 정성을 알게 될 것이오."
하고, 또 나온 뜻이 마침내 헛된 데로 돌아갔으니 죽고 싶을 뿐이라고 하면서 곧 작은 배를 보내어 본도(本島)에 알리고 도주(島主)의 분부를 기다려 떠나거나 머물 것을 결정하겠다고 말하므로, 민응협이 이 뜻을 치계하여 아뢰었다. 영의정 김자점, 우의정 남이웅 등이 아뢰기를,
"등차(藤差)가 나온 뜻은 전적으로 치조(致吊)하는 한 건에 있었는데, 이전부터 이런 상사(喪事)에는 본래 서로 위문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위문한다면 또 전에 없던 예(例)를 열게 되며, 틀림없이 특송선(特送船)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못합니다. 이 장계를 보건대, 왜차(倭差) 등이 치조 서계(致吊書契)가 없을 것 같으면 역관(譯官)도 들여보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언사가 아주 불손하니 반드시 그 계교를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희로(喜怒)는 염려할 것이 없겠으나 다만 도주(島主)가 일본을 빙자하여 일마다 억지를 부리면 그 형세가 처음부터 끝까지 굳게 거절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갈망하는 때를 인해서 그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만,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기 때문에 일제히 모여 깊이 강구하였습니다. 이시백(李時白)·정태화(鄭太和)·이행원(李行遠)·이시방은 이미 치조한 뒤에는 틀림없이 특송선을 지급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경솔하게 허락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지금 한 척의 배 때문에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리를 크게 잃는다면 그것도 훌륭한 계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원두표(元斗杓)·민성휘(閔聖徽)·이기조(李基祚)는 저들이 실제로 일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도주는 그 사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듯하며, 다만 도주가 우리 나라의 조위(吊慰)를 받으려고 요구하는 것은 배를 보내려고 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도중(島衆)에게 과시하려는 것인데,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마음에 매우 서운하게 여기며 분(憤)을 품고 억지를 부릴 것이라는 근심이 기필코 없으리라는 것은 보장하기 어려우니, 따로 치조 서계(致吊書契)를 짓고 약간의 물품을 갖추어 보내어 그의 상사(喪事)를 돕게 하고 역관(譯官)을 시켜 만송원(萬松院)에서 특송선을 보내는 일은 우리 나라가 난감(難堪)하게 여기는 일이라고 하면서 특송선을 요청하는 한 건은 일체 발설하지 말도록 하는 뜻으로 내용을 잘 꾸며 말하게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거없는 조위(吊慰)를 이미 거절할 수 없다면 전례가 있는 특송선을 어떻게 막겠는가? 길이 열린 뒤에는 대대로 특송선을 요청할 터이니 우리 나라의 민력(民力)이 결단코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헤아려보니 옛날의 규정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온편하고 낫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왜차(倭差)가 이미 사람을 보내어 위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만족스럽지 못한 데 화를 내었으며 또 그 행동이 지저분하여 국가가 업신여김을 당한 것이 극도에 이르렀다. 내려보낸 역관을 오래도록 동래(東萊)에 머물게 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니 즉시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김자점 등이 아뢰기를,
"등왜(藤倭)의 정태(情態)는 미워할 만하니 하교하신 대로 즉시 올라오도록 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기는 합니다만, 왜인이 아무리 조종(操縱)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인해서 앞질러 먼저 되돌아오도록 부른다면 우리가 처치(處置)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조용히 하는데 부족한 듯합니다. 동래 부사로 하여금 다시 그들의 사색(辭色)을 관찰하게 하여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족스럽지 않은 뜻이 있으면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역관들이 먼저 올라오게 하여 업신여김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며, 저들이 만약 그대로 들여보내려고 하면 애당초 정탈(定奪)한 대로 시행하는 것이 온편하고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등왜가 동래부에 40여 일 동안 머물면서 끝내 그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마음에 대단한 불만을 품고 귤왜(橘倭) 및 문위 역관(問慰譯官) 등과 동시에 바다를 건너 떠났다. 이튿날 왜차(倭差) 등원(藤原) 등이 또 대마도에서 와서 말하기를,
"도중(島中)의 봉행(奉行) 등이 차역(差譯)이 들어온다는 기별을 듣고 치조(致吊)하는 일행을 즉시 강호(江戶)로 도달하게 하여 자랑하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지승(智繩)의 편지를 보니 조정이 끝내 받아들여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빠른 배를 타고 나와 지승을 시켜 오래 머물더라도 꼭 소망을 이루도록 기약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승이 벌써 되돌아가버렸으니 이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할 듯하며, 도주(島主)가 속여서 보고한 죄로 형세가 틀림없이 바뀔 것이고 지승도 앞질러 먼저 되돌아간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는데, 민응협이 이것을 계문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7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91면
- 【분류】외교-왜(倭)
○甲午/遣譯官李亨男、韓相國, 隨倭使問慰對馬島主。 【島主往江戶, 久而還島, 故遣使慰其行役也。】 當初倭使之來, 專請致弔, 【島主新遭母喪故云。】 朝廷以爲, 內喪弔問無前規, 有後弊不許。 橘倭嘗因宴享, 問于閔應協、任重曰: "㺚靼旣得北京, 南京、李將軍見敗云, 然耶? 【卽李志誠也。】 丙子之亂, 王子被執云, 國王與王子, 同在一處耶? 王子尙今未還耶? 使价、幣帛之數, 一如事大明之時耶? 㺚靼以順治紀元云, 朝鮮今用何年號耶?" 應協等曰: "當初漂倭入送時, 我國書契中, 以淸國所送爲言。 而回答書契中, 有㺚靼二字, 方以爲怪。 今番又問㺚靼, 所謂㺚靼, 曾所未聞, 未知指何國而言乎?" 倭曰: "大明或稱江南, 朝鮮或稱高麗, 此亦互相稱號之語也。" 應協曰: "兩國書契, 或書淸國, 或書㺚靼, 大相不同, 須卽改書可也。 且我國書契, 爾等每請改書, 而朝廷無不曲從。 爾國書契, 何惜數字之改乎?" 倭曰: "書契皆出於道春之手, 島主亦不得改一字。 況俺等何可擅改? 貴國若不受, 則但當持還而已。 且書契旣傳之後, 不過爲一休紙, 將欲示之何處乎?" 【朝廷欲以倭書契報知北京, 故任重下去時, 使之開諭, 改其二字, 而倭答如此。】 倭又曰: "俺則初以㺚靼爲淸國之摠稱耳。 今聞此言, 俺亦當以淸國稱之。 淸國之拘執王子, 未知因何釁耶。" 應協等曰: "初稱和親而來, 有此不意之擧, 其後王子卽還, 今已卒逝矣。" 藤倭又書送小紙, 有曰:
島主在江戶時, 大君問于島主曰: "朱皇帝避亂于福州, 請援于我國。 南、北京皆爲㺚靼之所據, 而朝廷曾不言及於汝耶?" 島主答曰: "北京被陷, 果已聞之, 而南京見敗, 則曾所未聞矣。" 大君、叔父二人曰: "宜假道朝鮮, 出送援兵。" 島主曰: "朝鮮兵火之餘, 連歲飢饉, 而途路險遠, 師行甚難。" 云, 則大君曰: "軍糧不必藉賴於朝鮮, 當自我國船運。 隣國之道, 豈以假道爲憚?" 云。
且藤倭以致弔事, 懇乞於應協等, 或使譯輩, 或以書札, 縷縷往復, 不知其幾, 而應協等終始防塞。 及李亨男等持書契下去, 言于藤倭曰: "致弔無前例, 今不可創開, 只以問慰而來耳。" 倭曰: "只稱問慰, 不如不去, 宜速還朝。 俺等以日本事情, 無隱悉陳, 而聽之尋常, 以爲恐嚇之言。 日後若有難處之事, 則可知俺爲貴國之誠矣。" 且言: "出來之意, 終歸虛地, 直欲一死。" 云, 卽送小船, 報知本島, 待島主分付, 以爲去留之計, 應協以此意馳聞。 領議政金自點、右議政南以雄等啓曰: "藤差出來之意, 專在於致弔一款, 而自前此等之喪, 本無相問之事。 今若慰問, 則又開無前之例, 必有請船之擧, 故不敢輕許矣。 觀此狀啓, 倭差等以爲, 若無致弔書契, 則譯官亦不當入送, 而言辭頗不遜, 必欲售其計云。 渠之喜怒, 雖不足爲慮, 而但島主憑藉彼國, 隨事生梗, 則其勢似不得終始牢拒。 不如因其渴望之時, 以副其請, 而事係重大, 故齊會熟講, 則李時白、鄭太和、李行遠、李時昉則以爲: ‘旣弔之後則必有給船之擧, 似難輕許, 而今以一船之故, 大失隣好之道, 亦非長策。’ 元斗杓、閔聖徽、李基祚以爲: ‘彼實欲開釁, 則島主之力, 似難輕重於其間, 而但島主要得我國弔慰者, 非特爲送船也, 又欲夸示於島衆, 而終未遂願, 則意甚落莫, 含憤生梗之患, 難保必無。 別撰致弔書契, 備送若干物, 以助其喪, 使譯官以萬松送舡之擧, 爲我國難堪之事, 請船一款, 切勿發說之意, 善爲措辭言之似當。’ 云。" 上曰: "無據之弔, 旣不能拒, 則有例之船, 何以防塞? 開路之後, 代代請船, 我國民力, 決難支堪。 以予揆之, 則莫如堅守舊規之爲便也。" 又下敎曰: "倭差旣請遣人慰問, 而怒其不滿, 又泥其行, 國家之見侮極矣。 下送譯官, 久留東萊, 殊甚不當, 使卽上來。" 金自點等啓曰: "藤倭情態可惡, 似當依聖敎卽令上來, 而倭人雖有操縱之言, 因此而徑先招還, 則在我處置, 似欠從容。 令東萊府使, 更觀其辭色, 實有終始不滿之意, 則趁其未發之前, 譯官等先爲上送, 俾無受侮之事, 而彼若仍欲入送, 則依當初定奪施行, 亦合便宜。" 上從之。 藤倭留東萊府四十餘日, 竟不得遂其所望, 意甚怏怏, 與橘倭及問慰譯官等, 一時渡海而去。 翌日倭差藤原等又自對馬島來言曰: "島中奉行等聞差譯入來之奇, 意謂致弔之行, 卽通于江戶, 以爲矜夸之地矣, 今見智繩書, 則朝廷終不聽許云, 故俺等飛舡出來, 使智繩雖久留, 期於必成, 而智繩今已還去, 此事終恐不成, 島主以瞞告之罪, 勢必遞易, 智繩亦難免徑先發還之罪云。" 應協以此啓聞, 上終不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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