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 부원군 최명길이 공물 제도의 변통에 대하여 차자를 올리다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이 상차하기를,
"일찍이 계해년 무렵에 고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삼도(三道)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맨 먼저 꺼냈는데, 이서(李曙)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극력 찬성하여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다가 갑자년의 변 【 이괄(李适)의 난.】 을 겪은 뒤로 그 법을 모두 시행할 수 없자, 양을 줄여서 거둔 쌀로 공물의 값을 제공하게 하였는데, 이에 민간이 소란스러워지며 ‘반쪼가리 대동법[半大同]’이라고들 하자, 이상(李相)033) 도 더 이상 굳이 고집하지 못하고 상차하여 파하고 말았습니다. 신이 당시에 본청의 유사 당상으로 있었기에 그간 민정(民情)의 편리 여부와 사세(事勢)의 난이(難易)에 대해 아직까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반정(反正) 초기에는 전하의 정사가 새로워지기를 뭇 백성들이 눈을 씻고 바라볼 때였으니 뭔가 해 볼 수 있는 시기였는데도 이 법을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 뒤인데다가 가뭄과 황충의 피해가 잇따라 발생해 백성들이 생활을 꾸려나가지 못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며 역적의 변고가 줄을 이어 국가의 맥이 한 올의 실낱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만 원망하고 탄식해도 원기(元氣)를 상하기에 충분한 터에 금방 실시했다가 금방 그친다면 도리어 나라의 체면만 깎이니, 지금 실시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신은 삼가 근심이 됩니다.
다만 듣건대 해조가 양서(兩西)의 공물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이런 부득이한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일을 시작할 때에는 우선 근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계해년에 대동법을 실시했을 때는 그 의도가 부담을 고르게 하려는 데에 있었는데도 백성들의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대동법 실시의 목적이 경비(經費)를 염출하기 위한 것인만큼 처음부터 그 뜻이 이미 미진한데 어떻게 마무리를 잘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양서의 관향(管餉)은 본래 서쪽 변경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인데, 서쪽의 일이 지금은 이미 조금 완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우선 양서 백성들의 소출을 임시로 공물에 대한 부담으로 대체시킨다면, 말하기도 매우 편하고 재력도 자연 넉넉해질 것입니다.
반정 초기에는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라서 의심하고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도 상당히 남아있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중신(重臣)들이 각기 군관을 대동하고 궐내에 숙직하며 비상의 변고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정묘 호란 뒤에는 지방의 무사들을 모집해 어영군(御營軍)이라 일컫고 삼동(三冬)에 번(番)을 서게 해서 방추(防秋)의 뜻을 부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도 달라졌고 일도 변하였으니 스스로 변통하여 낭비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어영군의 군관은 원래 숙직하는 일이 없으니 더욱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어영군도 만일 상번(上番)하지 않는다면 번거롭게 꼭 장관(將官)을 두어 쓸데없이 늠료(廩料)를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7국(七局)의 출신(出身)034) 들을 묶어 대오를 편성한 것은 초군(哨軍)이나 다름이 없으니, 무사를 대접하는 도리가 결코 아닙니다. 그 가운데 대오에 들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다시 억지로 편입시키려 하지 말고, 혹 죽은 사람이 생기더라도 다른 출신으로 채워 보충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그 밖에도 규정 이외에 무비(武備)에 관련되어 나라의 재력을 축내는 것들은 해조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없애거나 줄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본국의 인심은 중국과 달라 문교(文敎)로 인도하면 순순히 쉽게 따르지만 무력으로 인도하면 도리어 교활한 행동이 늘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변방의 일은 이미 안정되었다고는 아직 말할 수 없으니 무비(武備)를 참으로 소홀히 할 수는 없으나, 또한 차츰 줄여 나가면서 백성들에게 효제 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치고 농사에 힘쓰고 근본에 노력하는 방향으로 인도함으로써 조종조에서 예의로 사양하던 풍속을 회복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의 뜻이 저절로 안정되고 국가의 형세가 저절로 굳건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하께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이때 호조가 공안(貢案)을 변통하고자 청했으나 상이 중대한 일이라며 난색을 표해 의견이 결정되지 않고 있었는데, 명길이 차자를 올려 그 잘못을 논술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상의 뜻을 헤아리고 한 짓이라고 기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이 한 말 중에 채납할 만한 것이 많았던 까닭에 상이 상당히 채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8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공물(貢物) / 군사-중앙군(中央軍)
曾在癸亥年間, 故相李元翼, 首發三道大同之議, 李曙爲戶判, 力贊以成之。 及甲子經變之後, 不能盡行其法, 量殺收米, 以供貢物之價。 於是民間譁然, 謂之半大同, 李相不復堅執, 上箚罷之。 臣時忝本廳有司堂上, 其間民情便否、事勢難易, 尙能記在心目矣。 大槪反正之初, 聖政維新, 群生拭目時, 則可以有爲, 而此法終不得行。 矧今十年兵革之餘, 旱、蝗連仍, 民不聊生, 怨讟朋興, 逆變相繼, 國脈綿綿如線。 一夫怨咨, 足傷元氣, 乍行乍輟, 反損國體, 非時之擧, 臣竊憂之。 第聞, 該曹以兩西貢物出處爲難, 有此不得已之計。 大凡作事, 先觀主意之所在。 癸亥大同, 意在均役, 猶有民言。 今日大同, 意在經費, 初頭立意, 已自未盡, 其何以善其後? 無已則有一焉。 兩西管餉, 本爲責應西邊, 而西事今已稍緩。 姑將兩西民力之所出, 權代兩西貢物之役, 言甚順而力自贍矣。 反正之初, 庶事草創, 危疑頗甚, 休戚重臣, 各帶軍官, 直宿闕內, 以備非常。 丁卯之後, 募集外方武士, 謂之御營軍, 三冬立番, 以寓防秋之意。 而時異事變, 自當變通, 以省浮費。 至於御營軍官, 元無直宿之事, 尤不當仍存。 且御營軍若不上番, 則不必煩設將官, 徒費廩料。 七局出身, 團束作隊, 無異哨軍, 殊非待武士之道。 其中不願入隊者, 勿復强束, 或物故者, 亦勿以他出身添補, 其他規外, 因武備損國財者, 令該曹量宜汰減。 本國人心, 異於中土, 導以文敎, 則順而易從, 導以武力, 則反滋狡獪。 今日邊事, 未可謂已定, 武備固不可忽, 亦宜稍稍裁損, 敎民孝悌忠信之道, 驅民於務農力本之地, 以回祖宗朝禮讓之風, 則民志自定, 國勢自固, 此正今日殿下之所當思也。
時, 戶曹請變通貢案, 而上以擧措重大爲難, 議方未決, 鳴吉乃陳箚, 論其不可。 或以探上意譏之, 而其言多有可采者, 故上頗用之。
- 【태백산사고본】 47책 47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8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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