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할 일로 서울에 온 청나라 사신들을 양화당에서 접견하다
청나라 사신이 조제(吊祭)할 일로 서울에 들어오자, 상이 양화당(養和堂)으로 나가 그들을 접견하고 이르기를,
"내가 고질을 앓고 있는 중에 이런 참통(慘痛)한 상(喪)을 당하여 몇 달 아파 누워 있다 보니, 교영(郊迎)의 예까지 폐하였으므로, 황공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이 누추한 자리에서 배칙(拜勅)164) 의 의식을 간략하게 거행하고자 합니다."
하니, 정명수(鄭命壽)가 세 사신의 뜻으로 답하기를,
"병 때문에 칙서를 예식대로 맞이하지 못하는 것은 형편이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칙서 앞으로 나아가, 한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一拜三叩頭] 예를 행하고 이어 칙서를 받았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는 조선 국왕(朝鮮國王) 이휘(李諱)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사신이 북경에 옴으로 인하여 너의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문득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다. 세자가 북경에 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의 언어 행동이 눈앞에 선하여 대단히 애처로운 마음을 더욱 느낀다. 길이 생각건대, 동국(東國)이 옛 어진 임금을 본받아 우리 왕실을 보호할 훌륭한 제후국이 되리라 여겼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헤아렸겠는가. 아, 가슴아프다. 특별히 공부 상서(工部尙書) 흥능(興能), 예부 계심랑(禮部啓心郞) 오흑(鄔黑), 통사관(通事官) 고아마홍(孤兒馬紅) 【 정명수이다.】 을 보내어 향폐(香幣)165) ·생례(牲醴)166) ·부수(賻禭)167) 로 세자에게 유제(諭祭)하게 하였으므로 이렇게 유시하노라."
하였고, 다음으로 섭정왕(攝政王)의 서신을 열어보니, 그 글에 이르기를,
"황숙부(皇叔父)인 섭정왕은 조선 국왕에게 글로써 위문합니다. 갑자기 세자의 부음을 듣고 깊이 놀라고 애도하였습니다. 세자는 은혜롭고 온화하고 돈후하고 정성스러워 문채가 금옥(金玉) 같았으므로, 국왕을 도와 덕화를 펴서 우리 왕실의 훌륭한 제후가 되기를 방금 기약했는데, 어쩌면 그리도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우하지 않고 갑자기 중도에서 꺾어버린단 말입니까. 국왕 부자(父子)의 지극한 정리를 생각하면 어찌 그 슬픔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국왕께서는 높은 연세에 질병까지 있는 터라, 지나치게 슬퍼하시는 것이 더욱 심신을 상하기 쉬우니, 의당 음식 거처를 때에 맞게 하고 의약(醫藥)으로 몸을 보호하며 힘써 너그러이 풀어버릴 것을 생각하여 영원한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칙서를 보고 나서 사례하기를,
"황제께서 세자의 상을 측은하게 여기시어 귀신(貴臣)들을 보내서 칙서로 유시하시고 또 조제(吊祭)까지 내리셨으니, 황제의 은혜가 망극합니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답하기를,
"황제와 섭정왕이 세자의 부음을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와서 조위하게 하셨습니다."
하고, 또 ‘슬픔 억제하기를 스스로 힘쓰라.’는 것으로 상께 권면하자, 상이 거듭 사례하여 마지않았다. 상이 인하여 이르기를,
"전하는 말을 듣건대 남경(南京)이 이미 평정되었다 하니, 모두가 황제와 섭정왕의 큰 복입니다."
하니, 정명수가 말하기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미 남경을 평정하였고, 유적(流賊)은 또 팔왕(八王)에게 쫓기어 두 목 이자성(李自成)이 변복(變服)을 하고 도망쳤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정명수가 좌우 신하들을 물리치기를 청하므로, 상이 시신(侍臣)들을 합외(閤外)168) 에 나가 있도록 하니, 환관 두 사람만 남아서 상을 모시었다. 이때 사관(史官)이 합외에서 바라보니, 통역관이 상과 칙사 사이를 세 차례 왕복하였다. 한참 뒤에 상이 시신들을 들어오라고 명하였고, 칙사는 밖으로 나갔다. 상이 명하여 도승지 김광욱(金光煜)을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칙사가 섭정왕의 뜻으로 전언(傳言)하기를 ‘동방의 인심이 좋지 않은데, 이런 때에 만일 어린 원손을 후사로 삼는다면 인심이 위의(危疑)하여 불안할 듯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실대로 고하였더니, 네 사신들이 다 기뻐하여 말하기를 ‘국왕에게 이미 정해진 계책이 있으니 동방의 행복입니다.’고 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31면
- 【분류】외교-야(野)
- [註 164]배칙(拜勅) : 칙서를 받음.
- [註 165]
향폐(香幣) : 향과 폐백.- [註 166]
○淸使以弔祭事入京, 上出接于養和堂, 謂曰: "沈痼之中, 遭此慘痛之喪, 病臥數月, 至廢郊迎之禮, 不勝惶恐。 請於陋次, 略行拜勑之儀。" 命壽以三使之意答曰: "病不能迎勑, 其勢固然矣。" 上就勑書前行一拜三叩頭之禮, 仍受勑, 其勑曰:
皇帝勑諭朝鮮國王 李諱。 來使至京, 忽聞爾世子溘逝, 深爲驚悼。 追想世子在京時, 言動宛然, 益加痛惜。 永惟東國象賢, 藩屛攸賴, 豈料一朝, 遽至於此? 嗟乎, 傷哉! 特差工部尙書興能、禮部啓心郞鄔黑、通事官孤兒馬紅, 【鄭命壽也。】 以香幣、牲醴、賻檖, 諭祭於世子, 故諭。
次開攝政王書, 其書曰:
皇叔父攝政王, 書慰朝鮮國王。 忽聞世子訃音, 深用驚悼。 世子惠和敦恪, 金玉其章, 方期佐王宣化, 爲我良翰, 何天不祐善, 一朝中摧? 念王父子至情, 豈能忘慼? 王高年抱恙, 過哀尤易傷神, 宜時起居, 輔醫藥勉思寬, 解以迎遐福。
上覽訖謝曰: "皇帝愍惻世子之喪, 委送貴臣, 諭之以勑, 又賜弔祭, 皇恩罔極。" 淸使答曰: "皇帝與攝政王, 聞訃驚慘, 使俺等來弔。" 且勉上以抑哀自强, 上申謝不已。 仍曰: "側聞, 南京已平, 無非皇帝與攝政王之洪福也。" 命壽曰: "荷天之祐, 已克南京, 流賊又爲八王所逐, 李自成變服而逃矣。" 命壽請辟左右, 上令侍臣出閤外, 惟宦者二人侍。 史官在閤外望見, 譯官往復者三。 良久, 上命侍臣入, 勑使出。 上命都承旨金光煜進前, 謂曰: "勑使以攝政王之意, 傳言: ‘東方人心不淑, 當此之時, 若以幼稚元孫爲嗣, 恐危疑不安也。’ 予乃告之以實, 四使皆喜曰: ‘國王已有定計, 則東方之幸也。’ 云矣。"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31면
- 【분류】외교-야(野)
- [註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