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당상·육경 등을 인견하여 후사를 바꿀 일을 의논하다
상이 대신 및 정부의 당상·육경·판윤·양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洪瑞鳳), 영중추부사 심열(沈悅), 낙흥 부원군 김자점(金自點), 판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우찬성 이덕형(李德泂),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 판윤 허휘(許徽), 공조 판서 이시백(李時白),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 예조 판서 이식(李植), 좌참찬 김수현(金壽賢), 호조 판서 정태화(鄭太和), 우참찬 김육(金堉), 부제학 이목(李楘), 대사간 여이징(呂爾徵) 등 16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에게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이따금 심해지고 원손은 저렇듯 미약하니, 내가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 경들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김류가 대답하기를,
"조야가 한창 전하의 강릉(岡陵)처럼 높고 큰 복을 송축(頌祝)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들은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질병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국사가 날로 어렵고 위태로운 데로 내리닥치니, 만일 내가 죽고 나면 어린 임금으로서는 임금 자리를 담당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대군(大君)들 가운데서 선택하여 세우고자 한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 이 하교는 비록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하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신들은 두렵고 의혹스러워서 말할 바를 모르겠으니, 의당 여러 신하에게 널리 물으셔야 합니다."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太子)가 없으면 태손(太孫)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잘 다스려진 세상에도 반드시 나라에 장군(長君)148) 이 있는 것을 복으로 여겼는데, 더구나 오늘날 같은 때이겠는가."
하니, 심열이 아뢰기를,
"홍서봉의 말이 신의 뜻과 정히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 때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량이 있었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자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질병이 쾌차하지 않으시고 국사가 어려워진 것 때문에 종사와 생민의 대계를 위하여 이 말씀을 내신 것이니, 다시 여러 신하에게 물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홍서봉과 다름이 없습니다. 세적(世嫡)149) 이 계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떳떳한 법 이외에는 다시 진달할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떳떳한 법을 지키면 비록 어려운 시기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갑자기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서 흔히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원손에게 기대를 건 지 이미 오래인데, 만일 이 말을 듣는다면 중외의 인심이 반드시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우리 세조(世祖)께서는 원손에게 자리를 전하지 않고 예종(睿宗)150) 에게 전하였는데도, 당시 조신(朝臣)들이 이의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과연 그 조신들이 모두 불충한 자들이었단 말인가. 대신이 국가의 대사를 당해서는 의당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인데, 한갓 평범한 얘기로써 책임 메꿀 거리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의 도리이겠는가. 이른바 인심이 소란해질 것이라는 말도 그렇지가 않다. 권도를 행해서 중도를 얻는 것이 바로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리인데, 무슨 소란해질 걱정이 있단 말인가."
하고는, 상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이 일은 오로지 영상에게 달려 있으니, 경이 결단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수상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어찌 감히 혼자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종사의 존망이 이 일에서 결판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뭇 신하들 가운데 진실로 감히 다르게 의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이 존망에 관계된다고 반드시 볼 수 없는데도 비상한 도리를 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대신들은 국사를 스스로 담당하여 자기 몸 생각할 줄을 몰랐다. 우리 태종조(太宗朝) 때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동궁에 있을 적에 백관이 그를 폐할 것을 청하여 정청(庭請)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나라를 중히 여겨 후환을 돌아보지 않은 것이다. 그때 만일 태종께서 윤허하시지 않았더라면 후일의 화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하였는데, 지금 경들은 옳은 줄을 알면서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덕종(德宗)151) 이 동궁에 계시다가 천순(天順)152) 정축년에 승하하시고, 예종(睿宗)153) 이 무자년(1468)에 계통을 이었고 보면, 당시 성종(成宗)154) 의 나이는 12세였고 월산 대군(月山大君)155) 은 또 나이가 더 많았는데도, 광묘(光廟)156) 께서 왕세자를 이렇게 세우신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월산 대군은 자질이 총명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당시 성종의 나이도 10세가 넘었던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성종이, 덕종이 승하하시던 정축년에 탄생하였으므로, 세조가 승하하시던 무자년에 이르러 12세가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열로 말하자면 세자로 세워야 할 사람이 월산 대군이었으나, 일에는 때에 따라 변통하는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상도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세조께서 왜 월산 대군에게 전하지 않고 예종에게 전했겠으며, 만일 장유(長幼)의 차례로 말한다면 예종이 어째서 월산 대군을 그만두고 성종을 세웠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세조의 세대에는 국가가 무사하였는데도 상도에 위배되는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대성인의 처사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이것은 아마도 현명한 이를 가리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조조 때에는 의심스럽고 불안한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반드시 장군(長君)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니, 만일 현명한 이를 가리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성종의 성스러움이 어찌 꼭 예종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나 역시 순서에 따라 전하는 것이 매우 순리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오늘날의 형세는 반드시 나라에 나이 찬 임금이 있는 다음에야 막중한 종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신의 뜻도 홍서봉의 말을 옳게 여깁니다."
하고, 구인후가 아뢰기를,
"전하의 뜻은 종사의 대계를 위하심이니,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이시백이 아뢰기를,
"홍서봉과 이덕형 두 대신의 말은 모두가 경상(經常)의 도리이므로, 신은 두 대신의 뜻을 옳게 여깁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을 비록 사직의 복이라고는 하지만, 수자(樹子)157) 를 바꾸지 말라는 것이 바로 선왕(先王)의 법입니다. 또 국가 안위의 기틀을 만일 촛불로 비추어 보듯이 거북으로 점을 치듯이 환히 알 수 있다면 성상께서 생각하시는 것에도 견해가 없지 않겠으나, 만일 한번 변통하여 처리하는 거조를 행했다가 도리어 사방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비록 이로움으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옳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식이 아뢰기를,
"서생(書生)의 소견은 상도만을 지킬 뿐이니, 어찌 임시 응변을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서생은 평소에 글을 읽는데도 때에 맞추어 쓰는 도리를 모른다면, 비록 머리 속에 시서(詩書)가 들어 있은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 또 오늘날 임금을 정하는 계책이 어찌 알기 어려운 권모 술수 같은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식이 아뢰기를,
"상도만 지키다가는 종사가 반드시 위태롭게 되고, 권도를 행하여야 국가가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이 거조가 불가하지 않겠으나, 신의 생각에는 상도를 지키지 않으면 도리어 편안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국가의 중대한 일은 한두 사람의 소견으로 결단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대신에게 익히 강구하게 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하고, 김육이 아뢰기를,
"세조조에는 국가가 평온하였기 때문에 상도에 위배되는 처사를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형세는 그 당시와 다르니, 가벼이 행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뜻은 김육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사의 장관들도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라."
하니, 이목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후 왕통을 이은 것이 정연하니, 만일 권도를 갑자기 행한다면 반드시 큰 걱정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여이징이 아뢰기를,
"종사의 계책은 모름지기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꼭 신에게 물으시고자 한다면 신에게는 상도를 지키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성난 어조로 꾸짖어 이르기를,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은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하니, 좌우가 말이 없이 잠잠하였다. 이윽고 김자점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성상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의당 속히 단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하여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뭇 신하들의 말이 신의 뜻과는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소견으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김류가 아뢰기를,
"계해년158) 반정(反正)의 거사와 남한 산성 출성(出城)의 일이야말로 어찌 비상한 조처로서 모두가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은 성상을 받들고 의심없이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이미 붙여졌는데도 전하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이는 필시 궁중(宮中)의 일로서 바깥 사람이 미처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만일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이 나와 부합된다. 대군이 비록 둘이 있어도 모두 취할 만한 것은 없으나, 장성한 사람이 어린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런 계책을 한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양녕 대군은 덕망을 잃고 법도에 어긋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조신들 간에 폐립(廢立)의 청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원손이 어려서 아직 덕망을 잃은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늘의 하교가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 의혹하고 뭇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의 사부가 【 사부는 김육·이식·이경석·이목을 가리킨 것이다.】 모두 이 좌중에 있으니, 어찌 원손이 현명한지 불초한지를 분명히 모르겠는가."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이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그 기질을 본다면 어찌 장래에 성취할 바를 모르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류가 갑자기 아뢰기를,
"상께서 만일 분명한 전교를 내리신다면 당장에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손은 자질이 밝지 못하여 결코 나라를 감당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
하므로, 이식이 아뢰기를,
"진강(進講)할 때에 원손의 재기(才氣)가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도 강서(講書)의 반열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나,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이목은 병이 발작하여 미리 나갔기 때문에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상이 이르기를,
"한갓 그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또한 말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낙흥 부원군은 앞서 하던 말을 끝내지 못했는데, 어찌 말을 끝내지 않으려는가?"
하니, 김자점이 앞서와 같이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인데도 이와 같이 흐리멍덩하게 말을 하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종사를 위해 깊고 원대하게 계획하시는데 어찌 소견이 없으시겠습니까."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경의 뜻은 이 일을 불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 일을 하심은 천하를 만인과 함께 하는 공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사적인 뜻이 있겠습니까."
하고, 홍서봉이 아뢰기를,
"신이 계달하는 것은 경상의 도리일 뿐이니, 권도를 쓰는 경우는 성상께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발끈 성을 내어 불쾌한 안색으로 이르기를,
"대신의 의논이 모두 동일한 다음에야 큰 계책을 결단할 수 있는데, 매양 경상(經常) 두 글자를 고집하여 말하는 뒷받침으로 삼아, 흐리멍덩하게 견강부회하여 분명하게 말을 하려 하지 않는구나. 이런 큰일을 당하여 따르려면 즉시 따르고, 따르지 않으려거든 끝까지 따르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군자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어찌 이처럼 흐리멍덩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상이 매우 노하였으므로, 좌우에서 모두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심열이 아뢰기를,
"경상으로 말하자면 신민의 촉망이 절로 소재처가 있는데, 뜻밖에 오늘날 이런 비상한 거조가 있으므로 신들의 말이 이러한 것입니다. 만일 반드시 이렇게 하여야만 종사와 신민을 편안히 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어찌 권도를 쓰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시임 대신 및 원훈 대신이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다시 물어서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상의 뜻은 비록 원손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장군(長君)을 얻을 것을 생각하신 것이지만 비상한 거조를 어찌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나이를 논하는 것은 현명함을 논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에서 원손의 현명함은 언급하지 않고 나이만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덕을 성취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닌데, 어찌 나이 어린 것 때문에 함부로 폐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원손이 전하의 슬하에 있은 지 이미 오래이니, 전하께서는 원손의 현명한지 여부에 대해서 아마 진작 환히 알고 계실 것이나, 외정(外庭)의 신하들은 그 내막을 알 길이 없으니, 더욱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민들이 모두 이미 원손에게 기대를 걸어 적자손(嫡子孫)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줄로 알고 있을 뿐인데, 만일 신들이 경솔하게 전하의 뜻을 따라버린다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애당초 털끝만큼의 사의(私意)도 없이 종사의 대계만을 위하신 것이니, 만일 상도를 뒤엎고 권도를 행해서 종사가 영원히 이를 힘입게만 된다면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신 또한 제왕의 경상적인 전법만을 변통성 없이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심열이 아뢰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이 우물쭈물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과실이 아닙니다. 세자가 이미 졸하였으면 뒤를 이을 사람은 원손인데, 국본(國本)을 바꾸어 세우는 일을 어찌 말 한 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덕형이 아뢰기를,
"이미 원손의 명호가 바로잡아졌고 또 보양관(輔養官)도 세웠으니, 위호(位號)가 정해진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바꿀 수 없는 경상의 전법은 옛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하의 도리에 있어, 갑자기 상도에 위배되는 일을 당했을 때는 의당 경도를 지키는 것으로 논쟁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권도를 쓰는 것에 순종해야겠습니까. 오늘 성상의 하교는 비록 종사를 위한 계책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미 바로잡힌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들이 만일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버린다면 장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상이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이르기를,
"대신들의 뜻은 모두 일치되었는가?"
하므로, 김류가 아뢰기를,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행하여 자식들이 다 죽고 둘만 남아 있으니, 대신이 그 중에 나은 사람을 가려서 결정하라. 이는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경우와도 다르니, 오직 그 중 나은 사람을 가릴 뿐이다."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대군은 조신들과 서로 접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우열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식을 알기로는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성상의 간택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다 용렬하니 취하고 버릴 것도 없다. 나는 그 중에 장자를 세우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장자로 적통(嫡統)을 세우는 것이 사리에 순합니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청나라 사신이 오면 반드시 국본(國本)을 물을 것이므로, 급급하게 의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이 밖에는 더 이상 의논할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명백하게 하교하여 뭇 신하들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림 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노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승전(承傳)을 받들어야겠습니까?"
하니, 좌우에서 모두 속으로 웃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것이 없다."
하였다. 김류가 예조로 하여금 받들어 거행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천히 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일찍이 선왕조의 실록을 상고해 보건대, 덕종(德宗)이 동궁에 있다가 천순(天順)159) 정축년160) 에 승하하였는데, 당시 월산 대군(月山大君)도 아직 어렸고 성종(成宗)은 막 태어났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해 12월에 예종(睿宗)을 세자로 책봉하고 명(明)나라에 주청 자문(奏請咨文)을 보냈는데, 그 자문에 이르기를 ‘전 세자 장(暲)의 동모제(同母弟)인 황(晄)이 현재 나이 9세인데, 나라 사람들이 그를 후사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예종이 세자로 책봉된 지 12년째인 무자년161) 에 광묘(光廟)162) 가 승하하였다. 그런데 지금 김류가 이른바 ‘광묘가 승하할 때에 성종의 나이 12세이고, 월산 대군은 또 더 많았는데도 오히려 예종을 후사로 삼았다.’ 한 것은 김류가 예종의 세자 책봉이 성종이 막 태어나던 해에 있었음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거짓 모르는 체하고 ‘성종이 12세이고 월산 대군의 나이가 또 더 많다.’는 말만을 하여, 마치 선왕의 세대에도 이미 장성한 원손(元孫)을 세우지 않고 차자(次子)에게 후사를 전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해서 그 일을 끌어다가 오늘날의 증거로 삼은 것이니, 그 임금의 비위를 미리 알아 받든 정상을 표출(表出)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상이 처음 말을 냈을 때는 ‘나라에는 장군(長君)이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말했을 뿐, 원손의 불초에 대해서는 애당초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김류가 이내 덕망을 잃고 법도를 어그러뜨린 양녕 대군(讓寧大君)의 사실을 끌어다 말하여 상으로 하여금 반드시 원손의 불초함을 말하게 하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이던가. 김자점은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다만 원훈(元勳)이라는 것 때문에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보면, 그가 임금의 뜻대로 하기를 도리어 권유하고 순종한 것은 진실로 책망할 거리도 못 된다. 홍서봉이 맨 처음 경상(經常) 두 자를 발론하자, 심열 이하가 모두 그 말을 따랐으나 결국은 다 아첨하는 말로 끝내고 말았으니, 그 중에는 이덕형이 조금 나은 사람이라 하겠다. 또 이식·이경석·김육·이목은 모두 보양관(輔養官)으로 일컬어진 사람들이고 보면, 사체가 다른 신하들과는 같지 않은데도 끝내 할 말을 감히 기탄없이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목이 먼저 나가버린 것이 과연 병이 발작해서 일어났던 것인가, 아니면 왕의 후사(後嗣)를 바꾸자는 의논에 참예할 수 없다고 여겨 거짓 병을 핑계하고 지레 일어났던 것인가. 아마도 이목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 듯하나 알 수 없다. 아, 곧은 도리를 따르는 것을 군자라 하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비부(鄙夫)라 하니, 임금의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경우는 소인일 뿐이다. 신은 누가 군자이고 누가 비부이고 누가 소인인 줄을 모르겠으나, 말이 입에서 나오면 그 마음을 덮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찾아볼 경우 후세에 반드시 이를 분변해 낼 자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낱낱이 기록하여 모두 남겨두는 바이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2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전사(前史) / 역사-사학(史學)
- [註 148]장군(長君) : 장성한 공자(公子).
- [註 149]
세적(世嫡) : 대를 이을 맏자식.- [註 150]
예종(睿宗) : 세조의 제2자.- [註 151]
덕종(德宗) : 세조의 큰아들.- [註 152]
천순(天順) :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1457∼1464.- [註 153]
예종(睿宗) : 세조의 둘째아들.- [註 154]
성종(成宗) : 덕종의 둘째아들.- [註 155]
월산 대군(月山大君) : 덕종의 장자.- [註 156]
광묘(光廟) : 세조를 가리킴.- [註 157]
수자(樹子) : 천자의 명으로 후사가 된 제후의 아들.- [註 158]
계해년 : 1623 인조 1년.- [註 159]
천순(天順) : 명 영종의 연호 1457∼1464.- [註 160]
○壬午/ 上引見大臣及政府堂上、六卿、判尹、兩司長官, 領議政金瑬、左議政洪瑞鳳、領中樞府事沈悅、洛興府院君 金自點、判中樞府事李敬輿、右贊成李德泂、兵曹判書具仁垕、判尹許徽、工曹判書李時白、吏曹判書李景奭、禮曹判書李植、左參贊金壽賢、戶曹判書鄭太和、右參贊金堉、副提學李楘、大司諫呂爾徵等十六人入侍。 上謂諸臣曰: "予有宿疾, 往往而劇, 元孫如彼其微弱。 予觀今日之形勢, 不可以待小兒之成長。 未知卿等之意以爲何如?" 瑬對曰: "朝野方頌岡陵之祝, 而殿下遽出此言, 臣等罔知所達。" 上曰: "非徒疾病如此, 國事日阽於艱危, 脫有不諱, 幼沖之主恐不能擔當大器。 予欲於大君中擇立爾。" 瑬曰: "今此下敎, 雖出於爲宗社之大計, 而臣等惶惑不知所言, 宜博詢諸臣。" 瑞鳳曰: "考諸往牒, 太子不在, 繼以太孫, 此乃不易之常經。 反常行權, 恐非國家之福。" 上曰: "雖在治平之世, 必以國有長君爲福, 況今日乎?" 悅曰: "瑞鳳之言, 正合臣意。 殿下雖有微恙, 春秋鼎盛, 元孫雖曰微弱, 已至十歲。 自古幼主之繼緖者何限? 宗統甚重, 恐不可輕議也。" 自點曰: "殿下以疾病之未平、時事之艱虞, 爲宗社、生民之大計, 而發此言, 宜更詢于諸臣而決之。" 敬輿曰: "臣之愚見, 與瑞鳳無異。 世嫡承統, 今古之常經, 常經之外更無所陳。 大抵能守常經, 則雖屬艱虞, 而猶可以保國。 若遽用權道, 則群情不服而多致患難。 今者擧國之係望於元孫已久, 若聞此言, 則中外人心, 必皆波蕩, 甚可懼也。" 上曰: "我世祖不傳於元孫, 傳於睿宗, 當時朝臣無異議, 果皆不忠者耶? 大臣當國家之大事, 宜任其責, 而徒以循常之談, 爲塞責之地, 此豈大臣之道耶? 所謂人心波蕩者, 亦不然。 行權而得中, 乃是鎭定之道, 有何波蕩之憂乎?" 上謂瑬曰: "此事專在於領相, 卿其決之。" 瑬曰: "臣雖忝首相, 顧安敢獨斷乎? 若明知宗社存亡決於此擧, 則群臣固無敢異議者, 而今日之擧, 未見其必係於存亡, 而欲行非常之道, 此臣等之所以不敢輕議也。" 上曰: "古之大臣擔當國事, 不知有其身。 我太宗朝讓寧大君之在東宮也, 百官請廢之, 至於庭請, 是皆以國爲重, 而不顧後患者也。 若使太宗不之許, 則後日之禍有不可測, 而猶且爲之。 今卿等知其可, 而不肯言, 何也?" 瑬曰: "德宗在東宮, 昇遐於天順丁丑, 而睿宗繼統於戊子, 則當時成廟年十二歲矣, 月山大君又加長矣, 而光廟之建儲如此, 未知何故也。" 上曰: "月山大君則性質不慧云, 而當時成宗之年, 亦已過十歲耶?" 瑬曰: "成宗生於丁丑德宗升遐之歲, 故逮戊子世祖升遐之日, 年十二矣。" 上曰: "以序言之, 則當立者月山, 而事有隨時變通者, 故不得不如此爾。 若以爲常經不可不守, 則世祖何以不傳於月山, 而傳於睿宗, 若以長幼言之, 則睿宗何以舍月山, 而立成廟耶?" 瑬曰: "當世祖之世, 國家無事, 而有此反常之擧, 大聖人處事, 誠未可量, 此蓋出於擇賢耶?" 上曰: "世祖朝事, 多危疑, 故必欲立長君。 若出於擇賢, 則成廟之聖, 豈必不及於睿宗耶? 予亦豈不知循序, 而傳之之爲至順也? 第惟今日之勢, 必須國有長君, 然後可以保宗社之重也。" 德泂曰: "臣之意, 亦以瑞鳳之言爲然也。" 仁垕曰: "殿下之意, 爲宗社之大計, 惟在聖斷耳。" 時白曰: "洪、李二大臣之言, 俱是經常之道, 臣則以兩臣之意爲然也。" 景奭曰: "國有長君, 雖曰社稷之福, 無易樹子, 乃是先王之典。 且國家安危之機, 若能如燭照龜卜, 則聖慮所在, 不爲無見, 而若一行處變之擧, 而反致四方之疑惑, 則雖以利害言之, 亦不知其可也。" 植曰: "書生之見, 只守常道, 寧知權變?" 上曰: "所謂書生, 平日讀書, 而不知用權之道, 則雖腹有詩書, 亦安用哉? 且今日定策, 豈如權謀術數之難知者耶?" 植曰: "守經而宗社必危, 行權而國家可安, 則此擧未爲不可, 而臣恐不守經, 則反不得安也。" 壽賢曰: "國家重事, 不可以一二人之見決之, 須熟講於大臣而爲之。" 堉曰: "世祖朝國家寧謐, 故能行反常之擧, 今日形勢異於當時, 恐不可輕易行之也。" 太和曰: "臣之意與堉同矣。" 上曰: "兩司長官, 亦各言其意。" 楘曰: "三代以後, 承統有序, 若遽行權道, 則必有大患矣。" 爾徵曰: "宗社之計, 須與大臣議定, 必欲問臣, 但有守經而已。" 上厲聲曰: "此事必須大臣決之。 卿等但爲此常談, 一朝予若不諱, 卿等何以爲計耶?" 左右默然。 自點曰: "此擧出於聖上之深思遠慮, 宜速斷定, 何必持難耶?" 上喜曰: "此言是也。" 瑬曰: "群臣之言, 似與臣意相反矣。" 上曰: "然則卿之見, 果以爲何如耶?" 瑬曰: "癸亥反正之擧、南漢出城之事, 豈非非常擧措, 而無非爲宗社大計, 故臣奉聖上, 行之不疑。 今也臣民之望, 非不已屬於元孫, 而殿下之敎如此, 此必宮中之事, 有外人所未及知之者。 若上意已定, 則臣何敢可否於其間哉?" 上曰: "卿之意, 與予合矣。 大君雖有二人, 皆無可取, 而成長之人, 異於幼沖, 故有此計也。" 瑬曰: "讓寧大君多失德、敗度之事, 故朝臣有廢立之請。 今則元孫幼沖, 失德未彰, 而猝有今日之敎, 所以人心之驚惑, 而群議之不一也。" 上曰: "元孫之師傅, 皆在坐中, 豈不明知其賢不肖耶?" 【謂堉、植、景奭、楘也】 堉曰: "元孫幼沖, 別無失德矣。" 上曰: "元孫雖在沖年, 若觀其氣質, 則豈不知將來之所成就耶?" 瑬遽曰: "自上若下明敎, 則可以立決。" 上曰: "元孫性質不明, 決非負荷之才也。" 植曰: "進講之時, 可見其英發矣。" 景奭曰: "臣亦進參講書之列, 而幼少之年, 豈可預卜將來之成就耶?" 時, 楘疾作先出, 故未及對。 上曰: "非徒言其賢不肖, 亦言其長幼也。" 又曰: "洛興未畢前說, 盍終言之?" 自點對如前。 上曰: "卿, 元勳大臣, 亦如是朦朧作話耶?" 自點曰: "聖上之爲宗社深謀遠計, 豈無所見哉?" 上曰: "然則卿之意, 不以爲不可也。" 瑬曰: "聖上之爲此擧者, 公天下之心也。 寧有私意於其間哉?" 瑞鳳曰: "臣之所達, 經常之道也。 若夫處權, 在聖上。" 上艴然作色曰: "大臣之議僉同, 然後大策可決, 而每以經常二字爲執言之地, 含糊傅會, 不肯明言。 當此大事, 欲從卽從, 不從則終始不從, 棄職而去宜矣。 士君子行己處心, 豈可如是黯黮耶?" 時上怒甚, 左右皆不敢言。 悅曰: "以經常言之, 則臣民之屬望, 自有所在。 不意今日有此非常之擧, 故臣等之言如是矣。 若以爲宗社臣民, 必如是而可安, 則亦豈無行權之道乎? 時任大臣及元勳, 皆在此, 可以更詢而決之也。" 敬輿曰: "上意雖以元孫之幼沖, 思得長君, 而非常之擧, 豈敢易議? 且論其長幼, 不若論其賢否, 今也聖敎, 不及於元孫之賢否, 而只以長幼爲言。 自古幼年嗣位, 成德保邦者, 亦非一二, 豈可以年之幼沖, 而輕易廢立耶? 元孫之在膝下已久, 其賢不肖, 想已洞燭, 而外庭之臣無由得知, 尤所以不敢輕議也。 今日臣民, 皆已屬望於元孫, 知有世嫡之當承而已, 若率爾將順, 則豈人臣之道耶? 殿下初非有一毫私意, 只爲宗社之大計, 若反常行權, 而宗社永賴, 則其在古昔, 亦有此事, 帝王經常之典, 臣亦知其不可膠守矣。" 悅曰: "今日諸臣之所以持難不決者, 非過也。 世子旣沒, 則當繼者元孫也。 國本之易樹, 豈可立決於一言乎?" 德泂曰: "旣正元孫之名, 又立輔養之官, 則位號之定久矣。 經常不易之典, 可考信於往牒也。 人臣之道, 猝當反常之擧, 當以守經爭之乎, 抑將以處權順之乎? 今日聖敎, 雖以宗社之計爲言, 而猝然一朝, 欲易已正之名號, 群臣若皆靡然從之, 則將焉用彼臣爲哉?" 上默然良久曰: "大臣之意, 則皆歸於一耶?" 瑬曰: "似無異議也。" 上曰: "不幸諸子皆沒, 只有二人, 大臣擇賢而定之。 此非嫡長之比, 唯當擇其賢耳。" 瑞鳳曰: "大君與朝臣, 無相接之事, 何能知其優劣乎? 古人云: ‘知子莫如父。’ 此在睿簡而已。" 上曰: "二人皆劣, 無所取舍。 予欲立長, 未知何如?" 瑬曰: "立嫡以長, 順也。" 上曰: "然。 淸使將來, 必問國本, 故不得不急急議定耳。" 瑬又曰: "此外更無可議, 須明白下敎, 使群臣明知之。" 上曰: "以鳳林大君爲世子。" 自點曰: "當捧承傳乎?" 左右竊笑。 上曰: "無庸爲也。" 瑬請令禮曹奉行, 上曰: "徐爲之未晩也。"
【史臣曰:】
嘗考先朝《實錄》, 德宗在東宮升遐, 在於天順丁丑, 當時月山大君尙幼, 成廟始生。 旋以其年十二月冊睿宗爲世子, 奏請咨文, 有曰: ‘前世子暲母弟晄, 見年九歲, 國人願立爲嗣。’ 云云。 冊封之後十二年戊子, 光廟升遐。 今金瑬所謂: ‘光廟之薨, 成廟之年十二歲, 月山大君又加長矣, 猶以睿宗爲嗣。’ 云者, 瑬非不知睿宗冊封在於成宗始生之年, 而佯若不知, 只擧成廟十二歲, 月山又加長之說, 似若先王之世, 亦有不立已長之元孫, 而傳之次子者然, 引以爲今日之證據, 其逢迎之狀, 不可不表而出之也。 又上之初發言也, 只以國有長君爲辭, 初未嘗言及於元孫之不肖, 瑬乃引讓寧大君失德、敗度之說, 欲使上, 必言其不肖, 獨何心歟? 金自點不學無識, 特以元勳, 致位宰相, 則縱臾承順, 固不足責也。 洪瑞鳳首發經常二字, 沈悅以下皆祖其說, 然皆終之以諂, 李德泂其稍優者乎? 李植、李景奭、金堉、李楘, 官稱輔養, 則事體不同於諸臣, 而終莫敢盡言, 楘之先出, 其果疾作而起乎, 抑以爲不可預於易樹之議, 而僞疾徑起乎? 恐非楘所能及也, 然未可知也。 嗚呼! 直道之謂君子, 承順之謂鄙夫, 至於逢迎, 則小人而已矣。 臣不知某也爲君子, 某也爲鄙夫, 某也爲小人, 言出於口, 不掩其心, 執其言而求其心, 後世必有能辨之者, 是用備錄而具存之。"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2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전사(前史)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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