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이식이 지은 지문의 내용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금상(今上) 15년에 남한 산성의 액환을 당하여 왕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들어갔다가, 9년 뒤인 을유년127) 2월에야 비로소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4월 26일(무인)에 왕세자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졸하였다. 그러자 상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은 중이었으나 친히 상제(喪制)에 임어하시었다. 아, 천운(天運)이 사납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통해 하는 상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날짜를 가려 6월 15일(병인)에 재궁(梓宮)을 발인하고, 19일(경오)에 효릉(孝陵) 우동(右洞)의 을좌 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장례지내기로 하였는데, 신 이식(李植)에게 지문을 짓도록 명하셨다.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 세자의 휘는 조()로, 만력(萬曆)임자년128) 정월 4일(기해)에 회현방(會賢坊)의 잠궁(潛宮)에서 탄생하였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영민하였는데, 상께서 보위(寶位)에 올라서는 으뜸으로 나이 많은 유신(儒臣) 5인을 선발하여 두루 지극하게 교훈시켰다. 을축년129) 정월에는 예(禮)에 따라 원복(元服)130) 을 착용하였고 책명(策命)으로 왕세자(王世子)가 되었다.
정묘 호란 때에는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행행(行幸)하려 하면서 먼저 세자에게 분조(分朝)를 두어 남쪽 지방을 진무(鎭撫)하도록 명하고, 대신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에게 세자를 보필하도록 하였다. 세자는 전주(全州)에 내려가 주둔하면서 무군사(撫軍司)를 개설한 지 한 달 남짓 되어 전쟁이 끝나자, 군대를 파하고 강도로 들어가 부왕을 만나 뵙고서 부왕을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해 10월에는 입학례(入學禮)를 행하고, 12월에는 참의 강석기(姜碩期)의 딸을 맞아 예에 따라 빈(嬪)으로 봉하여 친영(親迎)하였다. 갑술년131) 정월에는 황조(皇朝)에서 우리의 주청(奏請)에 따라 책봉(策封)의 고명(誥命)을 반포해 내리고 아울러 면복(冕服)과 채단(綵段)을 내렸는데, 태감(太監) 노유영(盧維寧)이 와서 이 일을 선포하자, 세자는 그를 맞이하고 전송하는 것과 연향의 예를 의식대로 하였다.
을해년132) 겨울에는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자 예를 집행하며 거상(居喪)하던 중, 갑자기 병자 호란을 만나 남한 산성으로 행행하는 부왕을 따라갔다. 정축년 2월에는 인질이 되어 서쪽으로 심양(瀋陽)에 들어갔는데, 그 다음해에는 귀국하여 모후(母后)의 대상제(大祥祭)를 행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경진년 봄에야 비로소 청을 얻어 귀국하여 부왕을 뵈었고, 갑신년 봄에 다시 귀국하여 부왕을 뵈었으나, 모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갑신년 가을에는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는데, 청나라가 이미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하고는 즉시 세자에게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니, 세자가 빈어(嬪御) 및 여러 공경(公卿)과 질자(質子)와 함께 대거 귀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는 종묘에 그 사유를 고하고 죄인들의 사면령을 반포하였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세자는 타국에 오랫동안 억류되어 있는 동안 자주 군대를 따라 동쪽으로 가 삭황(朔荒)에서 사냥을 하고 서쪽으로 연새(燕塞)를 왕래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위험한 고생을 두루 겪었으므로, 비록 신기(神氣)는 태연자약하였으나, 속으로는 노고로 인해 손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환궁한 이후로 계속해서 한열(寒熱)의 증세가 있었는데, 의술(醫術)을 잘못 시행하여 끝내 별세하기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 세자의 향년은 34세다. 빈궁이 3남 3녀를 키웠는데, 원손 모(某)는 지금 사부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학식과 도량이 영명하고 의연하였다. 어린 나이로 군사들을 안무(按撫)할 적에 이미 스스로 영지(令旨)133) 를 내려 지휘하되, 일체 대조(大朝)134) 의 명계(命戒)를 준행해서 자신에게 진공되는 물품을 절감하고, 시종(侍從)들을 엄격히 경계하여 오로지 폐단을 줄여 백성들을 여유 있게 해주기를 힘썼으며, 주현(州縣)에 거듭 명령을 내려 농사철을 놓치지 말고 제때에 농사짓도록 하였다.
세자는 또 길을 가다가 진창길에 깔아놓은 볏짚을 보고 명령하기를 ‘군사를 일으킬 때에 이것으로 말을 먹일 것이니, 절대로 헤프게 쓰지 말라.’ 하였다. 또 주방에는 쇠고기를 금하고, 수락(酥酪)135) 도 진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농우(農牛)를 잡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시종하는 신하가 세자께 가교(駕轎)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중도에서 다시 청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오늘 내일이 바로 대가(大駕)가 도성을 떠나시는 날인데, 어찌 감히 가교를 타고 앉았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호남·호서 지방의 수신(帥臣)들이 세 고을의 군사 수천 명을 나누어 보내서 세자의 호위에 대비하자, 세자가 이르기를 ‘나는 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군사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속히 도성으로 들여 보내서 구원해야 한다.’ 하였다. 전주(全州)에 진영을 설치하고 머무를 때에 서쪽의 경보(警報)가 또 위급함을 알려오자, 대신이 영해(嶺海)로 옮겨갈 것을 의논하였으나, 세자는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호남 지방이 소요가 일 뻔하다가 다시 진정되었다. 그리하여 세자가 그곳을 철수하여 돌아오던 날에 호남 지방 백성들의 부로(父老)와 남녀(男女)들이 연도에 나와 송축(頌祝)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세자를 칭도하고 있다.
상께서 처음 남한 산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 뭇 신하들이 정묘년의 고사(故事)와 같이 속히 세자를 다른 지방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자, 세자가 슬피 통곡하며 위난(危難)를 피해 부왕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윽고 청나라 장수가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아 보내라고 협박하자, 온 성중(城中)이 몹시 경악하였고 삼사(三司)는 ‘결코 그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극력 쟁론하였으며 상께서도 그들의 말을 차마 따르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臣)이 그곳에 가는 것을 어찌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이윽고 심양으로 잡혀 갈 적에 봉림 대군도 함께 갔는데, 형제가 같은 관소(館所)에 거처 하면서 서로 화락함이 날로 돈독하였으므로, 여러 종자(從者)들 사이에 전혀 이간시키는 말이 없었다.
영주(寧州)·금주(錦州)의 전쟁 때에는 세자가 청나라로부터 종군(從軍)하라는 협박을 받았는데, 세자가 때마침 사소한 질병이 있으므로 시종하는 신하가 주선하여 봉림 대군으로 대신하였다. 재차 종군할 때에는 세자가 대군 혼자서 수고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다른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굳이 자신이 갈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 군문(軍門)에서 그만두게 하여 중지하였다.
이때 청나라와의 화친(和親)이 막 이루어지고 나서 불화의 단서가 되는 일이 많았고, 타국과 이중으로 통역(通譯)을 하는 가운데 교묘한 참소가 복잡다단하였으나, 세자는 양쪽 사이에 처해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아서 어려움에 처하기를 마치 평탄한 데 처하듯이 하였고, 그들을 접응해서 임기 응변으로 이리저리 꾸며대되, 전혀 실언(失言)한 것이 없었으므로, 제왕(諸王)들과 뭇 장수들이 오래 갈수록 더욱 좋아하게 됨으로써 끝내 세자에게 감히 무례하게 굴지 못하였다.
세자는 허심탄회하게 사람을 대하고 겉치레하는 것을 끊어버렸으며 세자궁의 신료들을 한결같이 온화하고 친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래서 질병이나 곤액을 당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돌보아 구제해 주고야 말았다.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관소에 있으면서 화환을 일으킨 것이 불측하게 되었으므로 세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신구(伸救)하였으나 끝내 어쩔 수 없게 되자,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결별하니, 애통해 하는 것이 좌우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정뇌경이 처형되고 나서는 그의 염습(斂襲) 도구들을 모두 스스로 관소 안에서 준비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감동하여 사기가 솟구쳤다.
세자는 항상 사부를 존경하였고, 사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거애(擧哀)하여 친히 조위하였으며, 이미 관직에서 물러났을지라도 특별히 옛날의 은혜를 생각하여 자신의 뜻으로 결단해서 시행하였으니, 이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상께서 정신(廷臣)들의 의견을 통하여 ‘덕을 밝혀 노고가 있었고 행실이 중외에 드러났다.[明德有勞 行見中外]’는 의논을 취해서 시호를 ‘소현(昭顯)’이라 내렸으니, 아, 지극하다. 신이 삼가 이목으로 듣고 본 것 가운데서 큰 일만을 기록한 것이 이상과 같다. 기타 춘방(春坊)136) 에서 기록한 예의(禮儀)의 절차와, 사령(辭令)의 글[文]과, 서연(書筵)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문의한 것과, 심양 관소에서의 행동거지 등에 관한 것들은 덕행의 근본에 관계된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다 드러내지 못한다. 삼가 지(誌)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대제학 이식(李植)이 지은 글이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2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27]을유년 : 1645 인조 23년.
- [註 128]
임자년 : 1612 광해군 4년.- [註 129]
을축년 : 1625 인조 3년.- [註 130]
원복(元服) : 남자가 성년(成年)이 되어 착용하는 의관(衣冠).- [註 131]
갑술년 : 1634 인조 12년.- [註 132]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33]
영지(令旨) : 왕세자의 명령서.- [註 134]
○誌文曰:
上之十五年, 有南漢之厄, 王世子入質于淸國, 越九年乙酉二月, 始獲返國。 越四月戊寅, 王世子有疾遽劇, 卒于昌慶宮之歡慶殿。 上在違豫中, 親莅喪制。 嗚呼! 天運之戾, 一至於斯, 上下之慟, 寧有旣乎? 擇卜越六月十五日丙寅, 梓室發引, 十九日庚午, 葬于孝陵右洞坐乙向辛之原, 命臣植爲之誌。 臣謹按, 世子諱 , 萬曆壬子正月四日己亥, 誕生于會賢坊之潛宮, 幼而岐嶷穎異。 上之登寶位也, 首選耆儒五臣, 敎訓備至。 乙丑正月, 禮加元服, 策命爲王世子。 丁卯之變, 車駕將幸江都, 先命世子分朝, 鎭撫南服, 大臣李元翼、申欽等輔之。 行駐全州, 開撫軍司月餘, 兵罷入覲江都, 扈從還京。 是年十月, 行入學禮, 十二月, 聘參議姜碩期女封嬪, 親迎如禮。 甲戌正月, 皇朝因奏請, 頒降策封誥命, 竝賜冕服、綵段, 太監盧維寧來宣, 世子迎送享禮如儀。 乙亥冬, 仁烈王后昇遐, 秉禮宅憂, 猝値丙子之變, 從幸山城。 丁丑二月, 西行入瀋, 明年請歸國, 行大祥祭而不得。 庚辰春, 始得請歸覲, 甲申春復歸覲, 皆不得久留。 是秋轉入燕京, 淸國已定河北, 卽促世子輟還, 與嬪御及諸公卿、質子大歸。 上告廟頒赦, 國人相慶。 世子久留異域, 數從軍旅, 東獵朔荒, 西穿燕塞, 跋履山川, 備經危險, 雖神氣自若, 而內受勞傷。 還宮以後, 連有寒熱之感, 醫方錯誤, 竟至弗祿。 嗚呼痛哉! 世子壽三十四。 嬪宮擧三男三女, 元孫某方就傅受學, 餘竝幼。 世子資性孝友, 識度英毅。 沖年撫軍, 已自令旨指揮, 一遵大朝命戒, 節損供御, 嚴飭陪從, 專務省弊裕民, 申令州縣, 毋失東作。 路見藁草覆濘, 令曰: "此以飼馬軍興之時, 切勿屑用。" 又廚禁牛肉, 酥酪亦不許供, 戒以勿殺耕牛。 從臣請乘駕轎, 不許, 中道復請, 則曰: "今明日, 乃大駕去邠日也。 安敢坐乘?" 終不許。 兩湖帥臣, 分三邑兵數千, 以備護衛, 世子曰: "吾避敵南下, 安用軍衆? 可速入援京師。" 及次全州, 西報又急, 大臣議轉向嶺海, 世子又不肯, 湖南幾擾而復定。 旋駕之日, 南民父老男女, 沿途頌祝, 至今稱之。 上之初駐山城, 群臣請亟出世子如丁卯故事, 世子哭泣不欲違難遠離。 旣而, 淸將脅我以世子爲質, 城中震駭, 三司力爭以爲決不可從, 上亦不忍也。 世子卽自請曰: "苟安社稷而保君父, 則臣何憚行?" 及被拘而西也, 大君偕行, 同館以處, 怡愉日篤, 諸從者一無間言。 寧、錦之役, 見迫從軍, 而世子會有微疾, 從臣圖代以大君。 及當再行, 世子憫大君獨勞, 諉以他故, 而堅請自行, 適以軍門之令止之而止。 時, 和好初定, 事釁多端, 殊方重譯, 讒巧百端, 而世子處於兩間, 不懾不迕, 蹈難如夷, 接應彌縫, 擧無失辭, 諸王、群帥, 久益歡洽, 終不敢加以無禮。 世子坦懷待物, 絶去邊幅, 待遇宮臣, 一以和厚。 諸有疾病困厄者, 必周恤拯濟, 盡力乃已。 文學鄭雷卿在館, 挑禍不測, 世子冒危伸救, 卒不能得, 則握手泣訣, 哀動左右。 襲斂諸具, 皆自內備, 聞者莫不感聳。 常時尊敬師傅, 聞其逝沒, 必擧哀臨弔, 雖已去職, 而特念舊恩, 斷以己意而行之, 此, 前所未有之擧也。 上用廷臣議, 取明德有勞, 行見中外之議, 贈謚曰昭顯, 吁其至矣! 臣謹就耳目所聆覩, 而志其大者如右。 其他如春坊所記, 禮儀之節、辭令之文、書筵講問, 行館擧措, 非係德行之本者, 不能盡著。 謹誌。
大提學李植之辭也。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227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