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북경에 쌀 운반할 일을 논의하다
상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북경에 쌀을 운반할 일이 목전의 큰 폐단이 되어 있는데, 민간의 소란스러움이 어떠하던가?"
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당초에 정한 숫자는 20만 석이나 될 정도로 많았는데, 중사(中使)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그들을 타이른 후에 10만 석을 줄여서 정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운반을 독촉할 때에 어찌 소란스러운 폐단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에 바람세와 날씨가 순조롭지 않아서 제때에 배를 발송하기가 어려울 듯하고 또한 배가 침몰되는 재난도 없지 않을 것이니 더욱 염려된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삼남 지방의 민력(民力)이 이미 다하였으니, 경창(京倉)에 만일 1년 쓸 저축이 있으면 전삼세(田三稅)029) 를 회감(會減)해 주어서 일분의 혜택이나마 베푸는 것이 옳다."
하니, 호조 판서 정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의 장계를 보니, 연해(沿海) 지방의 관곡(官穀)도 이미 다 된 실정인데, 신이 외람되이 이 직임에 있으면서 어찌 안과 밖을 달리 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한 도(道)의 원곡(元穀)이 도리어 평상시의 한 고을만도 못하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하니, 지중추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지금의 민력으로 이런 큰일을 해내자니, 비록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나 되겠습니까. 연해 지방 백성들은 곳곳마다 슬피 통곡하며, 모두 유랑하여 흩어져서 크나큰 마을들이 대부분 텅텅 비기까지에 이른 실정인데, 모두 말하기를 ‘부역(賦役)의 번거로움이 혼조(昏朝)보다 심하다.’ 하니, 대체로 혼조 때에는 법령이 해이했었고 지금은 법령이 번거롭고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상이 기쁘지 않은 기색으로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연해 지방 백성들에게 부역을 양감하라."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정원이 김상헌의 일로 계(啓)를 올렸는데, 도리어 온당치 않은 전교를 내리셨으니, 그것을 보고 들은 모든 사람이 누군들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김상헌이 성 밖에 와서 삼가 상소의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한마디의 타이르는 말씀도 없기 때문에 지금 이미 시골로 물러가 버렸는데, 그가 감히 대궐에 들어와 숙배하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 직명(職名)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직(軍職)은 그에게 있다."
하였다. 승지 조석윤이 아뢰기를,
"지난번 정사 때 그에게 군직을 붙여 주려고 했으나, 외국 사신이 관소에 있었으므로 번거로워서 미처 제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신(朝臣)들도 모두 그에게 직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상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지조가 굳기 때문에 일 처리하는 것이 이러하다. 정리와 예의로 말한다면 한번쯤 대궐에 들어오더라도 안 될 것이 없는데, 노병(老病)을 칭탁한 것은 들어와 사례할 뜻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정리와 예의로 헤아려 본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아뢰기를,
"김상헌은 곧 신의 아비 친구이고 신이 또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예전에는 그를 강직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지목했었으나 1년 동안 그와 함께 거처하면서 자세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니, 인자하고 자상하고 온화하고 성의 있고 동정심이 강하며, 임금 사랑하는 일념(一念)을 자나 깨나 잊지 않고서 비록 갇혀 있을 때에도 항상 신과 함께 늘 세자에게 문안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은 대궐문을 지척에 두고서 어찌 들어와 사례하지 않을 뜻이 있었겠습니까. 10일 동안 서쪽 교외에서 천천히 배회하며 성상의 비답이 내리기만을 기다렸으나 성상의 비답은 내리지 않고 한식(寒食)은 이미 닥쳐왔으므로 곧장 선영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데, 군신의 사이가 비록 부자 사이와 같기는 하나 대처하는 의리는 자연 다르기 때문에 직명이 없는 것을 혐의하여 감히 사은 숙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궐문에 이르지 않고 성 밖에 물러가 있었으니, 내가 어떻게 사람을 보내서 오기를 청할 수 있겠는가. 가령 우리 나라의 죄명(罪名)으로 그곳을 들어갔었다면 나온 뒤에 의당 그렇게 해야겠지만 정리와 예의로 말한다면 군신의 사이에 무슨 혐의할 것이 있어서 숙배를 하지 못한단 말인가. 다만 이 사람은 지금 세속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숙배 여부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이경여에게 이르기를,
"경이 심양을 가게 된 것은 내가 특별히 보낸 데서 비롯된 것인데, 마침내 그곳에 갇혔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미안하게 여겼다."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성상의 비호를 받아 남은 목숨을 보전하여 마침 동궁이 돌아오는 때를 만나서 일시에 동궁을 모시고 돌아왔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조 판서 이식이 아뢰기를,
"이형장을 시켜 허계(許啓)·조한영(曺漢英) 등에 관한 일을 사신 정명수에게 물어본 결과, 그가 ‘이런 사람들은 써도 무방하겠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천천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11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註 029]전삼세(田三稅) : 전지(田地)에 매기는 세 가지 부세. 즉 대동(大同)과 전세(田稅)와 호포(戶布)를 가리킨다.
○上引見備局堂上曰: "運米之役, 爲目前巨弊, 民間之騷屑如何?" 領議政金瑬曰: "當初所定, 多至二十萬石, 而中使奉聖旨開諭後, 減定十萬石, 亦可謂幸矣, 而督運之際, 豈無騷屑之弊?" 上曰: "近來風日不順, 似難趁卽發舡, 亦不無渰沒之患, 尤可慮也。" 上又曰: "三南民力已盡, 京倉若有一年之儲, 會減田三稅, 以爲一分之惠可也。" 戶曹判書鄭太和曰: "以忠淸監司狀啓觀之, 則沿海官穀已竭矣。 臣忝據此任, 豈可以內外而異視哉?" 上曰: "目今一道元穀, 反不如平時一邑, 豈不寒心哉?" 知中樞府事李景奭曰: "以今民力, 辦此大役, 雖欲無民弊, 得乎? 沿海之民, 處處號哭, 至於流散, 大村皆空, 皆曰賦役之煩, 甚於昏朝。 蓋昏朝則法令解弛, 今日則法令煩苛故也。" 上不悅, 良久曰: "沿海之民, 量減其役。" 金瑬曰: "政院以金尙憲事陳啓, 而反下未安之敎, 凡在瞻聆, 孰不缺望? 尙憲來在城外, 恭竢疏批之下, 終無一言之諭, 故今已退歸田里矣。 其不敢入闕肅拜者, 以無職名也。" 上曰: "軍職則有之矣。" 承旨趙錫胤曰: "頃日之政, 欲付軍職, 而客使在館, 煩未之授。 朝臣皆以無職名知之, 尙憲安得而知之?" 上曰: "其人耿介, 故處事如此。 以情禮言之, 則一番入闕, 未爲不可, 而稱以老病, 無意入謝。 揆諸情禮, 豈容如是?" 領中樞府事李敬輿曰: "尙憲卽臣父執, 臣又最親, 而嘗以剛褊目之。 及與一年同處, 詳觀其爲人, 慈祥溫和, 誠意惻怛, 愛君一念, 耿耿不忘, 雖在囚縶中, 常與臣每問安于世子。 況今咫尺闕門, 豈有不入謝之意乎? 十日西郊, 遲回等待, 聖批不下, 寒食已迫, 乃歸先壠之下矣。 君臣之間, 雖同父子, 所處之義自別, 故嫌其無職名, 不敢肅謝矣。" 上曰: "不到闕門, 退在城外, 予何能送人請來乎? 以我國罪名入去, 則出來之後, 固當如是, 以情禮言之, 則君臣之間, 有何所嫌, 而不爲之肅拜乎? 但此人, 今作物外人, 肅拜與否, 不必更論也。" 上仍謂敬輿曰: "卿之瀋陽之行, 出於予特遣, 而終至囚縶, 心竊未安。" 敬輿曰: "蒙聖上曲護, 得保殘喘, 適値東宮東轅, 一時陪還, 豈不幸哉?" 吏曹判書李植曰: "使李馨長, 問許啓、曺漢英等事于鄭使, 則如此之人, 用之無妨云, 何以處之?" 上曰: "姑徐。"
-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211면
- 【분류】외교-야(野) / 무역(貿易)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