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비국 당상 및 문학 이래를 인견하여 정사를 논의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문학 이래(李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몸이 아파서 오랫동안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여 매우 우울했었다."
"국가가 불행하여 일이 점점 어렵고 걱정스러워져서, 신들이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갓 우려만 더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마부와 말이 부족한 폐단에 불과할 뿐이다. 용도를 절제한다면 폐단을 덜 수가 있을 것인데, 한갓 우려만 하고 절약해서 쓰는 방도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비록 세자의 삭선(朔膳)으로 말하더라도, 전번에 20바리를 보내고 지금 40바리를 더 보내는 것은 자못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옛말에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점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면과 인정에 얽매여 이와 같이 낭비를 하니, 내가 경들의 뜻을 알 수 없다. 또 향교 유생으로 강서를 면한 사람이 5백 명에 이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 일은 과연 구차하게 되었습니다마는, 형편이 이러하여 이 계책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서봉이 아뢰기를,
"일찍이 만력계미년069) 에도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나랏일을 매우 걱정하여, 처음으로 서얼로 하여금 북도에 양식을 운반해 주게 하고 벼슬길을 터주기로 허락하였는데, 국가가 그것 때문에 힘을 얻게 되었으니, 지금 향교 유생들의 말 바치는 이것을 꼭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도 향교 유생이 강서를 면한 일이 있었는가?"
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그때에 비록 강서를 면하는 규정은 없었으나, 또한 말을 바치고 강서를 면한 일은 있었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식이 아뢰기를,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은 결코 연로한 사람으로 차송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태공(姜太公)과 범증(范增)은 나이 80이 되어서도 종군(從軍)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임광(任絖)은 노쇠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북경에 가는 것을 모면하였고, 한형길(韓亨吉)은 아직 기력이 강장한 나이인데도 병을 핑계하여 뒤로 빠졌다.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승지는 으레 먼동이 틀 무렵에 대루원(待漏院)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조신(朝臣)이 약방(藥房)에서 문안드릴 일로 대궐 아래에 나와 보니, 아침이 밝아진 뒤에야 승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게으른 태도를 여기에 근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승지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문 밖에 있어 아문에 오는 것이 가장 늦으니, 황공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승지들은 모두 연소한 사람들인데,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도승지 이행원(李行遠)을 추고하여, 승지들을 검속하고 신칙하지 못한 잘못을 책망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사사로운 인정이 크게 행해지고 기강이 쇠퇴하여 문란하기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시험삼아 비국의 일로 말하자면, 당상은 비록 연소한 사람일지라도 병을 핑계하여, 와서 참여하려 하지 않는데, 이식 같은 사람도 근무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부터 위중한 병이 있고 또 재능도 없는데, 외람되이 헛된 명성을 훔쳐서 분에 넘치게 문형(文衡)의 자리를 맡고 또 비국의 직임까지 겸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록을 찬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홀로 감당하고 있고, 모든 당상이나 낭청이 한 사람도 와서 참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신이 실록 찬수하는 곳에만 계속 매달려 있고 비국에는 출사할 겨를이 없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이곳 총재(摠裁)의 직임을 외람되이 맡고 있지만, 종전 실록을 찬수할 때에는 으레 도청과 낭청이 있어 날마다 교대해서 나오므로, 그들에게 베껴 쓰는 일로써 과정(課程)을 주어 독책하였기 때문에 일의 단서를 이루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최명길(崔鳴吉)이 옛날 한퇴지(韓退之)070) 가 《순종실록(順宗實錄)》을 혼자서 찬수했던 고사를 끌어대어 이식으로 하여금 찬수의 일을 오로지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퇴지의 경우는 당시의 사관(史官)이었으니, 오히려 혼자 할 수가 있었지만, 이식은 결코 혼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은 의당 사관이 될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잘 골라 뽑아서 그들에게 각기 일을 분담시켜 주어, 그 맡은 과정을 일시에 완료하도록 독책한다면 일을 완성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고, 이식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10년간의 사실을 베껴 놓았는데, 그것은 사관이 30년 동안 기록한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는 망하더라도 역사는 망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역사를 찬수하는 일은 진실로 한 사람이 혼자 할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난세를 당하여 어떤 시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우선 찬수하게 하여 둘 다 보존시켜서 후일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대제학에게는 비국의 직임으로 책망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그에게 실록 찬수하는 일을 모조리 위임시켜서 독려하여 이루기를 책임 지우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이명한(李明漢)·이경석(李景奭)에게는 아주 높은 직임은 비록 맡길 수 없지만, 춘추관 당상의 직임은 의당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 두 사람은 또한 사관의 일을 맡길 만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조와 병조에서 인재를 주의(注擬)할 때에 각 인명(人名) 아래 그의 공로를 모두 기록하는데, 혹은 한 사람이 상을 거듭 받는 경우가 있고 혹은 한 번도 은전을 입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매우 고르지 못하다."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 때 신은 외방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일을 몰랐습니다. 그 후 정원에 와서 병자·정축년의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니, 오달제(吳達濟) 등을 북으로 보낼 때에 성상의 교지에서 진정으로 그를 측은하게 여기시어 심지어는 ‘너희들의 처자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집(尹集)의 조모는 나이 90에 가깝고, 달제의 어미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모두 집이 빈한하고 자질(子姪)들이 고단하여 봉양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일 지난날 하교하신 뜻에 따라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또 그들의 제질(弟姪)들을 벼슬자리에 채용한다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 모두 매우 감격할 것이요, 또한 국가에서 충신을 포상하여 장려하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매월 봉록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을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는가? 물어서 처리하라. 벼슬자리에 채용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조금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의 노모가 살았는지의 여부를 비록 알 수 없으나, 의당 또한 오달제·윤집과 똑같은 예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에 대해서도 하교가 있었다."
하고, 상이 문학 이래에게 묻기를,
"세자가 어떻게 지탱하여 보존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세자가 지난번 북경에서 돌아왔을 때는 감기가 심하게 들었었는데, 지금은 쾌차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국(上國)이 어찌하여 유적(流賊)을 방비하지 못하고 끝내 패망하기에 이르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중원은 환관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고 사졸들이 반심(叛心)을 품음으로써 드디어 적의 돌격을 받아 끝내 멸망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북경 가까운 곳에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적이 산서(山西) 태원부(太原府)와 하남(河南)·하북(河北) 지방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가 또한 모두 험준해서 명령이 천하에 통하지 않은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절한 사람은 얼마나 된다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순절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쪽 사람은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부 상서(兵部尙書)가 내통했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상도 와서 항복한 자가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역관(譯官)의 말을 들으니, 병부와 예부의 관원 가운데 혹 아문에 명함을 바치고 와서 뵌 사람이 있었다고 하나, 또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략 듣건대, 식견 있는 사대부들은 이미 먼저 멀리 피해버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환관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궐 안에 있는 자가 1만여 명이고, 각기 직사를 나누어 맡은 자가 8천 명이며, 민간에 있으면서 대궐에 출입하는 자는 몇 만 명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탄 궁실(宮室)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황극(皇極)·문연(文淵) 두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무영전(武英殿) 하나만이 우뚝하게 남아 있으므로, 구왕(九王)이 방금 무영전에 있으면서 군졸들을 죽 늘어세워서 군문(軍門)으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수산(萬壽山)은 높이가 얼마나 되고, 이궁(離宮)과 별관(別館)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만수산은 대궐 뒷동산 쪽에 있는데, 그리 높지 않고, 산 앞에 있는 별관 5∼6군데는 다행히 불이 번지지 않아 타지 않았으며, 관청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에서 맞아 싸웠던 적은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평야에 진을 친 것이 수십 리를 뻗쳤는데, 북경에 가서 들어보니, 맞아 싸웠던 적의 숫자가 기병(騎兵)이 10만, 보졸(步卒)이 20만이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병과 호병(胡兵)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보기에는 호병이 유적보다 갑절이나 된 듯하였는데, 청나라 사람도 ‘전후에 걸쳐 군대를 일으킨 것이 오늘날처럼 대규모인 적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이 병부 상서를 사로잡았다고 하는데 누구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병부 상서 상시필(尙時弼) 등 12명을 사로잡아서, 군대를 주둔시킨 지 한나절 만에 군문 앞에서 그를 효수하였는데, 그가 바로 명나라 조정의 상서로서 유적과 내통했던 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에 들어간 후 구왕(九王)의 일 처리하는 것이 큰일을 성취할 만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얕은 소견으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과연 사리에 합당한지는 비록 모르겠으나, 대체로 결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을 비록 결단한다 하더라도 만일 사리에 합당치 않다면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산해관에 막 들어갔을 적에는 살상과 약탈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중원의 인사들이 모두 기뻐하며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머리를 깎게 하는 조치가 있자,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여 혹 우리쪽 사람을 만나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무슨 죄가 있기에 유독 이렇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가.’ 하였으니, 이런 일은 비록 결단한 듯하기는 하나, 인심을 수습하는 방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올 때에 성중(城中)의 인심이 이미 진정되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병란과 화재를 연이어 겪은데다 또 큰 가뭄을 만나, 원근에 있는 전답이 모조리 병마(兵馬)에 짓밟혀서 성 밑의 수백 리 들판에 푸른 풀포기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중 사람들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며, 사람을 죽이고 물품을 약탈하는 우환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창고의 저축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축적해 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유적들이 모조리 다 가져가 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여러 해 된 케케묵은 쌀뿐이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말에게 먹이기도 하고, 혹은 자신들이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胡)의 풍속은 고기와 우유로 주린 배를 채우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겨우 두어 숟가락만 먹으면 며칠씩 복통을 앓곤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팔왕(八王)은 북경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
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팔왕이 구왕에게 말하기를 ‘맨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을 살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이 요동 백성들에게 많이 살해되었으니, 지금은 의당 이 군대의 위세를 타서 크게 살육을 자행한 다음, 제왕(諸王)들을 유치시켜서 연도(燕都)를 진정시키고, 대군(大軍)은 심양을 다시 가서 지키기도 하고, 혹 물러가서 산해관을 보호하기도 해야만이 후환을 없앨 수 있다.’ 하니, 구왕이 말하기를 ‘선 황제(先皇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북경을 얻으면 즉시 도읍을 옮겨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여기를 버리고 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하여, 두 왕의 논의가 서로 맞지 않아서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경으로 이사한 청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가속을 거느리고 이사하는 자가 계속되고 있는데, 봉황성(鳳凰城)의 호인(胡人)과 함께 옮기고는 있으나, 사람들이 모두 고향 떠나기를 싫어하고, 또 심양에 곡식들이 여물었으므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군대가 연경에 들어간 후로 어찌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잡지 않았는가?"
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북경에서 보정부(保定府)까지의 거리는 모두 7일이 걸리는 노정인데, 팔왕(八王)이 매우 급히 달려 3일 만에 겨우 보정부에 당도하긴 하였으나,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더 멀리 쫓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 사람들은 대명(大明)이 멸망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영락 황제(永樂皇帝)071) 의 후손으로 태원 군왕(太原郡王)에 세습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청나라 군대에게 붙잡혀 도성으로 들어가자, 부로(父老)들이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이래가 아뢰기를,
"신이 심양에서 나올 때에 역관 정명수가 세자를 찾아뵙고, 전일에 보낸 쌀이 많지 않다는 것을 또 말했습니다. 그러자 세자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쌀의 분량을 세공(歲貢)의 숫자와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 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어찌 꼭 그와 같이 많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명수가 나가자, 세자가 신에게 이르기를 ‘겨울이 되기 전에 먼저 5천 석을 보내고, 봄에 또 5천 석을 보내서 반드시 1만 석의 숫자를 채워야만 그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이 뜻으로 본국 조정에 아뢰어 알려드려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평안도 지역을 지나오면서 농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북경에서의 응접(應接)하는 모든 일에 소요되는 것을 다 충당하자면, 지탱할 도리가 만무하여,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반드시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만이 국사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걱정을 면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91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재정-국용(國用) / 외교-야(野) / 외교-명(明) / 교통-마정(馬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군사-군역(軍役)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탄핵(彈劾)
- [註 069]계미년 : 1583 선조 16년.
- [註 070]
한퇴지(韓退之) : 퇴지는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자.- [註 071]
영락 황제(永樂皇帝) : 명 성조(明成祖)를 가리킴. 영락은 그의 연호.○上引見大臣、備局堂上及文學李䅘。 上曰: "予有疾, 久不見大臣, 深用鬱鬱耳。" 領議政金瑬、左議政洪瑞鳳對曰: "國家不幸, 事漸艱虞, 臣等晝夜思量, 徒益憂慮耳。" 上曰: "目今難堪之事, 不過夫、馬之弊而已。 用之有節, 則可以省弊, 而徒費憂慮, 不知節用之方可乎? 雖以世子朔膳言之, 前送二十駄, 今加四十駄, 殊未妥當。 古語云: ‘節用而愛民。’ 治國之大要, 不外於此, 而拘於顔情, 濫費如此, 予未曉諸卿之意也。 且免講校生, 至於五百, 則無乃濫觴乎?" 瑬曰: "此擧果涉苟且, 而事勢如此, 不得不出此計也。" 瑞鳳曰: "曾在萬曆癸未, 先正臣李珥深以國事爲憂, 始令庶孽運糧北道, 許通仕路, 國家賴以得力。 今此校生之納馬, 不必持難也。" 上曰: "其時亦有校生免講之事乎?" 瑞鳳曰: "其時雖無免講之規, 而亦有納馬免講之擧矣。" 禮曹判書李植曰: "陪衛之人, 決難以年老者差送矣。" 上曰: "太公、范增, 年八十而亦從軍矣。 今日則國綱解弛, 任絖不至衰老, 而謀免北行; 韓亨吉年紀尙强, 而託疾落後。 人心至此, 良可寒心。" 瑬曰: 承旨例於昧爽, 進詣待漏院, 而今朝臣以藥房問安, 來詣闕下, 則天明之後承旨始至。 怠慢之習, 據此可知矣。" 承旨趙錫胤曰: "臣家在門外, 故趨衙最後, 不勝惶恐。" 上曰: "今日承旨, 皆年少之人, 而乃敢如是耶?" 瑬曰: "請都承旨李行遠推考, 以責其不能檢飭之失。" 從之。 瑬曰: "私情之大行, 紀綱之頹廢, 未有甚於今日。 試以備局之事言之, 堂上雖年少之人, 稱病不肯來參, 至如李植, 亦不勤仕矣。" 植曰: "臣素抱重病, 又無才能, 而叨竊虛名, 濫典文衡, 又兼備局之任。 至於纂修之事, 臣獨當之, 而諸堂上、郞廳, 一不來參, 此所以臣之長在纂修之所, 而未遑於備局之仕也。" 瑬曰: "臣參此摠裁之任, 而從前修史之時, 例有都廳、郞廳, 逐日分進, 程督繕寫, 故事易就緖。 今者崔鳴吉援引韓退之獨修《順宗實錄》之故事, 使植專任纂修。 退之則當時史官, 猶可獨爲也, 植則決不可獨任也。" 上曰: "然則何以爲之乎?" 瑬曰: "今宜妙選史才分房, 各授一時程督, 事可易完。" 植曰: "臣已草十年事實, 而猶勝於史官三十年所錄矣。" 瑬曰: "古語云: ‘國亡, 史不可亡。’ 史事固非一人所可獨爲也。" 上曰: 當此亂世, 不可待時, 姑令纂修而兩存之, 以待後日公論可也。 大提學則不可責以備局之任, 自今以後, 悉委纂修之事, 程督責成宜矣。" 瑬曰: "李明漢、李景奭, 雖不得任以顯秩, 至於春秋館堂上, 則宜可爲也。" 上曰: "卿言是也。 此兩人, 亦可任以史事也。" 上又曰: "兩銓注擬之際, 各人名下, 皆錄其功勞, 而或有以一人, 而疊受其賞者, 或有一未霑恩者, 其不均甚矣。" 錫胤曰: "丙子之亂, 臣在外方, 未知當時之事, 而及到政院, 考見丙子、丁丑《日記》, 則吳達濟等北送時, 聖旨懇惻, 至有爾等妻子護恤之敎。 今者尹集之祖母, 年近九十; 達濟之母, 年過七十, 而家業貧寒, 子姪零丁, 不能奉養云, 誠可矜也。 若循前日下敎之意, 優給食物, 且錄用其弟姪, 則感極幽明, 而亦合於國家褒奬之道矣。" 上曰: "曾已命給月俸矣。 今則閣而不行耶? 問而處之。 錄用一款則姑徐。" 錫胤曰: "洪翼漢老母之存沒, 雖未知之, 宜亦一體施行。" 上曰: "當初亦有下敎矣。" 上問文學李䅘曰: "世子何以支保耶?" 對曰: "世子頃自北京還, 重感風寒, 今則快差矣。" 上曰: "上國何以不備流賊, 終至敗亡耶?" 對曰: "中原宦寺弄權, 士卒離心, 遂致伊賊隳突, 終乃滅亡云。" 上曰: "賊在近畿耶?" 對曰: "流賊留屯山西 太原府、河南、河北, 亦皆阻絶, 命令之不通於天下, 已累歲云。" 上曰: "死節者幾何云耶?" 對曰: "雖有死節者, 而我人留屯於一隅, 何以得知之?" 上曰: "兵部尙書內應之說信否?" 對曰: "然矣。" 上曰: "卿相亦有來降者耶?" 對曰: "臣聞譯官之言, 有兵部、禮部之官, 或授刺於衙門而來謁云, 亦未知其眞的。 旣聞有識士大夫, 先已遠避云。" 上曰: "宦官幾何?" 對曰: "在闕內者萬餘人, 分掌職事者八千人, 而其在於街巷之間, 出入闕內者, 不知其幾萬人云。" 上曰: "宮室之燒燼者幾何?" 對曰: "皇極、文淵兩殿, 竝皆灰燼, 唯武英一殿, 巋然獨存, 故九王方在武英, 列立軍卒, 作爲軍門矣。" 上曰: "萬壽山其高幾許, 而離宮、別館, 亦無餘存耶?" 對曰: "山在後苑, 而不甚高大, 山前別館五六處, 幸免延燒, 如公廨則尙多餘存者矣。" 上曰: "山海關迎戰之賊, 其數幾何?" 對曰: "結陣於平野, 連亘數十里, 及到北京聞之, 則迎戰之賊, 騎兵十萬, 步卒二十萬云。" 上曰: "賊兵與胡兵孰多?" 對曰: "以臣所見,胡兵似倍於流賊, 淸人亦言: ‘前後興師, 未有如今日之大擧。’ 云。" 上曰: "淸人擒兵部尙書云, 何許人耶?" 對曰: "擒兵部尙書尙時弼等十二人, 駐軍半日, 梟首軍前, 此乃明朝之尙書, 而爲流賊內應者也。" 上曰: "入關之後, 九王措劃, 可以成大事耶?" 對曰: "以臣淺見, 何以知之? 雖未知其果合於事理, 而蓋多夬斷之事矣。" 上曰: "事雖夬斷, 若不合理, 則何足取也?" 對曰: "入關之初, 嚴禁殺掠, 故中原人士無不悅服。 及有剃頭之擧, 民皆憤怒, 或見我人, 泣而言曰: ‘我以何罪, 獨爲此剃頭乎?’ 如此等事, 雖似夬斷, 非收拾人心之道也。" 上曰: "爾等出來之時, 城中人心, 其已鎭定耶?" 對曰: "連經兵火, 又値大旱, 遠近田疇, 盡爲兵馬所蹂躪, 城底數百里, 野無靑草。 城中之人, 相聚爲盜, 多有殺越奪掠之患云。" 上曰: "倉儲幾何?" 對曰: "明朝畜積甚富, 而盡爲流賊所取, 餘存者皆積年陳腐之米而已, 淸人或飼其馬, 或自食之。 而胡俗多以肉、酪充飢, 我國之人則纔喫數匙, 輒腹痛數三日矣。" 上曰: "八王則不欲留北京云, 然耶?" 䅘曰: "八王言於九王曰: ‘初得遼東, 不行殺戮, 故淸人多爲遼民所殺, 今宜乘此兵威, 大肆屠戮, 留置諸王, 以鎭燕都, 而大兵則或還守瀋陽, 或退保山海, 可無後患。’ 九王以爲: ‘先皇帝嘗言: 「若得北京, 當卽徙都, 以圖進取。」 況今人心未定, 不可棄而東還。’ 兩王論議不合, 因有嫌隙云。" 上曰: "淸人之搬移北京者幾何耶?" 䅘曰: "率其家屬搬移者相續, 而竝與鳳凰城 胡人而遷之, 人皆安土重遷, 且瀋中禾稼頗登, 故多有怨苦者云。" 上曰: "淸兵入燕之後, 何不追擒賊酋云耶?" 䅘曰: "自北京至保定府, 凡七日程, 八王疾馳三日, 纔及於保定, 馬困人疲, 不能遠逐云。" 上曰: "中原之人, 以大明之亡爲痛耶?" 對曰: "永樂皇帝之後裔, 有世襲太原郡王者, 被執入都, 父老多有携持而涕泣者云。" 上曰: "三百年宗社, 一朝丘墟, 宜有死節之臣, 而至今無聞, 良可歎也。" 錫胤曰: "如有伏節死義之人, 則雖愚夫愚婦, 必皆稱道, 而寥寥如此, 必是皇帝不辟, 宦寺執政, 禮義掃地, 廉恥頹廢, 士夫之有志節者, 先已去位而然也。" 䅘曰: "臣自瀋出來之時, 鄭譯謁於世子, 且言前日所送之米不多。 世子曰: ‘然則當如歲貢之數耶?’ 命壽言: ‘何必如是之多乎?’ 命壽出, 世子言於臣曰: ‘冬前先送五千石, 春來又送五千石, 必充萬石之數, 可充其慾。 須以此意, 啓知于大朝。’ 云。 臣行過關西, 審其形勢, 則北京接應之役, 萬無支吾之理, 人民皆有渙散之心, 必有別樣區劃, 可免土崩之患矣。" 上默然。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91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 재정-국용(國用) / 외교-야(野) / 외교-명(明) / 교통-마정(馬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군사-군역(軍役)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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