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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5월 23일 경술 3번째기사 1644년 명 숭정(崇禎) 17년

세자가 금군 홍계립을 보내어 자신의 주변 상황을 수서로 치계하다

세자가 금군(禁軍) 홍계립(洪繼立)을 보내어 수서(手書)로 치계하였다.

"구왕(九王) 이하 여러 진영은 유적을 대파시킨 후에 이미 승승장구의 기세를 얻은 데다, 또 오삼계가 미리 전로(前路)의 주현(州縣)에 문서를 돌려서 모두 구왕을 맞아 항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왕의 군대가 무령현(撫寧縣)에 도착하자 그 성중의 백성들이 5리쯤 되는 길을 미리 마중나와 기다렸다가 구왕을 영접하여 성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청하니, 구왕이 그 백성들을 어루만져 효유하고, 또 고시문(告示文) 한 장을 주어 각기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도록 타일렀습니다. 이때 구왕은 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현의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묵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일찍 출발하여 영평(永平)의 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현의 서쪽 아랫길을 향하여 갔으니, 이는 대개 유적이 왔다간 후로 연도에 풀 한 포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아랫길이 조금 멀기는 하지만 풀이 있어 말을 먹이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창려현(昌黎縣)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27일에는 영평부(永平府) 난하(灤河)의 하류인 난주(灤州)의 남쪽에서 묵었고, 28일에는 개평위(開平衛)의 성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도착하였고, 29일에는 옥전현(玉田縣) 앞에 도착하였으며, 30일에는 계주(薊州)의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도착하여 묵었습니다. 5월 1일에는 통주강(通州江)의 얕은 여울을 건너 저녁에 통주의 서쪽으로 20리쯤 되는 지역에 이르러 묵었습니다. 하루 평균 행군이 1백 20∼30리 정도가 됩니다.

지난번 계주에 있을 적에 유적 1백여 인이 와서 항복하며 말하기를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에 그들은 청나라 군대가 쫓아올 줄 알고 황급히 재화(財貨)와 부녀자들을 수탈한 다음, 29일 저녁에 화약을 터뜨려 궁전을 불태우고 성문으로 도망쳐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구왕이 여러 진영의 정예한 군졸들을 뽑아 팔왕(八王)십왕(十王)오삼계 등에게 주어 그들을 급히 추격하도록 하고 구왕도 이틀 길을 하루로 당겨서 급히 전진하였기 때문에, 일행의 짐보따리가 미처 통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臣)은 그런대로 잘 먹고 지냈습니다마는, 시강원 이하는 모두 이틀 동안이나 밥을 굶었습니다.

2일에는 일찍 출발하여 황성(皇城)을 둘러 나갈 적에 구왕이 황제에게서 지난번에 받은 황색 의장(儀仗)을 전도(前導)로 삼고, 가마를 타고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양문(朝陽門)으로부터 들어가 대궐문 근처에 이르니, 금의위(錦衣衛)049) 의 관원이 황제의 황옥교(黃屋轎)와 의장(儀仗)으로 구왕을 맞이하였습니다. 구왕은 황옥교를 타고 의장을 앞길에 배열하고서, 장안문(長安門)으로부터 들어가 무영전(武英殿)에 당도하여서는 황옥교에서 내려 걸상에 올라 앉아, 금과(金瓜)와 옥절(玉節)을 궁전 앞에 나열시켰습니다.

신은 이때 구왕의 참모관과 함께 동서로 나누어 앉아 있었습니다. 환관을 불러 유적의 형세와 황성이 함락된 이유를 물으니, 환관이 대답하기를 ‘유적이 2월 20일경부터 황성을 포위하여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으로 성중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런데 성을 지키던 군졸들은 여러 달 동안 군량을 공급받지 못하여 모두 싸울 마음이 없어져서 밖으로 흩어져 나가 있다가 미처 성을 들어오지도 못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4∼5첩(堞)씩을 지키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자 적이 마침내 성을 타고 넘어오니, 황제와 황후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태자와 황자(皇子)인 세 왕은 그들에게 붙잡혔다. 그후 황성의 백성들이 황제와 황후를 황성에서 1백 리쯤 떨어진 북쪽 진산(鎭山)에 장사지냈다.’ 하였습니다.

적이 이미 성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 원년의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하고서 황제라 자칭한 지 42일 동안에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침탈하는 행위를 금지했었는데, 산해관에서 패배하여 돌아온 이후로 성중의 재물과 보화를 모조리 수탈하여 가지고 가면서 화약으로 궁전과 여러 성문을 불태웠으나, 다만 인명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가자, 황성의 백성들이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마주잡고서 경의를 표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세’를 부르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중의 크고 작은 관원(官員) 및 환관 7천∼8천 명이 또한 모두 명함을 내밀고 와서 배알하였습니다. 궁전이 모두 불탔는데 오직 무영전만이 우뚝하게 홀로 남아 있었고, 내금천(內禁川)·외금천(外禁川)의 옥석교(玉石橋)도 파손된 데 없이 완연하게 그대로 있었습니다. 불타버린 집에서 나온 제비들은 높게 혹은 낮게 하늘을 까맣게 가리어 날으니 ‘봄제비가 숲에 둥우리를 튼다[春燕巢林]’는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구왕무영전 앞 행랑채에 신의 처소를 정해 주었는데, 공간이 비좁고 사람은 많으므로, 구왕에게 말하여 무영전 동쪽 방을 얻고 나니, 전보다는 조금 넓고 또 침상·탁자·병기·의장 등도 있습니다.

구왕이 황성에 들어온 후로는 장수 용골대(龍骨大) 등을 시켜 성문을 관장하게 하여 청나라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을 출입하지 못하도록 엄금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과 신을 따르던 일행의 인마(人馬)들이 모두 성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청나라 사람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인편을 만나, 대단히 바쁘고 황급한 가운데 대충 적어서 치계를 드리니, 황송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49]
    금의위(錦衣衛) : 천자를 호위하고 궁성을 수비하던 군대.

○世子遣禁軍洪繼立, 以手書馳啓曰:

九王以下諸陣, 大破流賊之後, 已得破竹之勢, 而且吳三桂先移文帖于前路州縣, 使皆迎降。 故兵到撫寧縣, 城中之民迎候五里程, 開門請入, 九王撫諭其民, 且給告示一張, 各安其業。 九王不入城內, 而行到縣西十里地下營。 翌日早發, 不由永平大路, 直向縣西下路而行, 蓋以流賊往返之後, 沿路無寸草, 下路雖稍遠, 取便喂馬之故也。 夕到昌黎縣止宿, 二十七日宿永平府 灤河下流灤州之南。 二十八日到開平衛城西十里地, 二十九日到玉田縣前, 三十日到薊州之南二十里地止宿。 五月初一日涉通州江淺灘, 夕至通州西二十里地止宿, 每日之行, 殆一百二三十里。 前在薊州, 流賊百餘人來降言: "山海關見敗之後, 知兵之來追, 蒼黃收掠財貨、婦女, 二十九日夕, 以焇藥燒宮宇城門逃走。" 云。 九王抄諸陣銳兵, 使八王十王吳三桂等急追之, 而九王亦倍道以進, 故一行輜重, 未及通州。 臣蓐食而過, 講院以下皆闕二日之食。 初二日早發而行, 繞出皇城, 九王以皇帝前所受黃儀仗前導, 乘轎鼓吹而行, 入自朝陽門, 至闕門近處, 則錦衣衛官, 以皇帝屋車儀仗迎之。 九王乘黃屋轎, 排儀仗于前路, 入自長安門, 到武英殿下轎陞榻, 以金瓜、玉節, 羅列殿前。 臣與九王幕官, 列坐東西, 招宦官, 問賊中形勢、皇城失守之由, 則曰: "流賊自二月念間, 來圍皇城, 以大砲、火箭, 攻逼城中, 而守城之兵, 以累月不給餉米, 皆無戰心, 散處於外, 未及入城, 以一人守四五堞, 不能抵當, 皆棄城而走。 賊遂梯城以入, 皇帝與皇后自縊, 太子及皇子三王被執。 都民以皇帝皇后之喪, 葬于北鎭山百里地。" 云。 賊旣入城, 國號大順, 改元永昌, 稱皇帝者四十二日, 欲收人心, 禁止侵掠。 及山海關敗歸之後, 盡括城中財寶而去, 以火藥燒殿宇、諸門, 但不害人命。 九王入城, 都民燃香拱手, 至有呼萬歲者。 城中大小人員及宦官七八千人, 亦皆投帖來拜。 宮殿悉皆燒燼, 唯武英殿巋然獨存, 內外禁川玉石橋, 亦宛然無缺。 燒屋之燕, 差池上下, 蔽天而飛, 春燕巢林之說, 信不虛也。 九王處臣于武英殿前廊, 地窄人衆, 告于九王, 得殿東一室, 比前稍寬, 且有床卓、器仗矣。 九王入城之後, 使龍將等管門嚴禁, 淸人及我國人, 毋得出入, 故淸人及臣行人馬, 皆在城外矣。 値淸人之便, 忙遽之中, 草草馳啓, 不勝惶悚云。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