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래가 세자의 행차 중의 일을 치계하다
문학 이래(李䅘)가 치계하였다.
"세자의 일행이 심양을 출발하면서부터 연일 계속 행차하였습니다. 15일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세자를 수행해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습니다. 총병(摠兵) 오삼계(吳三桂)가 구왕(九王)046) 에게 장관(將官) 2명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기를 ‘황성(皇城)이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황제는 스스로 목매어 죽고 후비(后妃) 이하는 모두 분신자살하였다. 그래서 관내(關內)의 여러 성이 모조리 다 함락되었고, 오직 산해관만이 남아 있으나 급하기가 시각을 다투는 형편이니, 귀국(貴國)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기를 약속하고자 한다.’ 하였다고 했습니다. 20일에는 금주성(錦州城) 서쪽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한인(漢人)이 또 와서 급함을 알려왔습니다. 청병(淸兵)이 마침내 급히 달려, 22일 아침에 관문(關門) 가까이에 당도하니, 오삼계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성을 나와 항복서를 바치고, 성문을 열어서 청병을 맞아들였습니다. 이때 한인은 벌써 관내의 수리 쯤에 있는 큰 들판에서 적병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청병이 곧바로 적진을 돌격하여, 쓰러져 죽은 시체가 잠시 동안에 들판을 덮었고, 남은 적은 모두 패하여 도망치자, 다시 이들을 추격하여 해구(海口)에서 모두 죽였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관내의 5리 쯤에 있는 진영으로 돌아왔는데, 23일 아침에는 행군하여 북경(北京)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세자는 항상 구왕(九王)의 진중(陣中)에 있고, 적과 싸울 적에는 또한 진을 나올 수 없습니다. 영병장(領兵將) 박한남(朴翰男)은 금주(錦州)의 군졸 5백 54명을 거느리고 영원위(寧遠衛)에 도착하였는데, 구왕의 명령에 따라 군관 김충수(金忠壽)로 하여금 먼저 포(砲) 잘 쏘는 포수 1백 명을 거느리게 하여, 22일에 이미 산해관에 도착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84면
- 【분류】외교-야(野) / 외교-명(明) / 왕실-종친(宗親)
- [註 046]구왕(九王) : 청 태조(淸太祖)의 제14자(子)인 예충친왕(睿忠親王) 다이곤(多爾袞)의 별칭. 참고로 팔왕(八王)과 십왕(十王)을 소개하면 팔왕은 태조의 제12자인 화석영친왕(和碩英親王) 아제격(阿濟格)의 별칭이고, 십왕은 태조의 제15자인 예통친왕(睿通親王) 다탁(多鐸)의 별칭이다. 앞으로 팔왕과 십왕이 나오면 이 주석을 참고하기 바람. 《청사(淸史)》 권218·9 제왕 열전(諸王列傳).
○文學李䅘馳啓曰: "世子之行, 自發瀋陽, 連日作行, 十五日早發, 隨至山海關。 摠兵吳三桂遣將官二人, 請兵于九王曰: ‘皇城爲流賊所陷, 皇帝自縊, 后妃以下皆自焚。 關內諸城, 盡皆見陷, 惟山海關獨存, 朝暮且急, 約與貴國致討。’ 云。 二十日到錦州城西止宿, 漢人又來告急, 淸兵遂疾馳, 二十二日朝, 進迫關門, 吳將率諸將出城, 納降開門迎入, 則漢人已與賊兵接戰于關內數里許大野中, 淸兵直衝賊陣, 一食之頃, 僵屍蔽野, 賊皆奔北, 追殺于海口。 至夜還陣關內五里許, 二十三日朝, 行軍直向北京云。 世子則常在九王陣中, 交兵之際, 亦不得出陣。 領兵將朴翰男領錦州軍五百五十四人, 到寧遠衛, 以九王之令, 使軍官金忠壽, 先率善放砲手一百人, 二十二日已到山海關矣。"
- 【태백산사고본】 45책 4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84면
- 【분류】외교-야(野) / 외교-명(明)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