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승 이경여 등 오신과 김상헌을 용골대가 심문하다
전 정승 이경여(李敬輿),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전 판서 이명한(李明漢), 전 참판 허계(許啓), 전 정언 신익전(申翊全) 등이 심양에 당도하니 청인(淸人)이 칼을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하고서 동관(東館)에 구금하였다. 조금 후에 정역(鄭譯)이 이들을 몰아 아문(衙門)으로 가니, 용장(龍將)이 가린박씨(加麟博氏) 및 압송해 간 두 박씨(博氏)와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서 오신(五臣)에게 일제히 들어와 기둥 밖에 앉게 하고 차례로 문답한 뒤에 도로 동관에 안치하였다. 용골대와 가린박씨가 세자의 관소에 와서 옆사람을 물리치고 묻기를,
"지금 온 제신(諸臣) 중에 동양위 형제는 국왕의 가까운 친속이라 하는데 세자와는 몇 촌의 친속입니까?"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동양은 선왕(先王)의 부마이고 그의 아우 익전(翊全)도 척리(戚里)입니다. 기타 여러 재상들도 다 국왕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그와 같은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국가를 그르치겠소. 간사한 사람이 기회를 틈타 날조하여 진신을 모해한 것인데 대국(大國)이 만약 중률(重律)을 가한다면 제신(諸臣)들이 원통함을 품을 뿐 아니라 악인의 계획을 이루어 주는 것이 될 것이오."
하자, 용장 등이 잘 알았다 하고 나갔다. 이튿날 용장과 가린 등이 또 와서 세자에게 말하기를,
"국왕이, 오신은 죄가 없고 동양은 가까운 친속이라는 뜻으로 해명한 말이 있고 또 어제 세자께서 여러 가지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오신이 진술한 내용과 함께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은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더라도 어찌 선뜻 실토할 것인가. 참으로 가까운 친속이라면 남조(南朝)를 부식하여 국사를 그르친 것은 친근한 이를 사랑하는 국왕의 거룩한 덕을 저버리는 일이 아닌가. 제신들은 겁이 나서 이계를 모살하여 입을 막아버릴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계가 만약 생존해 있다면 자신들의 무죄를 변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이미 죽여버렸으니 아무리 원통하고 억울하더라도 조사할 근거가 없다. 부마가 한 사람이 아니고 재상도 한 사람이 아닌데 이 오신의 이름을 끄집어냈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신과 김상헌은 남겨두고 그 나머지 인마(人馬)는 내보내라.’ 하셨다."
하였다. 세자가 다시 어제 말한 뜻으로 반복하여 말하였으나 용장 등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갔다. 며칠 뒤에 정역(鄭譯)이 동관(東館)에 와서 아문(衙門)의 뜻으로 김상헌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사신을 지휘하여 함부로 이계를 죽였는가?"
하니,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조금 후에 아문이 또 한거원(韓巨源)에게 김상헌을 부르게 하니 상헌이 즉시 갔는데 섬돌 위에 이르러 다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옆사람에게 부축을 받아 앉고는 비스듬히 누워 발을 뻗었다. 그들은 그래도 꾸짖지 않고 앞으로 와서 묻기를,
"전일에 이미, 상소하여 방자하게 논의한 이유로 잡혀 들어왔으나 늙은 것을 참작하여 죽이지 않고 내보내 용만에다 안치했으니, 마땅히 경계하여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인데 국사를 간여하고 사신을 지휘하였으며, 여러 재상은 상소하여 이계를 죽이지 말라고 청하였는데도 혼자서 주장하여 끝내 죽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이미 결정한 일은 비록 조정에 있는 신하라도 다시 고칠 수 없는데 더구나 죄를 입고 재야에 있는 신하가 어찌 간여할 수 있는가. 사신을 지휘하는 일에 있어서 더욱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 밝히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대체로 국사에 간여하고 사신을 지휘하는 것은 곧 권세 있는 자가 하는 일이니,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사람인가. 다만 이계는 할아버지와 아들·손자 3대가 나라를 저버린 큰 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 논계하여 죄를 줬는데, 이계가 이로 인해 이를 갈고 독을 품어 항상 보복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일이다."
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더 이상 말하지 않으니, 그만 나가게 하였다. 그 이튿날 세자가 재신(宰臣)의 종관(從官) 및 여러 질자(質子)들을 불러 하령(下令)하기를,
"국가가 이와 같은 비상한 변을 만나 명경(名卿) 귀척(貴戚)이 불의의 화를 당하였으므로 상께서 지금 몸을 조섭하고 계시는 가운데 반드시 걱정이 깊으실 것이다. 내가 친히 황제의 앞에 가서 글을 올려 힘껏 구제하여 억울함을 풀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세자가 마침내 제신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처소에 나아가 글을 올리니, 황제가 곧 동양 형제를 풀어주며 말하기를,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가까운 척속이며 세자가 또 와서 하소연하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국왕과 세자의 광채를 내주기 위해서이다. 그 나머지는 세자가 아무리 이와 같이 간청하더라도 섣불리 풀어줄 수 없다."
하였다. 세자가 관소에 돌아오니 용장(龍將) 등 세 사람이 뒤따라 와서 동양 형제를 불러냈다. 그들이 도착하여 앞기둥 아래에 꿇어앉자 용장 등이 일어나 서서 황제의 명을 전유(傳諭)하고 풀어주니, 정역이 칼과 포박을 풀고 황제의 처소를 향해 사배(四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익성과 그 아우 익전은 동쪽으로 돌아왔다. 용장 및 범문정(范文程) 등과 박씨(博氏)를 위시하여 모두 8인이 관소에 와서 동양 형제를 불러 마루에 무릎을 꿇리고 황제의 명을 전유하기를,
"임진년에 구제해준 남조의 은혜는 선왕(先王)의 대에 있었고 병자년에 다시 살려준 우리의 은덕은 금왕(今王)의 때에 있는데, 어찌 오늘날의 은혜를 잊고서 남조를 부식하려고 할 수 있는가. 게다가 부마가 살아서 돌아가는 것도 나의 은혜가 아닌가. 마땅히 이러한 뜻을 알고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
하니, 익성은 마땅히 황제의 명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뜰 아래 내려가 배사(拜謝)하고 나가게 하였다. 이경여(李敬輿)·이명한(李明漢)·허계(許啓)·김상헌(金尙憲)은 그대로 동관(東館)에 구금하고, 최명길(崔鳴吉)·심천민(沈天民)·이지룡(李之龍)은 북관에 구금하였는데, 얼마 후에 지룡과 천민은 하찮은 인물이라서 깊이 문책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관소(館所)에 전유(傳諭)하여 석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49면
- 【분류】외교-야(野)
○乙亥/前政丞李敬輿、東陽尉 申翊聖、前判書李明漢、前參判許啓、前正言申翊全等到瀋陽, 淸人加鎖, 縛手而拘于東館。 小頃, 鄭譯驅到衙門, 則龍將與加麟博氏及押行兩博氏, 分壁而坐, 令五臣, 齊入坐於楹外, 以次問答後, 還置東館。 龍骨大及加麟博氏來世子館所, 辟人問曰: "今來諸臣中, 東陽兄弟, 國王近屬云, 於世子幾寸親耶?" 世子答曰: "東陽乃先王駙馬, 其弟翊全亦戚里也。 其他諸宰, 皆與國王同休戚之人, 安敢作此無益之事, 以誤國家乎? 奸人乘時搆捏, 陷害搢紳, 大國若用重律, 則非但諸臣抱冤, 且售惡人之計也。" 龍將等唯唯而罷。 翌日, 龍將、加麟等又來, 言於世子曰: "國王以五臣之無罪, 東陽之近戚, 有辨釋之語, 且於昨日, 世子有許多說話, 故竝與五臣所供之辭, 奏知於皇帝, 則以爲: ‘此人等雖有所犯, 豈肯吐實乎? 果是近戚, 則扶植南朝, 以誤國事, 無乃負國王親親之盛德乎? 諸臣恐怯, 謀殺李烓, 以爲滅口之計。 烓若生存, 則可以辨明, 而今旣徑殺, 雖或冤抑, 査覈無憑。 駙馬非一人, 宰相非一人, 而拈出此五臣之名, 此非偶然。 五臣及金尙憲留之, 其餘人馬則出送。" 世子更以昨日之意, 反復言之, 龍將等略不動聽而去。 後數日, 鄭譯來東館, 以衙門之意, 問金尙憲曰: "何以指揮使臣, 遽殺李烓乎?" 答曰: "無有。" 俄頃, 衙門又使韓巨源, 招尙憲, 尙憲卽往, 至階上, 稱脚病, 使人扶擁而坐, 側身橫足。 彼人亦不呵責, 前問曰: "前日旣以上疏橫議之, 故被逮入來, 而爲其老貸死, 出置灣上, 則所當懲改, 而干預國事, 指揮使臣, 諸宰上疏, 請勿殺李烓, 而獨自主張, 竟致於死, 何也?" 答曰: "國家已定之事, 雖在朝之臣, 尙不得更改, 況被罪在外之臣, 何得干預乎? 至於指揮使臣, 尤非所可爲, 不待自明而可知。 夫干預國事, 指揮使臣, 乃有權勢者所爲, 我豈是有權勢者哉? 但李烓祖、子、孫三世, 有負國大罪, 我曾爲臺諫, 論啓加罪, 烓以此切齒含毒, 常圖報復, 此乃一國人所共知也。" 仍臥而不復言, 使之出去。 其翌日, 世子招宰臣從官及諸質子, 下令曰: "國家遭此非常之變, 名卿、貴戚, 橫罹不測, 自上方在調攝之中, 必勤憂念。 余欲親往帝前, 呈文力救, 以解冤枉, 未知何如。" 皆以爲然。 世子乃率諸臣, 詣帝所呈文, 則帝卽釋東陽兄弟曰: "非謂無罪, 以國王近戚, 世子來訴, 特爲寬宥, 以爲國王、世子之光彩。 其他則雖世子懇請如此, 不可輕釋。" 世子還館, 龍將等三人追來, 招東陽兄弟。 至則跪于前楹, 龍將等起立傳諭帝命而釋之, 鄭譯去鎖紐, 使之向帝所四拜。 申翊聖與弟翊全東還。 龍將及范文程等博氏凡八人, 來于館所, 招跪于堂中, 傳諭帝命曰: "南朝壬辰拯濟之恩, 在先王之世; 我則丙子再生之德, 在今王之時, 何可忘今日之恩, 而欲扶植南朝乎? 駙馬之生還, 亦非我恩乎? 宜知此意, 歸告國王。" 翊聖答曰: "當如帝命。" 仍令下庭拜謝而出。 李敬輿、李明漢、許啓、金尙憲, 仍拘於東館; 崔鳴吉、沈天民、李之龍, 拘於北館。 未幾, 以之龍、天民草芥幺麽, 不足深責, 諭于館所而釋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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