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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7월 10일 갑신 1번째기사 1641년 명 숭정(崇禎) 14년

광해군이 죽다

광해군(光海君)이 이달 1일 을해(乙亥)에 제주(濟州)에서 위리 안치(圍籬安置)된 가운데 죽었는데 나이 67세였다. 부음을 듣고 상이 사흘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이때에 이시방(李時昉)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즉시 열쇠를 부수고 문을 열고 들어가 예(禮)로 염빈(斂殯)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르다고 하였으나 식자는 옳게 여겼다. 광해교동(喬桐)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이에 이르러 예조가 아뢰기를, 【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참판 심액(沈詻)이다.】

"광해가 번번이 인심을 잃어 천명(天命)이 전하에게 돌아왔는데, 전하께서 광해를 독실히 염려하셨으니 은혜와 예의가 모두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손위(遜位)한 지 거의 20년에 천수(天壽)를 마칠 수 있었으니 전하의 성덕은 옛날에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천하 후세에 전해도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의리상 종사(宗社)를 중히 여기고 신민들의 요청에 쫓긴 나머지 폐출시키는 거사가 있긴 하였으나, 상례(喪禮)에 있어서는 다른 종실과 비교하여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합니다. 상이 한번쯤 내정(內庭)에서 거림(擧臨)하시고 백관도 각 아문에서 변복(變服)하고 모여 곡하는 정도로 한다면 정리나 예의에 있어 유감이 없을 듯한데,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좌의정 신경진이 아뢰기를,

"일단 광해가 천명을 스스로 배반하여 모든 신민들에게 버림을 받은 처지라고 한다면, 의금(衣衾)과 관곽(棺槨)을 구비해 주는 것만으로도 골육에 대한 성상의 사은(私恩)을 다했다고 말하기에 족합니다. 그런데 대내(大內)의 거림과 백관이 상복을 입고 회곡(會哭)하는 등의 절목까지 아뢰다니, 해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강석기가 아뢰기를,

"광해의 상례는 다른 종실에 비해 차이를 두어야 할 듯하다는 말이 소견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광해가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스스로 천명을 끊고 종사와 신민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전하께서 독실하게 친친(親親)의 의리를 생각하여 은혜와 예의를 다 갖추심으로써 마침내 천수(天壽)를 마치게 하였습니다. 상을 당한 소식을 들은 뒤에도 특별히 예관(禮官)과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상(護喪)하게 하셨으니, 성상께서는 광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감없이 대하신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편찮으신 때가 아니라면 골육의 정리로 대내에서 한 번쯤 거림하시는 것이 하나의 도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백관들까지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등의 절목은 대의(大義)의 측면에서 볼 때 경솔히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연산(燕山)의 치상(治喪)에 이미 전규(前規)가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경진의 의논을 옳게 여겼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제주의 상사(喪事)는 강화(江華)와는 다릅니다. 【 문성 부인(文城夫人)이 강화에 있을 때 먼저 죽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초상의 관렴(棺斂) 등의 일은 이미 거행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바다 멀리 떨어진 일이라서 물품이 초라할 것이니, 반드시 성신(誠愼)해야 하는 도리에 흠이라도 있게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만둘 수 없다면 관을 바꾸고 염을 다시 하되, 반드시 발인(發引)하여 올라온 뒤에 여러 관료들이 회동하여 널리 의논해서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초상에 소용되는 것은 일단 내려 보내지 말고 발인에 필요한 물건만 해조로 하여금 먼저 내려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염과 초빈이 끝난 뒤에는 위리(圍籬) 안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관사의 정결한 곳에 출빈(出殯)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전헌(奠獻)하는 제물도 본 고을로 하여금 정결히 갖추어 예법대로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본도의 감사가 그곳에 나아가 모든 일을 검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채유후(蔡𥙿後)를 예조 참의로 삼아 중관(中官)과 함께 제주에 가서 호상하도록 하였다. 상이 7일 동안 소선(素膳)하려 하였는데, 약방과 정원의 여러 신하가 서로 잇따라 진달하여 아뢰기를,

"예관의 청에 따라 조회를 정지시킨 것도 벌써 비례(非禮)에 속하는데, 더구나 옥체가 편찮으신 이때에 법도 밖의 예의를 행하심은 마땅치 않습니다. 조회의 정지 기간이 끝난 뒤에는 즉시 상선(常膳)을 회복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연산의 치상은 왕자(王子)의 예로써 장사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같은 예로써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산소 감역관도 가려서 보내도록 하고, 광해의 삼년상 뒤에 광해문성 부인의 가묘(家廟)와 묘제(墓祭)는 연산의 제례(祭禮)대로 그의 외손이 주관하게 하라."

하였다. 【 연산은 그의 외손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0면
  • 【분류】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甲申/光海君以是月初一日乙亥, 卒于濟州圍內, 年六十七。 訃聞, 上輟朝三日。 時, 李時昉濟州牧使, 卽掊鎖開門, 斂殯以禮, 朝議皆以爲非, 而識者是之。 光海之自喬桐濟州也, 有詩曰:

風吹飛雨過城頭, 瘴氣薰陰百尺樓。 滄海怒濤來薄暮, 碧山愁色帶淸秋。 歸心厭見王孫草, 客夢頻驚帝子洲。 故國存亡消息斷, 烟波江上臥孤舟。

聞者悲之。 至是, 禮曹 【判書李顯英、參判沈詻。】 啓曰: "光海積失人心, 天命歸于殿下, 而殿下之篤念光海, 恩禮備至。 遜位垂二十年, 克終天年, 殿下之聖德, 無愧於古昔。 傳之天下後世, 豈不美哉? 第念, 義重宗社, 迫於臣民之請, 雖有放廢之擧, 其於喪禮, 則視它內宗, 似爲有間。 自上或於內庭, 一次擧臨, 百官亦於各衙門, 變服會哭而止, 則其於情禮, 似無所憾。" 請議大臣。 左議政申景禛議曰: "旣云自絶于天, 而臣民之所共棄, 則衣衾、棺槨之具, 亦足以盡聖上骨肉之私恩。 至於大內擧臨, 百官變服會哭之節, 該曹所啓, 未可知也。" 右議政姜碩期以爲: "光海之喪, 視它內宗, 似爲有間云者, 或不無所見。 但念光海得罪倫紀, 自絶于天, 宗社臣民之所共棄, 而殿下篤念親親之義, 備盡恩禮, 竟使得終天年。 及聞其喪之後, 特遣禮官、中使護喪, 聖上之待光海, 終始無憾矣。 殿下若非違豫之時, 則以骨肉之情, 自內一次擧臨, 容或一道, 至於百官變服等節目, 大義所在, 恐難輕議。 燕山之喪, 已有前規, 宜令禮官, 參商擧行。" 上是景禛議。 禮曹又啓曰: "濟州之喪, 與江華有異。 【文城夫人在江華時先逝故云。】 初喪棺斂等事, 想已擧行, 而第念, 海外之事, 凡具草草, 其於必誠必愼之道, 恐或欠缺。 如不得已改棺易斂, 必待發引上來之後, 多官會同, 廣議爲之。 初喪所用, 姑勿下送, 發引諸具, 令該曹爲先下送。 且斂殯之後, 不可仍在圍籬之中, 出殯於官舍淨潔處, 凡干奠獻之物, 令本官精備, 依禮設行, 本道監司進到海上, 凡事檢飭宜當。" 上從之。 以蔡𥙿後爲禮曹參議, 與中官偕往濟州, 護其喪。 上欲行素膳七日, 藥房及政院諸臣相繼陳啓以爲: "禮官之請以停朝, 已涉非禮, 況當違豫之日, 不宜行法外之禮。 請於過停朝後, 卽復常膳。" 上從之。 禮曹又啓曰: "燕山之喪, 葬以王子。 今亦依此, 一等禮葬何如?" 答曰: "依啓。 山所監役官, 亦令擇送, 光海三年喪後, 光海文城夫人家廟、墓祭, 依燕山祭例, 使其女子主之。" 【燕山以其外孫主祀。】


  • 【태백산사고본】 42책 42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0면
  • 【분류】
    외교-야(野) / 인사-임면(任免)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