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39권, 인조 17년 11월 15일 무진 1번째기사 1639년 명 숭정(崇禎) 12년

청나라 칙사의 일에 대한 원접사 정태화의 치계

원접사(遠接使)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였다.

"칙사가 강을 건너 온 뒤에 그의 임무를 탐문해 보았더니, 전일의 속은(贖銀)을 탕감하는 일과 앞으로 기병(騎兵) 동원을 감면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또 정명수(鄭命壽)가 말하기를 ‘청대죽(靑大竹) 15태(駄)와 홍시(紅柿) 20태와 생리(生梨) 10태를 아울러 봉황성(鳳凰城)까지 수송하라. 그리고 삼전도 비(三田渡碑)의 전면(前面)은 마땅히 몽고(蒙古) 문자로 쓰고 후면은 우리 나라의 비문(碑文)을 새겨야 할 것이니, 칙사가 서울에 들어가기 전까지 먼저 후면을 새겨 놓고 기다려 오래 지체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73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

    ○戊辰/遠接使鄭太和馳啓曰: "勑使渡江後, 探問其所幹, 則前日贖銀蕩滌事及前頭騎兵減除事也。 且鄭命壽言: ‘靑大竹十五駄、紅柿二十駄、生梨十駄, 竝輸送于鳳凰城。 且三田渡碑前面, 當寫蒙書, 後面當刻我國碑文, 須趁勑使入京之前, 先刻後面以待之, 俾無久滯之弊。’ 云。"


    • 【태백산사고본】 39책 39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73면
    • 【분류】
      외교-야(野)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