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예조 판서 조익의 탄핵을 변론한 병조 판서 이시백의 상소문
이에 앞서 전 예조 판서 조익(趙翼)이 탄핵을 당했을 때에,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상소하여 변론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리는 것은 막심한 죄악이니, 보통사람에게 억지로 덮어씌우는 것도 못하는 바인데 더구나 조익에게 씌우겠습니까. 신이 그의 일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 밝히겠습니다.
당초 서울을 떠날 때 강도(江都)로 계획을 정하고 노인은 먼저 들어가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조익의 아비 조영중(趙瑩中)은 나이 80이었으나 또한 호종(扈從)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익이 그의 아들 조진양(趙進陽)으로 하여금 그 아비를 모시고 먼저 들어가게 하였고, 조익은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과 종묘 사직의 신주를 호종하려고 하였습니다. 숙녕전(肅寧殿)을 모시고 가는 것은 예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으로 정하였는데, 예조 관리가 고하기를 ‘참판은 숙녕전을 모시고 먼저 갔으나, 종묘의 신주는 아직까지 모시고 나오지 못했다.’고 하자, 대신들이 놀라서 ‘판서는 빨리 가라.’고 하므로 도착해 보니, 막 모시고 나왔습니다. 조익이 ‘종묘 신주를 모시고 가는데 예관(禮官)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참판을 쫓아 따라가서 물러와 호종(扈從)케 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로(中路)에 이르러 그의 아들을 만났는데 발이 아파 걷지 못하여 그의 늙은 아비와 서로 헤어져 있었습니다. 조익이 달려서 양천(陽川)에 이르러 종묘의 신주가 이미 숙녕전과 한 곳에 모셔진 것을 보고는 즉시 그 아비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또 임금의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으니, 대저 그가 나갈 때에 선발대는 이미 출동했는데 별안간 남문(南門)으로 회가(回駕)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다만 적의 침입이 다소 누그러져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비로소 임금께서 남한 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80세인 늙은 아비를 잃어, 허둥지둥하는 때에 자식의 지극한 심정은 다른 것을 생각치 못하고 다만 그 아비를 찾은 다음 행재소(行在所)에 가려고 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양천(陽川)·김포(金浦)·통진(通津) 등 세 고을 사이에서 분주히 찾아 며칠 후에 비로소 그 아비가 있는 곳을 알았는데, 행재소는 이미 멀리 떨어져 들어가 모실 길이 없었으니, 그 낭패가 어떠하였겠습니까.
강도(江都)는 하늘이 만든 요새지로서 사람들이 모두 피난지(避亂地)로 여기고 있으니, 조익이 그때에 만약 자신만 살기를 도모했다면 어찌 그대로 강도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만 임금이 위급하므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모집하여 적과 싸우려는 계획을 하였습니다. 경기 중군(中軍) 진영의 1천여 군사가 그 진영의 장수를 잃고 중로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군사를 사용하려고 달려가 남양 부사(南陽府使) 윤계(尹棨)를 보고 그와 함께 계획을 정하였습니다. 심지원(沈之源)·김상(金尙)·이시직(李時禝)·윤명은(尹鳴殷) 등도 또한 모두 모였는데, 분부하고 배치할 때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명령을 전달하여 그 군사를 부르자, 이에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어 즉시 곧장 나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위태로운 것을 알았지만 그의 지성을 보고 감히 만류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군대가 갑자기 이르러 윤계는 죽고 모집한 군사는 모두 흩어져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일을 같이한 사람들과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정하였습니다.
아, 그 늙은 아비를 잃었을 때에 어느 곳에서나 죽을 뜻이 있었으니, 정상을 헤아려 보면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성상의 전교에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말하는 자들이 ‘위급한 시기에 전하를 버리고 바다로 도망쳤다.’고 하니 그 너무나 가혹합니다.
조익은 집안이 몹시 가난했습니다. 비록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상경(上卿)에 올랐으나 서울에 두서너 칸의 집도 없어 임시 집을 빌어서 살았고 봉급으로 먹고 살았으며, 피난할 때 집에는 말 한 마리도 없어서 부녀(婦女)들이 걸어갔습니다. 멀리 피난하기 어려운 형편이라서 신에게 부탁하여 남한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겨우 성 밑에 도착하자 적을 만나 도망쳐 바다 섬으로 들어갔고, 조익은 여러 사람들과 분주히 군사를 모집하느라 그 가족과 각각 다른 지역에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돌보았겠습니까. 그런데 말하는 자들이 ‘식량을 모으고 배를 빼앗아 오직 자신만 편하게 지내려는 대책을 장만하였다.’ 하고, 또 그 말을 바꾸어 말하기를 ‘화량 첨사(花梁僉使)의 배를 빼앗고 남양(南陽)에 옮겨 쌓아둔 곡식을 방출했다.’고 하니, 어쩌면 그리 모함이 심합니까. 의병을 일으켰던 일이 실패한 후에 화량의 배로 피난하는 남녀 수만 명을 건네주었고, 강화도로 들어갈 때 타고 간 것은 공무로 인하여 들어가는 배였습니다. 윤계(尹棨)를 장사지낼 때 의논해서 향소(鄕所)로 하여금 약간의 관청 곡식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런 따위의 일로 모함하는 자료를 삼는단 말입니까.
강도(江都)가 함락되던 날에 이르러서는 갑곶(甲串)의 파수(把手) 보는 곳에 나아가 강 언덕에 홀로 서 있었는데, 대포(大砲)가 쏟아지는 곳인데다가 적의 군대는 이미 강을 건넜고 우리의 여러 군사는 모두 흩어졌습니다. 곁에 두 아들이 있다가 울면서 적의 칼날을 피하자고 청하니 그 아들을 꾸짖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자, 두 아들이 급히 껴안고 이행진(李行進)과 함께 떠밀며 절벽을 굴러내려와 물속에 빠졌습니다. 마침 어떤 역사(力士)가 물가에 매어 놓았던 조그마한 배 1척을 끌고 내려와 껴안아 싣고 탈출하였으니, 조익은 실로 죽는 것을 자신의 분수로 여겼는데 다만 죽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 ‘자취를 겨우 성에 비쳤다가 일이 급해지자 먼저 달아났다.’고 말하니, 망극한 말이 이와 같습니다.
전후 사적의 증거가 명백하고 여러 증인이 모두 있으니, 거짓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전하께서 조익을 어찌 임금을 잊고 국가를 저버리며 교묘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으로 보셨겠습니까. 천품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학문이 심오하여 중후한 덕과 지극한 행실은 충분히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데, 미워하는 자에게 모함을 당한 것이 이토록 극심하니, 신은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평생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 만약 혼가(婚家)라는 조그마한 혐의에 구애되어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로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 훌륭한 벗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원컨대 신의 상소를 내려 공경들에게 물어보소서. 신의 말이 만약 거짓이라면 빨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군사-전쟁(戰爭)
○先是, 前禮曹判書趙翼之被論也, 兵曹判書李時白上疏申辨, 其略曰:
忘君負國, 何等罪惡, 勒加凡人, 尙所不忍, 況於趙翼乎? 臣請以所聞於諸人之所目見者, 明之。 當初去邠, 定計江都, 而有老人先往之敎, 翼之父瑩中, 年垂八十, 亦願扈從。 翼令其子進陽, 奉其父先行, 翼則與備局諸臣, 將爲扈行廟社主。 肅寧殿陪行, 則以禮曹參判呂爾徵爲定, 曹吏告: "參判奉肅寧殿先行, 宗廟神主尙未奉出。" 大臣驚駭曰: "判書速往。" 至則纔奉出矣。 翼以爲: "廟主之行, 不可無禮官, 當追及, 參判退而扈從。" 行到中路逢其子, 足痛不能行, 與其老父相失。 翼馳到陽川, 見廟主已奉肅寧殿一處, 仍尋覓其父而不得。 又未聞大駕聲息, 蓋其出去時前隊已動, 倉卒南門回駕, 非意所及, 只謂敵報稍緩而然。 其明日始聞大駕入南漢, 而八十老父失之, 奔播顚倒之際, 人子至情, 不容他計, 只欲求得其父, 而後赴行在。 晝夜呼泣, 奔覓於陽、金、通三邑之間, 數日後, 始聞其父所在, 而行在已隔絶, 無路入衛矣, 其狼狽罔極, 爲如何哉? 江都天塹, 人皆恃之。 以爲避亂之地, 翼於其時, 若爲身謀, 則豈不仍入江都, 而只以君父危急, 奮不顧身, 自分一死, 悲痛涕泣, 爲募兵赴敵之計。 聞京畿中營千餘兵, 失其營將, 屯於中路, 欲用此兵, 馳見南陽府使尹棨, 與之定計。 沈之源、金尙、李時稷、尹鳴殷等, 亦皆來會, 分付布置之際, 都巡察使傳令召其軍, 乃復募兵得數百人, 直欲徑進, 諸人皆知必危, 見其至誠, 不敢止之。 敵兵猝至, 尹棨死焉, 募兵皆散, 更無可爲, 始與同事諸人, 定入江都。 噫! 當其老父相失之時, 自有所在致死之義, 揆之情事, 將何所處? 聖敎所謂, 情有可恕者此也。 言者乃曰: "棄殿下於危急之時, 遵海而逃。" 其亦慘矣。 翼家甚貧, 雖早歲登科, 致身上卿, 京中無數間屋, 僑屋而居, 待祿而食。 奔播之時, 家無匹馬, 婦女徒步, 勢難遠避, 托之於臣, 使入南漢。 纔到城下, 遇敵奔避, 轉入海島, 翼則與諸人, 奔走募兵, 與其家屬, 各處異地, 何暇顧護, 而言者乃曰: "聚糧攘船, 唯自爲安頓之具。" 又變其說曰: "奪花梁僉使之船, 發南陽移儲之穀。" 何其誣也? 義兵事敗之後, 以花梁舡隻, 濟涉避亂士女數萬人, 入江都所乘, 乃因公入去之船也。 尹棨治喪, 議令鄕所, 除用若干官穀, 乃以此等事, 爲搆捏之資乎? 至於江都陷敗之日, 出往甲串把守之處, 獨立江岸大砲雷飛之地, 敵兵已渡, 諸軍散盡。 傍有二子, 泣請避鋒, 顧叱其子, 坐而不動。 二子急抱持, 與李行進, 同推轉下斷岸入水中, 適有力士曳下一小船掛浦邊者, 挾載而得脫, 則翼實以死自分, 而特其身未死耳。 今乃謂之 "迹纔及城, 事急先走。" 言之罔極, 有如是也。 前後事迹, 證左昭然, 諸人具在, 非可誣也。 噫! 殿下視翼, 豈忘君負國, 巧生謀計人歟? 天資醇正, 學問淵深, 厚德至行, 足爲一代師表。 乃爲所忤者擠陷, 至於此極, 臣竊痛焉。 臣以平生知己之友, 若拘婚家小嫌, 終不爲一言, 則是上負殿下, 下負良友也。 願下臣疏, 咨之公卿, 臣言若誣, 亟治臣罪。
疏入, 不報。
仁祖大王實錄卷之三十七
-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