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4월 19일 임자 1번째기사 1638년 명 숭정(崇禎) 11년

의주 부윤 임경업이 진 도독의 문서에 대해 치계하다

의주 부윤 임경업이 치계하기를,

"신이 권칙(權侙)과 역관으로 하여금 가서 도사(都司)를 만나게 하였는데, 도사가 말하기를 ‘진 도독(陳都督)이 지금 석성도에 있다. 이 문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따라 귀국의 향배(向背)가 결정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답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결코 받아 가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황상께서 특별히 파견한 칙사 도소기(道邵起)가 이미 석성도에 이르렀는데, 먼저 나로 하여금 와서 통지하게 한 것이다.’ 하자, 권칙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지성으로 사대하시는 마음이 해와 별처럼 빛나지만, 세자가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어 있어 오랑캐의 공갈이 매우 심하니, 대인께서도 또한 이 정세를 양찰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천조와 귀국은 부자의 의리가 있다. 어찌 자식으로서 아비를 등지는 도리가 있겠는가. 귀국의 임금과 신하가 바닷길로 들어오면 선척과 식량을 대줄 수 있을 것이다.’ 하자, 권칙이 답하기를 ‘천조와 서로 교통하면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와서 충돌할 것인데, 부모의 나라는 멀리 바다 건너 있으니, 어떻게 세력을 믿고 쳐들어 오는 것을 제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도사가 말하기를 ‘천조에서 이미 왜국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올 것이다. 이 오랑캐들을 소탕해 평정한 뒤에 귀국의 임금과 신하들로 하여금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에 칙사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것이 달렸다. 반드시 명확한 회보를 얻은 뒤에라야 들어가겠다. 잠시 오랑캐가 보지 않는 곳에 배를 물려 두고 머물러 기다릴 계책이다.’ 하였습니다. 이어 노주(潞州)의 명주 2단(端)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도독이 부총(副摠)의 충성을 바친 편지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고, 친히 꿇어앉아 언덕 위에 올려놓고서 떠나갔습니다.

한인들의 말은 예로부터 허탄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청나라 사람들이 강 건너 변경에 있으면서 한인들의 배가 왕래하는 것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도 저렇게 하기도 사세상 난처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답장하는 말을 어떻게 쓸 것인지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지금 권칙 등이 문답한 장계를 보건대, 말한 것이 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임경업이 이미 그 문서를 받았으니, 전혀 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경업으로 하여금 은밀히 가서 만나보고 이어 예단을 주면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고 우리의 답답한 사정을 진술하는 한편, 애초에 구원병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연유를 말하여 본국의 사정을 밝히게 한다면 혹 조금은 도독의 마음을 위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청나라사람들이 지금 한창 중국을 침범하기 때문에 도독이 이런 옹졸한 꾀를 내어 뒤를 나꿔채는 계책을 낸 것이다. 내가 헤아려 보건대, 이는 특별히 다른 정상이 없다. 그러나 임경업이 가서 만나보는 것은 혹 무방할 듯하다. 계사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壬子/義州府尹林慶業馳啓曰: "臣使權侙及譯官, 往見都司, 則曰: ‘陳都督方在石城島。 此書之受不受, 而貴國之向背決矣。’ 答曰: ‘非有朝廷命令, 決難受去。’ 都司曰: ‘皇上別遣勑使道爺邵起, 已到石城島, 先使俺來通矣。’ 曰: ‘我王至誠事大之心, 炳如日星, 而世子被拘於虜, 虜之恐嚇滋甚, 大人亦可諒此情勢也。’ 都司曰: ‘天朝之於貴國, 有父子之義。 安有子而背父之理哉? 貴國君臣由海路入來 則船隻、糧資, 可以接濟。’ 答曰: ‘與天朝相通, 則虜必更來衝突, 而父母之國, 遠隔滄溟, 孰能制其憑陵哉?’ 都司曰: ‘天朝已請兵, 不久當來。 蕩平此虜之後, 使貴國君臣, 復還故國。’ 且曰: ‘文書之受不受, 而勑使之來不來係焉。 必得的報然後, 當入去。 姑爲退舡於虜人不見處, 留待爲計。’ 仍出潞州紬二端曰: ‘此則都督謝副摠效忠之書。’ 親自跪置岸上而去。 漢人之言, 自來虛誕, 不可取信。 而目今淸人, 在於越邊, 候望舡來往。 以此以彼, 事勢難便, 請令廟堂, 指授其答通措語。" 備局回啓曰: "今見權侙等問答狀啓, 所言與前無異, 而但林慶業旣受其書, 不可全無所答。 若令慶業密往相見, 仍給禮單, 以致謝意, 因陳悶迫之情, 且言其初不許助兵之由, 以明本國事情, 則或可以小慰都督之心。" 答曰: "淸人今方西犯, 故都督爲此拙謀, 以爲掣後之計。 以予揆之, 此別無他情也。 然林慶業往見, 或似無妨。 依啓辭施行。"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7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