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1638년 명 숭정(崇禎) 11년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張善澂)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贖還)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이유로 그의 노복으로 하여금 격쟁하여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예관으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족의 부녀자가 한둘이 아니니, 조정에서 반드시 십분 참작하여 명백하게 결정한 뒤에야 피차 난처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부부가 된다는 것은 중대한 데 관계되는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사로잡혀 갔던 부녀자에 관한 일에 대해서 지난해 비국의 계사 중에는 옛일을 인용하여 증명하면서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뜻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며, 상께서도 별도의 전교가 계셨습니다. 신풍 부원군 장유는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인데, 장계를 올려 진달한 것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신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선조조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에 전교가 있었는데, 지난해 성상의 전교와 서로 부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항에서 전하는 바로 말한다면, 그때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문관이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쇄환되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 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상이나 조관(朝官)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이 어찌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전에 심양에 갔을 때 출신(出身) 사족으로서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부둥켜 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듯이 하여,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모나 남편으로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장차 차례로 가서 속환할 것입니다.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물정으로 참작해 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이겸의 딸에 관한 일은 별도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다가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자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을 더렵혔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을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한이겸이 상언하여 진달한 것도 또한 어찌 특별히 원통한 정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면
  • 【분류】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풍속-예속(禮俗)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

新豐府院君 張維呈單子於禮曹曰: "有獨子善澂, 而江都之變, 其妻被掠贖還, 方在其父母家, 而不可仍爲伉儷, 同奉先祀, 許令離異改娶。" 前承旨韓履謙以其女被擄贖還, 而其壻將欲改娶, 使其奴擊錚訟冤, 刑曹請令禮官處置。 禮曹啓曰: "士族婦女之被擄而還者, 非止一二, 朝家必須十分斟酌, 明白定奪然後, 可無彼此難處之患, 而人之爲夫婦者, 事係重大, 請議于大臣。" 左議政崔鳴吉獻議曰: "被擄婦女事, 上年備局啓辭中, 引古爲證, 備陳難絶之意, 自上亦別有傳敎。 新豐府院君 張維非不聞知, 而呈狀所陳如此, 亦必自有所見而發也。 臣竊聞諸故老, 宣廟朝壬辰變後有傳敎, 與上年聖敎, 實爲相符云, 而未能詳記其語。 第以閭巷所傳言之, 其時有一宗室, 上疏請離異, 宣廟不許。 有一文官旣已改娶, 及其妻刷還, 宣廟命以後娶者爲妾, 其妻旣死, 始得升爲正室。 此外宰相、朝官, 仍蓄被擄之妻, 生子、生孫, 爲名族者往往有之。 豈不以禮出於情, 隨時異宜, 不可拘於一例故也。 臣前往瀋陽, 出身士族, 爲贖還隨往者甚多, 夫妻相逢, 抱持痛哭, 如見泉下之人, 道路觀者無不悲涕。 且厥父母、厥夫錢財不足者, 將次第往贖, 若有離異之命, 必無願贖之人, 是使許多婦女, 永爲異域之鬼也。 一夫遂願, 百家抱冤, 豈不足以感傷和氣? 臣反覆思量, 參以物情, 終不知離異之爲可。 且韓履謙女子事, 無容別議, 而臣之往瀋陽也, 聞兵回還時, 有一處女, 姿色頗美, 淸人誘脅萬端, 而終不聽, 及至沙河堡, 不食而死, 淸人亦感歎, 爲之埋瘞而去。 臣在瀋陽館時, 亦有一處女, 約價將贖, 而淸人後乃背約, 以求增價, 厥女自知不得還, 引刃自刎而死, 畢竟買其屍以歸。 向使二女者, 幸而前期贖還, 則必不至於自處, 雖有貞潔之操, 誰復知之? 以此推之, 則兵塵驅迫之中, 混被累名, 而不能自白者何限? 被擄婦女, 不可槪論以失身者如此。 韓履謙上言所陳, 亦豈別有冤狀而然歟。" 答曰: "依議。" 然是後, 士夫家子弟皆改娶, 無復合者。

【史臣曰: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此節義之所以有關於人國家, 而棟樑乎宇宙者也。 被擄之女, 雖曰非其本心, 臨變而不能死, 則其可謂之不失其節哉? 旣失其節, 則與夫家, 義已絶, 決不可勒令復合, 以汚士大夫之家風也。 崔鳴吉旣以執拗之見, 妄引先朝之事, 其於獻議之辭, 備陳難絶之意, 甚矣, 鳴吉之誤也! 當時傳敎, 不載國乘之中, 已無可據。 設有是敎, 亦非可法之規, 則其可諉以先朝之所行者, 而復行於今日乎? 先正有言曰: ‘以失節者配, 是已失節也。’ 復取失節之婦, 事父母而奉宗祀, 生子孫而繼家世, 寧有是理? 噫! 壞百年之國俗, 擧三韓而夷之者鳴吉也, 可勝痛哉?"】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12면
  • 【분류】
    외교-야(野) / 호구-이동(移動) / 풍속-예속(禮俗) / 윤리(倫理)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