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이경여가 문경의 어류 산성에 대해 계하다
동지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기를,
"문경(聞慶) 북쪽 조령(鳥嶺) 남쪽에 산성 하나가 있는데 이름을 어류(御留)라고 합니다. 어느 때의 일인지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은 고려 때 어가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자세한 유래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성 안의 넓이는 남한 산성의 십분의 구나 되며, 형세의 험하고 견고함은 남한 산성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동쪽과 남쪽은 만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새나 짐승도 넘기가 어려우며, 북쪽은 동쪽이나 남쪽에 비해 조금 낮으나 또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니, 대략 성첩(城堞)을 쌓으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긴급함을 방어할 곳이라고 하는데 통할 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 산성의 가장 험한 곳에 비해 몇 배 더 험하고 크고 작은 암석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공역을 매우 적게 들이고도 또한 범접하기 어려운 형세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 안에는 샘물과 시내가 여러 길로 다투어 흐르며, 수목이 꽉 들어차 있어 취해 써도 다하지 않아 천 칸의 큰 집을 만들 수 있고 몇 년의 땔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만든 험난한 형세가 실로 동남쪽에서 제일이 됩니다. 그 안에는 4, 5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고, 1, 2만 호를 둘 수 있습니다. 만약 조금만 수축한다면 집을 경영하고 식량과 마초를 저장하여 영원히 함락되지 않는 기지를 만들 수 있으니, 남쪽과 북쪽에서 비록 준동을 하더라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백만의 군사가 사방에서 진격해 들어와도 성 안의 사람들은 마음놓고 편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니,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 말고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이곳은 동쪽으로는 태백산·소백산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월악산(月岳山)과 통하며, 서쪽으로는 백화산(白華山)과 접해 있는데, 그 줄기가 뻗어 속리산(俗離山)을 향하고 또 곧바로 덕유산(德裕山)·지리산(智異山)으로 연결되어 바다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또 북쪽에는 4군이 있는데, 그대로 강원도로 이어집니다. 충주는 오른쪽에 있고, 안동·풍기·영주는 왼쪽에 있으며, 낙동강이 남쪽으로 뻗쳐 있고, 한강 상류가 뒤쪽에서 흘러내립니다. 험준한 언덕과 높은 봉우리에는 구름이 걸려 해를 가리고, 사잇길이 서로 연결되어 어느 곳이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적을 제압하는 형세가 마치 목을 조르고 등을 어루만지는 듯합니다. 산골짜기가 멀리 뻗쳐 있고 깊은 구렁이 이리저리 얽혀 있어 백 리 안에는 발붙일 곳이 없으니, 비록 천하의 대병이라고 해도 포위해 머물 리가 없습니다.
성 북쪽의 월악(月岳), 동쪽의 작성(鵲城), 서쪽의 조령(鳥嶺)·희양성(曦陽城), 남쪽의 고모(姑母)·토천(兎遷)은, 어떤 것은 절험한 산성이고 어떤 것은 사다리 길의 중관(重關)입니다. 이곳에 군사 몇 명을 배치해 주둔시키면 서로 성원할 수 있고 호령을 통할 수 있습니다. 호서·호남·영남의 3도와 관동·관북 및 기전(畿甸)을 또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산길이 사방으로 나 있어 명맥(命脉)이 막히지 않으니, 산길을 따라 식량을 운송하면 먹을 것이 부족한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북쪽에 일이 있으면 어가(御駕)가 머무는 곳으로 삼고, 남쪽 지방에 경보가 있을 경우 관방(關防)하는 곳으로 삼는다면, 민심은 믿는 바가 있고 국세는 저절로 장해질 것입니다.
다만 군량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염려스럽습니다. 영외(嶺外)의 11개 고을에서 거둔 세미(稅米)를 고개를 넘고 험한 곳을 건너 멀리 강창(江倉)으로 수송하려면 우마가 넘어지고 민력이 다합니다. 만약 해마다 이곳으로 운반하게 하여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면,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군량을 넉넉히 할 수 있으며, 민심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에 저축된 것이 넉넉치 않은데 수응하는 것은 날로 번다하니, 만약 크게 변통하고 크게 절약하여 회계(會稽)에서와 조구(曺丘)의 뜻017) 을 분발하지 않으면 이것을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성명께서 마땅히 스스로 힘쓸 일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익숙히 강구하여 아뢰게 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경상 감사 이경증(李景曾)이 치계하기를,
"신이 병사 김응해(金應海) 및 문희성(文希聖) 등과 함께 어류 산성으로 가서 살펴보니, 산성의 터가 조령 큰길의 요충지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바깥쪽은 매우 험난하고 산줄기가 멀리 면면히 뻗어 비록 10만의 적병이라도 포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명령이 사방에 통할 수 있고 시냇물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다만 성 안이 지극히 험하고 내면(內面)도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동·서·남·북으로 서로 구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수축하여 진(鎭)을 만든다면 서쪽과 남쪽에 경보가 있을 경우 모두 믿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터를 닦고 성을 쌓는 데 드는 공력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비록 온 도의 민력을 다 쓰더라도 1년 안에 공역을 마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병사가 멀리 진주(晋州)에 있어서 진을 떠나 올 수도 없고, 문경 현감 또한 주관할 수 없으니, 모름지기 먼저 적임자를 얻어 이 임무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쌓은 뒤에도 지킬 수 없습니다. 함창(咸昌)·용궁(龍宮)·산양(山陽)을 합현(合縣)하자는 의논은 참으로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연혁 또한 관계된 바가 중대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상량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선조조에 정승 유성룡이 이 성을 수축하자고 의논하였으나 얼마 후에 자리에서 물러나자 일이 정지되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지금까지도 본도의 백성이나 선비로서 유식한 자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의논을 듣자 모두 쌓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듣자니, 본성은 주위가 넓고 커서 백성들의 힘을 허다하게 써야 하고, 수목이 빽빽히 들어서 있어 형세를 살피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로 하여금 승장(僧將)을 가려 뽑아 중들을 모집해서 사찰을 창건하고 수목을 베어내며 도로를 만들게 한 뒤에, 다시 지세의 평이하고 험난함을 살펴서 투입해야 할 역군과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정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크게 성을 쌓는 역사를 일으키고자 하면 작은 문경현으로서는 마련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분할해서 거행하는 것 또한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니 성을 쌓을 것인지를 완전히 정한 뒤에 헤아려 조처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註 017]회계(會稽)에서와 조구(曺丘)의 뜻 : 곤경에 처했을 경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발분의 노력을 한다는 말임. 회계(會稽)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 패해 은신하며 복수의 터전을 닦은 곳이고, 조구(曺丘)는 초(楚)나라의 변사로 자기를 싫어하던 계포(季布)를 설득시켰던 인물이다. 《사기(史記)》 월왕 구천 세가(越王句踐世家), 계포 열전(季布列傳).
○同知李敬輿上疏曰:
聞慶之北, 鳥嶺之東, 有一山城, 名曰御留。 未知何時之事, 而或云麗祖駐駕之所, 亦未得其詳也。 其中闊狹, 比南漢十分之九, 形勢險固, 卽非南漢之比。 東、南絶壁萬丈, 鳥獸難越, 北則比東、南稍低, 而又非人跡可通, 略設城堞, 可以高枕。 其西號爲防緊之處, 亦有可通之路, 而視南漢之最險處, 不啻倍蓰, 而小大巖石, 積如築土, 功役甚省, 而亦可成難犯之勢。 城中井泉川溪, 百道爭流, 樹木森列, 取之不盡, 可作千間大廈, 可備數年樵爨。 天造之險, 實爲東南第一。地中可容四五萬兵甲, 亦可置一二萬戶。 倘能少可修築, 經營屋宇, 儲峙糧草, 以爲永遠不拔之基, 南北雖動, 亦無我何。 百萬之師, 四面進薄, 而城中之人安枕自肆, 萬全之地, 捨此無他。 此地東連太、小白, 北通月岳, 西接華山, 迤向俗離, 直連德裕、智異, 以抵于海。 又北有四郡, 仍達江原, 忠州據其右, 安東、豊、榮處其左, 洛東亘其南, 漢水上流出其後。 峻阜、長岑, 橫雲蔽日, 鳥路相績, 無處不通。 控制之勢, 有若扼吭, 撫背山谷, 綿遠絶壑, 參錯百里之內, 無地着足, 雖天下之兵, 亦無圍住之理。 城北之月岳, 其東之鵲城, 其西之鳥嶺、曦陽城, 其南之姑母、兔遷, 或是絶險山城, 或是棧道重關。 布置留屯若干兵, 聲援相接, 號令可通。 湖、嶺三道, 關東ㆍ北、畿甸, 亦可控制。 山路四出, 命脈無壅, 從山徑運糧, 不至乏食。 西北有事, 則爲駐蹕之所; 南方有警, 則爲關防之地, 民心有恃, 國勢自壯。 糧餉難辦, 此最可慮。 嶺外十一官稅米, 踰嶺涉險, 遠輸江倉, 牛顚馬斃, 民力已盡。 如使歲運於此, 春散秋收, 則除民弊, 裕軍食, 而慰民心。 但國儲未裕, 酬應日煩, 若非大變通, 大省約, 奮會稽、曹丘之志, 則難以議此。 此聖明所宜自勵處也。
備局請令本道監司熟講以聞, 上從之。 其後慶尙監司李景曾馳啓曰: "臣與兵使金應海及文希聖等, 往見御留山城, 則山城之基, 雄峙於鳥嶺大路之要衝, 而外面險絶, 枝麓綿遠, 雖十萬敵兵, 亦難圍守。 命令可通於四方, 澗水雖旱而不渴, 但城內極險, 內面高峻, 東西南北不能相救。 若修築作鎭, 則西、南之警, 皆有所恃, 而治基築城, 功力難量, 雖用一道民力, 而一年之內難以訖功。 兵使遠在晋州, 不可離鎭而來, 聞慶縣監, 亦不可主管, 要須先得其人而委以此任。 且旣築之後, 亦無以守護, 咸昌、龍宮、山陽合縣之議, 誠以此也。 第念, 沿革亦係重大, 令廟堂商量處置。" 備局回啓曰: "宣廟朝相臣柳成龍, 議築此城, 而未幾去位, 事寢不行, 至今本道民士之有識者無不慨歎, 及聞此議, 皆以爲不可不築。 但聞, 本城周回闊大, 須用許多民力, 而樹木稠密, 未易審察形勢。 先令監司, 擇定僧將, 勸募緇徒, 創建寺刹, 斫去樹木, 開治道路, 然後更察地勢夷險, 以定役軍、糧資該入多寡而處之宜當。 如欲大興城役, 非聞慶小縣所可辦, 而分割之擧, 亦甚重大。 待城役完定後, 量處未晩。"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1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