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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2월 8일 임인 2번째기사 1638년 명 숭정(崇禎) 11년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

장유(張維)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011) 원년012)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013)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014)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7면
  • 【분류】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以張維李景奭所撰三田渡碑文, 入送淸國, 使之自擇。 范文程等見其文, 以張維所撰, 引喩失當, 景奭之文可用, 而但中有添入之語, 令我國改撰而用之。 上命景奭改之。 其文曰:

崇德元年冬十有二月, 皇帝以壞和自我, 始赫然怒, 以武臨之, 直擣而東, 莫敢有抗者。 時我寡君, 棲于南漢, 澟澟若履春氷, 而待白日者, 殆五旬。 東南諸道兵, 相繼崩潰, 西北帥逗撓峽內, 不能進一步, 城中食且盡。 當此之時, 以大兵薄城, 如霜風之卷秋蘀, 爐火之燎鴻毛, 而皇帝以不殺爲武, 惟布德是先, 乃降勑諭之曰: "來, 朕全爾。 否, 屠之。" 有若諸大將, 承皇帝命, 相屬於道。 於是我寡君, 集文武諸臣謂曰: "予托和好于大邦, 十年于玆矣。 由予昏惑, 自速天討, 萬姓魚肉, 罪在予一人。 皇帝猶不忍屠戮之, 諭之如此, 予曷敢不欽承, 以上全我宗社, 下保我生靈乎?" 大臣協贊之, 遂從數十騎, 詣軍前請罪。 皇帝乃優之以禮, 拊之以恩。 一見而推心腹, 錫賚之恩, 遍及從臣。 禮罷, 卽還我寡君於都城, 立召兵之南下者, 振旅而西。 撫民勸農, 遠近之雉鳥散者, 咸復厥居。 詎非大幸歟? 小邦之獲罪上國久矣。 己未之役, 都元帥姜弘立, 助兵明朝, 兵敗被擒。 太祖武皇帝只留弘立等數人, 餘悉放回, 恩莫大焉, 而小邦迷不知悟。 丁卯歲, 今皇帝命將東征, 本國君臣避入海島。 遣使請成, 皇帝允之, 視爲兄弟國, 疆土復完, 弘立亦還矣。 自玆以往, 禮遇不替, 冠蓋交跡, 不幸浮議扇動, 搆成亂梯。 小邦申飭邊臣, 言涉不遜, 而其文爲使臣所得, 皇帝猶寬貸之, 不卽加兵。 乃先降明旨, 諭以師期, 丁寧反覆, 不啻若提耳面命, 而終不免焉, 則小邦君臣之罪, 益無所逃矣。 皇帝旣以大兵, 圍南漢, 而又命偏師, 先陷江都。 宮嬪、王子曁卿士家小, 俱被俘獲。 皇帝戒諸將, 不得擾害, 令從官及內侍看護, 旣而大霈恩典。 小邦君臣及其被獲眷屬, 復歸於舊, 霜雪變爲陽春, 枯旱轉爲時雨; 區宇旣亡而復存, 宗祀已絶而還續。 環東數千里, 咸囿於生成之澤, 此古昔簡策所稀觀也。 於戲, 盛哉! 漢水上游三田渡之南, 卽皇帝駐蹕之所也, 壇場在焉。 我寡君爰命水部就壇所, 增而高大之, 又伐石以碑之, 垂諸永久, 以彰夫皇帝之功之德, 直與造化而同流也, 豈特我小邦世世而永賴? 抑亦大朝之仁聲武誼, 無遠不服者, 未始不基于玆也。 顧摹天地之大, 畫日月之明, 不足以彷彿其萬一, 謹載其大略。 銘曰: 天降霜露, 載肅載育。 惟帝則之, 竝布威德。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西蕃窮髮, 曁夫北落。 執殳前驅, 厥靈赫赫。 皇帝孔仁, 誕降恩言。 十行昭回, 旣嚴且溫。 始迷不知, 自貽伊慼。 帝有明命, 如寐之覺。 我后祗服, 相率以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何以錫之, 駿馬輕裘。 都人士女, 乃歌乃謳。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哀我蕩析, 勸我穡事。 金甌依舊, 翠壇維新。 枯骨再肉, 寒荄復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7면
  • 【분류】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