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사에게 청의 실정과 삼학사 등의 일을 묻고 술 마신 일을 문책하다
상이 사은사 이성구 등을 소견(召見)하여 이르기를,
"저들의 기색이 어떠하던가? 대우하는 것은 또한 어떠하던가?"
하니, 이성구가 대답하기를,
"신들이 40일 동안 관소(館所)에 머물렀는데 20일 이전은 출입하지 못하였고, 그 뒤에야 비로소 서로 만날 수 있었으나 그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기를 돋우어 상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점점 화평하여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배례(四拜禮)는 반드시 행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에도 예부에서 사배례를 하는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장예충(張禮忠)이 ‘중국에서도 그러하였다.’ 하였고, 저들도 ‘중국의 예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고, 도승지 김수현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하는 예는 숙배(肅拜) 때 오배(五拜)하고 예부에서는 사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두례(叩頭禮)가 있던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삼고두(三叩頭)였습니다."
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상서(尙書)는 앉아서 절을 받고 낭중(郞中)은 사신과 맞절하고 서장관(書狀官)에게는 읍(揖)만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서로 나누어 앉는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처음 만날 때에는 저들이 북쪽 벽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에는 동서로 나누었습니다. 또 동궁(東宮)의 체후(體候)가 아주 편안하니 이것은 기쁩니다마는, 가져간 주문(奏文)은 끝내 바치지 못하였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주문 가운데에 있는 말은 분의(分義)를 거론하였을 뿐이고 사세를 논하지 않았으니, 실로 저들이 성낼세라 염려되므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감히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언제쯤 서쪽으로 침범한다 하던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혹 7월쯤에 군사를 움직인다고도 하고 올해에는 쉰다고도 하나, 군기(軍機)가 매우 비밀스러워 군중(軍中)에서도 모른다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에게서 군사를 징발하려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서로 통하겠습니까. 저들은 우리 나라 포수(砲手)가 정예하여 가도(椵島) 싸움에서 이에 힘입어 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잡혀간 자 1천 6백 인을 뽑아 해주위(海州衛)에서 포를 익히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吳達濟) 등의 일은 슬프다. 종관(從官)들이 구제할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는가?"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신이 남이웅(南以雄)에게서 들으니, 용장(龍將)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기를 ‘이 두 사람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내가 살리려 하였는데, 그들이 반드시 죽으려 하므로 죽였다.’하더라 합니다. 문답할 때 그 뜻을 따랐으면 혹 살 길이 있었을 것인데, 오달제의 말이 ‘죽음을 참고 있는 까닭은 만일 살아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잡혀 있게 된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저들이 성내었고, 게다가 이번 싸움에서 그들의 죽은 자가 장관(將官) 3백 인과 갑졸(甲卒) 7천 인인데 죽은 자의 처자가 다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밤낮으로 호소하므로 면할 수 없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죽이지 않았으므로 혹 보전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면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슬프다."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서문 밖에 사람을 죽이는 곳이 있는데 뼈가 쌓여 있는 가운데에서 주검을 찾을 길이 없으므로 그 종을 시켜 초혼(招魂)하여 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가엾고 또한 아름답다. 대신이 말한 것을 따라 뜻을 굽혀 애걸하였더라면 혹 살길이 있었을 것인데, 되[虜]에게 항복할 수 없는 의리 때문에 죽도록 굽히지 않아서 나라에 빛이 있게 하였다."
하니,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尹集)은 말하는 것이 오달제처럼 명백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달제의 말은 매우 아름답다. 죽고 살 즈음에 명예와 절조를 잃지 않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니, 김수현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이 공초한 말은 매우 명백하고 정당하여 보기에 어엿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심양에서도 이런 말이 있던가?"
하니,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신도 보았습니다마는, 심양에 들어간 뒤에 물었더니 몰랐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에는 본디 공초받는 일이 없으므로 공초한 말이라 하는 것은 헛되이 전해진 것인 듯하고, 글에는 각각 다른 체가 있는데 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던가?"
하니, 채유후가 아뢰기를,
"글씨는 비슷합니다마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김수현이 아뢰기를,
"그 종이 그 공초한 말을 얻어 왔다 합니다."
하고, 이성구가 아뢰기를,
"윤집·오달제 두 사람은 다 나라의 일을 위하여 죽었으니, 가엾이 여겨 돌보는 은전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행하였다. 또 오달제의 형 중에 수령의 망(望)에 든 자가 있으니, 내가 곧 제수하여 그 늙은 어미를 봉양하게 하겠다. 배종(陪從)한 신하들은 다 한때에 가려보낸 사람인데, 이제 방자하게 술을 마시고 삼가지 않는다고 한다. 경은 친히 임금의 명을 받았는데 금지하지 않을 뿐더러 함께 마셨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채유후가 나아가 아뢰기를,
"그때에 술마시고 실수한 것은 신 혼자뿐입니다. 매우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말이 없다가 이어서 승지에게 이르기를,
"박로(朴𥶇)는 심양에 들어간 뒤로 한 번도 술잔을 잡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스스로 담당하였다 한다. 그 충성이 아름다우니 털옷 한 벌을 장만해 보내어 내 뜻을 나타내라. 저곳에 있는 종신(從臣)도 나중에 죄를 다스리겠거니와, 나온 자는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드디어 전 사서(司書) 이회(李禬)와 전 익위(翊衛) 서택리(徐擇履)를 잡아다 추문하고 이어서 정배(定配)하게 하고, 또 사신은 파직하고 서장관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96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庚午/上召見謝恩使李聖求等曰: "彼中氣色如何, 待之亦如何?" 聖求對曰: "臣等留館四十日, 而二十日前, 則不得出入, 其後始得相接, 而未能詳知其事情。 初甚盛氣相對, 而終則漸似和平, 然四拜之禮, 則必使行之矣。" 上曰: "我國使臣之入於中朝也, 亦行四拜之禮於禮部乎?" 聖求曰: "張禮忠以爲, 中朝亦然。 彼輩亦曰: ‘中朝之禮, 我無不知’ 云。" 都承旨金壽賢曰: "我國使臣赴京之禮, 則肅拜時五拜, 禮部則四拜矣。" 上曰: "有叩頭之禮耶?" 聖求曰: "三叩頭矣。" 壽賢曰: "中朝則尙書坐而受拜, 郞中與使臣抗禮, 於書狀則揖而已。" 上曰: "分東西而坐耶?" 聖求曰: "初見時則彼輩主壁, 而其後則分東西矣。 且東宮體候萬安, 是可喜也。 第齎去奏文, 終不得呈進, 不勝皇恐。奏文中措語, 只擧分義, 不論事勢, 實恐彼之發怒, 故趑趄而竟不敢耳。" 上曰: "何間西犯云乎?" 聖求曰: "或言七月間動兵, 或言今年則休息, 而兵機甚密, 軍中亦不知云。以此推之, 雖欲徵兵於我, 何暇相通? 彼以我國砲手精銳,椵島之役, 賴此成功, 故方抄被擄者一千六百人, 習砲於海州衛云矣。" 上曰: "吳達濟等事慘矣。 從官輩, 無可救之勢耶?" 聖求曰: "臣聞諸南以雄, 龍將來傳皇帝之命曰: ‘此二人罪當死, 而我欲活之, 渠輩必欲死, 故殺之’ 云。 問答之際, 若順其意, 則或有生道, 而達濟之言曰: ‘所以忍死者, 萬一生還, 復見吾君與老母耳。 今若見縶, 不如無生’, 彼乃發怒。 加以廼者之役, 渠等死者, 將官三百、甲卒七千人也。 死者之妻子, 皆以斥和人爲讐, 日夜呼訴, 故終不得免云。" 上曰: "初旣不殺, 意其或全, 竟不能免, 慘矣慘矣。" 聖求曰: "西門外有殺人處, 積骨叢中, 求屍無路。 只令其奴, 招魂而來矣。" 上曰: "其事可憐, 亦可嘉也。 苟從大臣所言, 曲意哀乞, 則或有生道, 而義不降虜, 至死不屈, 于國有光。" 聖求曰: "尹集則言辭不及吳達濟之明白云矣。" 上曰: "達濟之言, 極嘉極嘉。 死生之際, 能不失名節, 不亦難乎?" 金壽賢曰: "洪翼漢之供辭, 極其明正,見之澟然。" 上曰: "予未之見也。 瀋陽亦有此言耶?" 蔡𥙿後曰: "臣亦得見, 而入瀋後問之則不知矣。" 上曰: "彼國本無捧招之事, 所謂供辭, 近於虛傳, 而文各有體, 似出於其人之手耶?" 𥙿後曰: "文字則似之, 而不知所從來矣。" 壽賢曰: "其奴得其供辭而來云矣。" 聖求曰: "尹、吳兩人, 皆死於國事, 矜恤之典, 似不可廢。" 上曰: "旣已施行。 且達濟之兄, 有參守令望者, 予卽差授, 俾養其老母矣。 陪從諸臣, 皆一時擇遣之人, 而今乃縱酒不謹。 卿親承君命, 非但不禁, 且與之偕飮何也?" 蔡𥙿後進曰: "其時酒失, 臣獨有之, 不勝惶恐。" 上怒甚默然, 仍謂承旨曰: "朴𥶇入瀋之後, 一不把杯, 大小事, 身自當之云。 其忠可嘉, 備送毛衣一領, 以表予意。 從臣之在彼者, 從當治罪, 出來者拿鞫定罪。" 遂拿問前司書李禬、前翊衛徐擇履, 仍令定配。 又命使臣罷職, 書狀官先罷後推。
- 【태백산사고본】 35책 35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9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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