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014) 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적이 성 밖의 높은 언덕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중관(中官)이 원손(元孫)을 업고 나가 피했으며, 성에 있던 조사(朝士)도 일시에 도망해 흩어졌다.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出擊)하였으나 대적하지 못한 채 더러는 죽기도 하고 더러는 상처를 입고 돌아 왔다. 얼마 뒤에 대병(大兵)이 성을 포위하였다. 노왕(虜王)이 사람을 보내어 성 밑에서 소리치기를,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쉽지만 군사를 주둔시키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조명(詔命) 때문이다. 황제가 이미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원을 보내 와서 듣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군이 한흥일(韓興一)에게 이르기를,
"저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나 화친하는 일은 이미 들었다. 시험삼아 가서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즉시 말을 달려 진소(陣所)로 가니,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와야만 한다."
하였으므로, 대군이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에게 가도록 하였다. 견여(肩輿)로 진중(陣中)에 들어가 늙고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음을 핑계대고 예모를 갖추지 않으니, 좌우에서 칼을 빼어들고 위협하였으나 노왕(虜王)이 중지하게 하였다. 이어 조정이 화친을 이룬 일을 말하고 대군과 서로 만나 보기를 원하였다. 돌아와서 보고하니, 대군이 이르기를,
"저들이 호의를 갖고 나를 유도하는 것인지는 실로 헤아릴 수 없으나, 일찍이 듣건대 동궁(東宮)께서도 가기를 원했다고 하니, 진실로 위급함을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진문(陣門)으로 갔다. 그러자 노왕(虜王)이 역자(譯者)로 하여금 인도해 들이게 하고 경례(敬禮)를 하였다. 저물녘에 대군이 노왕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군사들은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은 동서(東西)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군병을 단속하여 살육을 못하게 하였으며, 제진(諸陣)으로 하여금 사로잡힌 사녀(士女)를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하는 동시에, 대군에게 행재소(行在所)에 글을 올려 재신(宰臣)으로 하여금 치계(馳啓)하도록 청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 역자(譯者)가 돌아와 말하기를 ‘국왕이 장차 황제를 만나 보고 인하여 도성(都城)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군과 궁빈(宮嬪) 그리고 여러 재신(宰臣)도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출발할 즈음에 국구(國舅)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자손으로서 궁내(宮內)에 피신해 있다가 자결한 자가 10여 인이었다. 이튿날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는데, 몽병(蒙兵)이 난을 일으켜 거의 남김없이 불지르고 파헤치며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도제조 윤방이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성중(城中)에 뒤떨어져 머물면서 묘(廟) 아래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몽병(蒙兵)이 파헤쳐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68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註 014]구왕(九王) : 예친왕(睿親王).
○虜人聲言, 分兵犯江都。 時, 氷澌塞江, 人皆以爲虛張, 而徵諸路舟師, 命留守張紳統之。 忠淸水使姜晋昕領船先至, 守燕尾亭, 紳治船于廣成津, 裝載未完。 虜將九王, 抄諸營兵, 號三萬, 車載三板船數十, 進屯甲串津, 連放紅夷砲, 水陸軍劻勷不敢近。 賊乘虛急渡, 紳、晋昕、慶徵、敏求, 皆望風而走。 將官具元一, 謀欲斬紳, 驅兵下陸決戰, 紳覺而防之, 元一痛哭, 投海而死。 中軍黃善身, 領數百軍, 在津頭後山, 遇賊軍潰死之。 賊分屯城外高阜。 中官負元孫, 出避在城, 朝士一時跳散。 大君募勇士出擊, 不能敵, 或死或帶傷而歸。 俄而, 大兵圍城, 虜王遣人呼于城下曰: "屠城易耳, 頓兵不進者, 詔命也。 皇帝已許和, 急遣官來聽。" 大君謂韓興一曰: "彼言不足信, 而和事則已聞之矣。 試往觀之。" 卽馳往陣所, 則曰: "大臣來, 乃可也。" 大君令君 尹昉往焉。 肩輿入陣中, 稱老病垂死不爲禮, 左右露刃劫之, 虜王止之。 仍言朝廷成和之事, 請與大君相見。 歸報則大君曰: "彼以好意誘我, 固不可測, 而曾聞東宮請行。 苟可以解急, 吾何以畏死?" 遂行至陣門。 虜王令譯者導之, 入致敬禮焉。 日晩, 大君與虜王, 聯騎入城, 留兵城外。 分路東西, 令彼我勿相雜糅, 戢其軍兵, 無得殺戮, 令諸陣許還被擄士女。 請大君修簡于行在, 令宰臣馳啓。 越二日, 譯者還言: "國王將見皇帝, 仍還都城。 大君、宮嬪、諸宰可還京。" 臨發, 國舅西平府院君 韓浚謙子孫, 避在宮內, 自裁者十餘人。 翌日, 虜王還渡江, 蒙兵作亂, 焚掘殺掠, 殆盡無遺。 都提調尹昉, 奉廟社主, 落留城中, 埋安于廟下, 至是, 爲蒙兵所掘, 仁順王后神主見失。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6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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