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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6월 17일 경인 2번째기사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금나라에 격문을 보내다

금나라 한(汗)의 글에 답하여 만상(灣上)에 보내면서 격(檄)으로 칭했는데, 그 글에,

"두 나라가 화친한 지 이제 10년이 되었으니, 실로 생민들이 복을 맞이한 것이요, 하늘이 도움을 내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게 사단이 갑자기 생겨나 꾸짖는 말이 크게 닥치니 아, 불행함이 심합니다. 사신이 비록 국서를 전하지는 않았으나, 입으로 말하면서 모든 뜻을 다 말하였습니다.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 또한 잠자코 있기도 어려운 법입니다. 이에 곧바로 정성을 다하여 맹약이 깨지게 된 원인이 우리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바, 말이 박절하고 바름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국의 군사는 날쌔고 용감하여 싸우면 이기고 공략하면 차지해서 이제 또 삽한(揷漢)015) 을 복속시켰고 사막(沙漠)에까지 땅이 뻗쳤으니, 웅장하고 강한 형세는 당연히 자부할 만하여 두렵거나 꺼릴 바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는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처하여 농사를 짓고 누에를 길러 스스로 봉양하며 예와 의를 지키면서 스스로 보존하고 있을 뿐, 병갑(兵甲)과 전투는 본래 익힌 것이 아닌데, 무슨 이길 만한 형세가 있어서 귀국을 능멸하고 스스로 맹약을 깨겠습니까. 귀국이 우리 나라에 책망하는 것은 대략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한인(漢人)에 관한 일이고, 둘째는 변민(邊民)에 관한 일이고, 셋째는 참소에 관한 말입니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한인을 공경스럽게 대하는 것은 곧 예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무릇 한인이 하는 바를 우리가 어떻게 호령으로 금단할 수 있겠습니까. 화친을 약속한 처음에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첫번째 조건으로 삼았는데, 귀국이 조선이 명나라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좋은 뜻이라고 여겨 마침내 교린의 약속을 정한 것으로, 이는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요즘 명나라를 향하고 한인을 접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책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화친을 약속한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에 향하는 것은 천지가 다할 때까지 고금을 통하는 큰 의리인데, 이것을 죄라고 한다면 우리 나라가 어찌 기꺼이 듣고서 순순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정령이 엄하지 못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금법을 범했으니, 이는 과인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전후로 법을 범한 자는 그 즉시 형륙을 행했으며, 귀국이 꾸짖어 올 때는 늘 겸손히 사과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가 고의로 옳지 않은 짓을 한 것이겠습니까. 호화(好貨)를 숨기고 상고(商賈)를 죽이며 강홍립(姜弘立)을 죽이고 사신을 홀대하였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사한 자들이 꾸며댄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귀국이 비록 번번이 이에 대한 말이 있더라도 우리 나라는 이런 일이 없으니 과인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귀국이 이미 호의로 서로 대하고 있는 터인데도 이 세 가지에 대해 용서하지 않고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이미 약속하여 형제국이 되었는데도 서사(書辭)에 일컬은 꾸짖고 욕하는 말이 전날에 서로 공경하던 체모가 전혀 아니니, 사신이 감히 그 글을 싸 가지고 돌아오지 못한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저 삽한 왕자(揷漢王子)는 바로 망한 나라의 포로이니 참으로 귀국의 왕자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접때 무단히 대등한 예로 통서(通書)하면서 문서의 체재도 대등하게 하여, 여국(與國)의 한(汗)과 똑같은 체모로 우리 나라와 사귀려 했으니, 우리 나라가 어찌 마음 편히 그 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한 말에 있어서는 참으로 우리 나라가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객관(客館)의 신하가 글을 받지 않은 것 역시 감히 스스로 자기 임금을 낮출 수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인이 귀국의 사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즉시 회답한 국서 속에 이것을 제외하고 다시 어떤 말로 왕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전대부터 중국 조정을 섬겨 동번(東藩)이라 칭하면서 일찍이 강약과 성패를 가지고 신하의 절개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본디 예의를 스스로 지킨다고 일컫게 된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또 한마디 말할 것이 있습니다.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대해 지존(至尊)입니다. 그러나 특수한 예로 대우하여 사명(辭命)의 사이에 일찍이 설만한 말과 준절한 나무람을 쓰지 않았고, 우리 나라가 공헌(貢獻)을 지극히 박하게 해도 중국 조정에서는 매우 후하게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동과 심양 사람들이 환하게 아는 바인데 어찌하여 귀국은 이웃으로 화친하기를 약속하고도 번번이 깔보고 업신여기며 꾸짖고 욕합니까. 그리고 금번에 신사(信使)가 갔을 적에는 비례(非禮)로써 겁주고 온갖 곤욕을 보였으니, 이것이 과연 이웃 나라 사신을 대우하는 예입니까? 귀국의 사신이 와서는 우리 신료들에게 욕을 하면서 예로 공경하는 뜻이 전혀 없었고, 강매(强賣)하면서 마구 빼앗기를 끝이 없이 하였습니다. 당초 맹약을 맺은 것은 본래 국경을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은 백성에게는 남은 힘이 없고 시장에는 남은 재화가 없어 연로(沿路)의 고을은 곳곳마다 텅 비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않는다면 병화를 받아 망한 것과 똑같을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발하여 화친을 잘못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인이 처음의 마음을 변치 못하는 것은 하늘에 맹서한 맹약을 먼저 저버릴 수 없고 이웃 나라와 사귀는 의리를 먼저 상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국은 도리어 우리가 먼저 맹약을 깨뜨리려 한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의지할 만한 군사가 없고 충분한 재물이 없으나, 강조하는 것은 대의이고 믿는 것은 하늘뿐입니다.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평씨(平氏)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평수길(平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귀국이 우리 서로(西路)를 침략해 왔으나 병세(兵勢)를 끝까지 부리지 않고 맹약을 맺고 물러갔으니, 그것은 천도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곤욕스럽게 하고 우리에게 반드시 따르지 못할 일로써 억지를 부리면서 병력이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형제지국을 협박하면서 우리 나라가 먼저 전쟁의 꼬투리를 열었다고 말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로 다툴 수 없는 것이며, 역시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믿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과인이 이것에 대하여 또 어찌 적실하게 알고 분명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귀국이 널리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하였다. 비국이, 격서의 첫머리 말에 청국(淸國)이란 국호를 쓰지 말자고 청했는데, 그 뒤에 마침내 그들이 일컫는 바에 따라 청국이라고 써서 보냈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5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註 015]
    삽한(揷漢) : 몽고의 부족(部族) 찰합이(察哈爾).

○答汗書, 送于上, 稱以檄。 其書曰:

兩國通好, 訖玆十年, 實生民之所徼福, 上穹之所垂佑。 今者不意, 事端橫生, 嘖言大至, 吁其不幸之甚也。 使臣雖不傳國書, 其所口申之辭, 則大都已悉。 意有不同, 言固無他, 旣有所懷, 亦難容默。 玆用直攄悃愊, 以明敗盟之端, 不自我始, 毋怪其辭之切直也。 貴國士馬精勇, 戰勝攻取, 今又係屬揷漢, 綿地沙漠, 雄强之勢, 宜其自負, 而無所畏憚也。 況我國僻處海隅, 耕桑自養, 禮義自保, 兵甲戰鬪, 本非所習, 有何相勝之勢, 而慢蔑貴國, 自敗盟約乎? 凡貴國之責於我者, 大略有三, 一則漢人之事也, 二則邊民之事也, 三則讒間之說也。 我國臣事朝, 敬待漢人, 乃禮之當然也。 凡漢人所爲, 我豈可以號令禁斷也? 當約和之初, 我國以不背朝, 爲第一義, 而貴國乃謂 ‘朝鮮不背南朝, 自是善意’, 遂定交隣之契, 此上天之所監臨也。 今者每以向南朝、接漢人責我, 此豈約和之本意也? 以臣向君, 乃窮天地、亘古今之大義也。 以此爲罪, 則我國豈不樂聞而順受乎? 敝國政令失嚴, 邊民犯禁, 此則寡人之過也。 然而前後踰犯之徒, 隨卽刑戮, 貴國呵責之來, 常切遜謝。 此豈我國, 故爲不直者哉? 至於匿好貨, 誅商賈, 殺姜弘立, 輕待來使等語, 皆出奸細之讒構。 貴國雖每有此言, 我國自無此事, 寡人有何愧焉? 貴國旣以好意相向, 而於此三者, 有所不恕, 有所不察。 旣約爲兄弟, 而書辭稱謂, 詆罵之言, 非復前日相敬之體, 使臣不敢齎回其書, 固其宜也。 彼揷漢王子, 乃亡國俘裔, 固非貴國王子比也。 乃者無端抗禮通書, 書面體式, 又爲相等, 其意似欲與國汗均體而交我, 我國豈可安受其書, 而其所傳言, 則誠我國所不敢聞者。 館臣不受其書, 亦是不敢自卑其君父。 寡人聞貴使所傳之言, 卽付答於國書中, 此外更有何辭往復耶? 我國自前代, 事中朝稱東藩, 未嘗以强弱、成敗, 變其臣節。 我國之素稱禮義自守者, 專在於此。 今我大明, 乃二百餘年混一之主, 我國安得以一失遼瀋一片地, 輒萌異心, 從貴國所爲耶? 抑有一說, 朝於我國, 至尊也。 然且待以殊禮, 辭命之間, 未嘗加以慢辭峻責。 我國貢獻至薄, 而朝賜賚極厚, 此乃 人所明知。 奈何貴國終爲隣好, 而每加以卑侮詆罵? 且如今番信使之往, 刼以非禮, 困辱百端, 是果待隣國使臣之禮耶? 貴使之來, 辱我臣僚, 無復禮敬, 刼賣橫奪, 靡有止極。 當初結盟, 本欲保境安民, 而今則民無餘力, 市無餘貨, 沿路州邑, 所在空匱。 若此不已, 與被兵而覆亡等耳。 由是, 國人皆奮, 以和爲非。 惟寡人初心未變者, 徒以誓天之盟, 不可先負; 交隣之義, 不可先失故也, 而貴國反以我爲先欲敗盟, 寧有是理耶? 我國無兵可挾, 無財可資, 而所講者大義, 所恃者上天而已。 昔者倭寇, 假道于我, 欲犯中國, 而我國以義斥絶。 是搆兵之端, 非自我始也, 而倭寇陷我八路, 殘我萬姓, 自以爲得計矣。 曾未幾時, 秀吉自斃, 其後國中自亂, 伏屍成丘, 流血成川, 其所隕首亡躬者, 皆前日毒我之將士也。 今也源氏, 黜滅平氏, 而與我通好三十年間, 國富民盛, 倍於平秀吉之時。 天道厭兵, 佑善罰惡, 玆非其明效耶? 向者貴國, 雖搶我西路, 不窮兵勢, 結盟而退, 其於天道, 亦已順矣。 今乃辱我困我强我, 以必不從之事, 徒欲以兵力之强, 脅制兄弟之國, 而至謂我先啓兵端。 此不可以口舌爭, 亦恃上天之臨我而已。 且夫天心所係, 實在乎民。 設使我國, 守義被兵, 兵禍雖酷, 原非其君之罪, 則民心必不去, 而國命或可保。 今爲貴國恐脅需責, 剝盡民産, 使不得聊生, 則民心必去, 國隨而潰矣。 此是目覩耳接, 不昧不泯底道理, 有非書生、小子, 從簡冊上拾來說話。 寡人於此, 亦豈不的知而審處乎? 貴國廣慮之、深思之幸甚。

備局請於檄書頭辭, 勿書淸國之號, 其後竟依其所稱淸國而書送。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35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