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김자점의 신칙 문제로 정태화와 김익희 등의 의견이 맞서다
사간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동료들이 원수(元帥)를 신칙해야 한다는 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국가가 법을 세운 것이 애당초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 죄가 있으면 그 죄율에 따르는 것이 바로 떳떳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드시 별도로 논계해서 새로 만든 법이 있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진실로 법을 어겼으면 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고 법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법대로 시행할 것을 주청할 따름입니다. 어찌 훈귀이기 때문에 미리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용서하지 않겠다고 유시해서 도리어 나라의 위엄이 무겁지 않은 것을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신은 바로 그의 종사관인 만큼 조만간에 종정(從征)하여야 하므로 혐의쩍어서 감히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고, 정언 김익희(金益熙)·김중일(金重鎰)이 아뢰기를,
"옛날에 장수를 명하여 출사(出師)할 적에는 훈계와 신칙이 매우 엄했는데, 그것은 여럿의 뜻을 하나로 하고 나태함을 흥기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夏)나라 계(啓)가 감(甘) 땅을 정벌할 때에는 육경에게 맹서하였고, 주 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칠 때에는 우방의 임금들에게 맹서했으며, 태조 고황제가 서달(徐達)과 상우춘(常遇春) 등에게 출사를 명할 적에도 계칙하는 글이 있었던 것입니다. 서달 등은 일대의 훈구 대신으로 자신을 잊고 나라의 일을 따르는 데 있어 어찌 계칙이나 면려가 있은 뒤에 힘쓰는 바가 있던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와 같이 한 것은, 대개 온 국내의 군사를 모두 그에게 소속시켰으므로 나라의 존망이 그 일에 달려 있기 때문에 부득이 재삼 신칙하여 군율을 엄히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율이 엄하지 않기 때문에 적이 오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먼저 달아납니다. 이에 처음 갑자년에 패했을 때는 적이 경성까지 들어왔었고 재차 정묘년에 패했을 때는 오랑캐가 곧장 치달렸으니, 이는 모두 그 당시의 원수가 우물쭈물하다가 군율을 잃은 탓이었습니다. 지금 장수를 명하는 날을 만났으니 폐지된 군율을 거듭 밝혀서 전의 잘못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에 신들이 이런 뜻을 가지고 진계했던 것인데, 사간 정태화는 고집을 부려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이미 신용을 받지 못했고 또 논척을 당했으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부교리 김수익(金壽翼)·성이성(成以性)과 부수찬 심지한(沈之漢)·권우(權堣)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장수를 명하는 날을 당해서 군율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가상하게 여길 만합니다. 본인이 막좌(幕佐)가 되었다고 하여 공의을 막고자 하였으니 일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익희·김중일은 출사하게 하고 정태화는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태화의 말은 진실로 소견이 있어서인데 너희들은 체차하라고 논하니 시비가 밝지 못하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그러자 김수익 등은 대죄하고 김익희와 김중일은 다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자점이 공을 믿고 법을 업신여겨 적이 오면 달아날 것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신칙하는 일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태화는 훈귀에게 아첨하여 장황한 말을 하면서 오직 자점이 그 말을 듣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비루하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8면
- 【분류】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壬戌/司諫鄭太和啓曰: "同僚發申飭元帥之論。 臣以爲, 國家立法, 初非不嚴, 有罪準律, 自是常事。 何必別爲論啓, 有若新立之科哉? 苟或失律, 只當施法, 法有未伸, 則當請盡法而已。 豈可以勳貴之故, 而先慮其不用命, 諭以不貸, 反示國威之不重乎? 且臣卽其從事官, 當早晩從征, 嫌不敢參論, 請命遞斥。" 正言金益熙、金重鎰啓曰: "古者命將出師, 訓飭甚嚴, 乃所以一衆志, 而起其怠也。 是以, 夏 啓伐甘, 誓于六卿; 周武伐商, 誓于友邦冡君, 我太祖高皇帝, 命徐達、常遇春等出師也, 亦有戒飭之書。 達等以一代勳貴, 忘身循國, 豈待飭勵而後, 有所加勉, 而猶且如是者, 蓋掃境以屬, 存亡在此, 不得不再三申飭, 以嚴軍律也。 我國軍律不嚴, 故敵未至而先潰, 兵未交而先遁。 初敗於甲子, 賊入京城; 再敗於丁卯, 虜騎長驅。 此皆當時帥臣逗遛失律之罪也。 今當命將之日, 不可不申明已廢之律, 創懲旣覆之轍也。 臣等將以此意陳啓, 而司諫鄭太和堅執不許, 實未曉其意也。 臣等旣不見信, 又被其斥, 請遞臣等之職。" 副校理金壽翼ㆍ成以性、副修撰沈之漢ㆍ權堣等處置以爲: "當此命將之日, 欲明軍律, 有足可尙。 身爲幕佐, 欲沮公議, 事甚無謂。 請益熙、重鎰出仕, 太和遞差。" 答曰: "依啓。 太和之言, 誠有所見, 而爾等論遞, 可謂是非不明矣。" 壽翼等待罪, 益熙、重鎰更以此, 引避而遞。
【史臣曰: "金自點恃功蔑法, 賊來則走, 人誰不知? 申飭之擧, 固不可已。 太和求媚於勳貴, 張皇辭說, 惟恐自點之不聞, 鄙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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