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골대가 가지고 온 문서로 고민하다
금의 차인 용골대 등이 서울에 들어왔다. 구관소(句管所)의 제관(諸官)이 들어가 금의 차인을 만나 보았다. 금의 차인이 한(汗)의 글 3장을 내어 보였는데, 한 장은 춘신사(春信使)의 문안에 관한 글이었고 한 장은 국상의 조위(吊慰)에 관한 글이었으며, 한 장은 제를 올릴 때 쓸 물품의 목록이었다. 또 두 개의 봉서(封書)가 있었는데, 한 봉투에는 금국집정팔대신(金國執政八大臣)이라고 썼고, 한 봉투에는 금국외번몽고(金國外藩蒙古)라고 썼으며, 뒷면에는 모두 봉서조선국왕(奉書朝鮮國王)이라고 쓰여 있었다. 제관이 이것이 누구의 글이냐고 묻자, 답하기를,
"팔고산(八高山) 및 몽고의 여러 왕자의 글이다."
하였다. 제관이 말하기를,
"인신의 처지로 다른 나라 임금에게 글을 보내는 규례는 없다. 이웃 나라 군신은 일체(一體)로서 서로 공경하는데 어찌 감히 대등한 예로 글을 보낸단 말인가."
하고, 물리치고 보지 않으니, 용호 등이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우리 한께서는 정토하면 반드시 이기므로 그 공업이 높고 높다. 이에 안으로는 팔고산과 밖으로는 제번(諸藩)의 왕자들이 모두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자, 우리 한께서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각각 차인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온 것이다. 그런데 어찌 받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서달이 일시에 한목소리로 말하기를,
"명나라가 덕을 잃어 북경만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금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 귀국이 금나라와 의를 맺어 형제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한이 황제 자리에 오른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처럼 굳게 거절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이에 제관이 군신간의 대의로써 물리치자, 용호가 성이 나서 고산 등의 봉서를 도로 가져가며 말하기를,
"내일 돌아가겠다. 말을 주면 타고 갈 것이고 주지 않으면 걸어서 가겠다."
하였다. 이때 조정에선 한창 회답할 일에 대해 의논 중이었다.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
"금의 차인이 청한 것은 참으로 매우 놀랍고 통탄스러운 말입니다. 대의가 있는 것이 청천 백일과 같아서 삼척 동자에게 물어보아도 반드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비국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겠으며 성상의 영특하신 결단이겠습니까. 그러나 물음에 답하고 서신에 답할 즈음에 준절한 뜻을 보이지 못하고 혹시라도 우물쭈물하며 구차한 말을 하면 저들은 반드시 이를 구실로 삼아 말하기를 ‘조선도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한번 말을 잘못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서달의 경우는 당초 중국을 배반했으니, 이는 부모의 원수입니다. 비록 관문을 닫고 배척하여 끊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종호(從胡)의 예로 대우해서 반역자는 동맹국 신사(信使)의 반열에 끼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이 비록 겉으로는 성내는 빛을 보이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의롭게 여길 것입니다.
수신(帥臣)이 직책을 잘 이행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마는, 그 직책을 맡겼으면 마땅히 그에 대한 효과가 있도록 책임지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독하는 데 어찌 다른 사람이 없기에 아직도 내려 보내지 않습니까? 【 이때 김자점이 산릉 제조로 능소(陵所)에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리고 체부(體府)의 설치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변방의 흔단이 이미 생겼는데, 어찌하여 시임, 원임 중에서 군사의 일을 조금 아는 자로 한 사람을 가려서 체부을 열고 그 일을 위임시키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5면
- 【분류】외교-야(野)
○己亥/金差龍骨大等入京。 句管所諸官, 入見金差, 金差出汗書三張示之, 一則春信問安, 一則國恤致弔, 一則致祭物目也。 又有二封書, 一則面題金國執政八大臣, 一則面題金國外藩蒙古, 而皆以奉書朝鮮國王, 書之。 諸官問是誰書, 答曰: "八高山及蒙古諸王子書也。" 諸官曰: "人臣無致書君上之規。 隣國君臣, 一體相敬, 何敢抗禮通書乎?" 却而不見, 龍胡等變色曰: "我汗征討必捷, 功業巍隆, 內而八高山, 外而諸藩王子, 皆願正位, 我汗曰: ‘與朝鮮結爲兄弟, 不可不通議’ 云, 故各送差人, 奉書而來, 何可不受?" 西㺚一時齊聲曰: "天朝失德, 只據北京。 我等歸附金國, 當享富貴。 聞貴國與金結爲兄弟。 意謂聞之必喜, 而牢拒至此, 何耶?" 諸官以君臣大義斥之, 龍胡怒, 還取高山等封書曰: "明當發行。 給馬則騎去, 不給則步往" 云。 時, 朝廷方議回答。 大司諫鄭蘊上疏曰:
金差所請, 實是大愕極痛之言也。 大義所在, 如靑天白日, 雖問之三尺童子, 亦必能言之, 況備局群議乎, 聖明英斷乎? 然於答問、答書之際, 不能示之以峻截, 或有低回苟且之語, 則彼必藉口以爲: "朝鮮亦不以爲不可也。" 一失其辭, 萬事瓦裂。 至於西㺚, 初叛中國, 是父母之賊子也。 雖不能閉關斥絶, 只當待以從胡之例, 以明叛逆之俘, 不可齒於與國信使之列。 彼雖外示怒色, 其心則未必不以爲義矣。 帥臣之稱職與否, 非臣所敢知, 而旣委其任, 當責其效。 山陵董役, 豈無他人, 而尙不下送乎? 【時, 金自點以山陵提調, 在陵所, 故云。】 且體府之設, 其來久矣。 邊釁已開, 何不擇於時原任中稍知兵事者一人, 開府委任乎?
上嘉納之。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25면
- 【분류】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