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황이 백성의 궁핍한 생활을 보고, 허례 허식 금지·군제 강화 등 구활 계책을 상소하다
대사간 윤황이 상소하기를,
"신이 관서 지방에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생민들이 도륙당하는 것과 군량이 떨어진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돌아와 급함을 구제할 계책을 주달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종묘의 악무(樂舞)를 정지하고 여러 관사의 필요치 않은 경비를 줄여서 군량에 보충하게 하소서.
아, 나라의 대사는 제사와 전쟁에 있습니다. 태묘의 주악이 어떠한 대례입니까. 신이 풍병이 들고 본 정신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종묘의 주악을 철폐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반드시 종묘의 주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대개 종묘의 주악을 철폐하면 어선(御膳)도 반드시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어복(御服)도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고, 내수사와 내탕고의 물건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환관과 궁첩들도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진상을 파할 수 있고, 공물을 줄일 수 있어 이를 미루어 나간다면 온갖 헛된 경비를 일체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위태로움이 변하여 편안하게 되는 것이 이 한번의 착수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태평할 때에는 재물이 넉넉하여 향사(享祀)의 예를 아주 풍성하게 갖추어 심지어는 오향(五享)의 대제를 이미 종묘에 행하고서 또 능침에까지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덤의 체백(體魄)을 편하게 모시고 사당에 제사하는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비록 평상시일지라도 번독스럽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능침에 오향을 올리는 일을 파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수를 공상(貢上)009) 하게 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외방의 물품은 비록 깨끗하다 하더라도 쓸 수 없으며 자성(粢盛)으로 쓰는 것은 아주 적은데 민간에서 내는 것은 아주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공물을 다 혁파하고 시장에서 사서 쓰게 한다면, 향사는 궐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는 덜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진헌하는 물건에 있어서도 그 폐단이 제향에 쓰는 공물의 폐단과 동일하니, 감히 감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공물을 모두 파하고 시장에서 사다가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공(御供)에 이르러서는 바로 전하께 관계된 것입니다. 일체 견감해 버린다고 하더라도 어찌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입을 것이 아름답지 않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복용(服用)을 완호하심이 반정 초년과 크게 달라졌습니다. 공상하는 종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반정 초엽에는 초주지(草注紙)를 올려다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종이의 품질이 좋은 것이 태평할 때보다도 지나쳐서 종이 한 권의 값이 목면 10필이나 됩니다. 이것으로써 전하께서 검약하는 마음이 게을러졌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군들의 제택에 있어서도 굉장하고 화려함이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이 참으로 어떤 때인데 이처럼 지나치게 한단 말입니까. 지난번 헌부가 제도에 넘치는 집에 대하여 논의했었는데 김상헌(金尙憲)같이 강직한 자도 오히려 감히 곧바로 논척하지 못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극기하는 마음이 해이해졌음을 알겠습니다.
사옹원의 어전(漁箭)과 상의원의 직조(織組)와 공작(工作) 등의 일에 이르러서도 백성의 재물을 축내고 힘을 낭비하는 것이 그 얼마나 되는지를 모릅니다. 이것은 유사가 감히 청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상의 결단이 어떠하시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외방에서 진상하는 물건은 먼 지방에서 오기 때문에 맛이 변질되어 대부분 먹을 수 없는데, 그 때문에 끼쳐지는 민폐는 끝이 없습니다. 이에 손에는 진상을 들고 말에는 인정물(人情物)을 싣고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공조에 이르러서는 기인(其人)의 피해가 공물의 폐해보다 심합니다. 때문에 가포(價布)가 평시보다 곱절은 많습니다. 이는 대개 평시에는 전하를 모시는 귀빈(貴嬪)들이 모두 판방(板房)에 거처했었는데, 지금은 궁중의 하례들도 모두 온돌방에 거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복시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은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겨집니다. 예로부터 나라에서 말을 기른 것은 전쟁에 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사복시와 외사복시에서 기르는 것과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맡아 기르는 것, 여러 섬에 방목하여 기르는 것이 그 수가 몇 천 필인지 알 수 없고, 제원(諸員)들이 내는 가포와 마료가(馬料價)·마초가(馬草價) 및 각처의 둔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그 숫자가 아주 많은데, 일찍이 한 필의 말과 한 끝의 포도 전쟁용으로 쓴 적이 없고 상사(賞賜)의 자료로 삼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신은 내구(內廐)에서 관리하는 어승마(御乘馬) 10여 필을 제외하고는 그 말을 모두 가져다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전곡을 거두어다가 군사들을 양성하는 데 썼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로움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이 호조의 문안(文案)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반록(頒祿)과 산료(散料) 및 기타 1년 비용이 쌀 10만 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도에서 현재 사용되는 전결 및 3도에서 새로 측량한 것을 상고해 보니 18만 결이 넘었으며, 1년에 조세로 들어 오는 것이 모두 15만∼16만 석이었습니다. 거기서 별수미(別收米)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13만∼14만 석은 됩니다. 10만 석의 경비를 제외하고도 3만∼4만 석이 남으며 또 자질구레한 비용을 깨끗이 없애고도 1만여 석의 여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남은 것을 가져다 공물의 값으로 충당을 한다면 제향에 쓰고 사대에 쓰고 어공에 쓰더라도 반드시 부족할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원세(元稅) 외의 각양의 잡부(雜賦)를 모두다 면제해 주고 매 1결당 쌀 5두와 포 1필만을 거두어 양병(養兵)의 자본으로 삼는다면, 군사의 양식이 남아돌고 병사의 힘이 저절로 강해질 것입니다.
신이 군사정책을 보건대 더욱더 형편이 없습니다. 곤수와 변장이 된 자가 각기 제색 군병에게 방수(防守)를 면제해 주고 가포를 징수하기 때문에 비록 부민이라도 한번 그 군역에 예속되면 가산을 탕진한 채 도망하여 그 책임이 이웃과 친족에게 미치므로, 한 촌락이 폐허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각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에 이르러서는, 군적에 편입된 농민은 의복과 양식을 스스로 준비해야 하며, 겸하여 잡역을 제공해야 하므로 스스로 보존할 수가 없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났을 때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신은 각색의 정군(正軍) 및 출신, 새로 뽑은 아병(牙兵)과 속오 가운데 정예병을 엄격히 가려 뽑은 다음 신역을 면제해 주고 의식을 넉넉하게 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병사가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도록 하고, 각각 장령(將領)을 가려 번을 나누어 조련하도록 하고는 10결에서 거두는 미포(米布)로 1명의 병졸을 기르게 한다면, 팔도를 통틀어 7만∼8만의 병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이 7만∼8만의 정병으로 험지에 웅거하여 요새를 지킨다면 남쪽의 왜적과 북쪽의 오랑캐를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우리 나라는 사방이 수천 리로서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기가 저 오랑캐에 비해 곱절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단지 강도(江都)만을 보장의 지역으로 여겨 궁궐을 수축하고 창고를 채워 피란할 계획만 하고 있으니 임시만 편안하게 지내려는 계책은 제대로 세웠다고 하겠으나, 팔도의 백성들은 어찌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신하가 스스로 극진하게 해야 할 것은 임금과 어버이의 초상으로, 이 일에 부족함이 있으면 불충이요 불효라고 여깁니다. 다만 우리 나라가 전성하던 때에는 국장(國葬)에 쓰는 의물(儀物)이 천박하고 화려한 것이 많았는데, 그것을 그대로 등록(謄錄)에 실었기 때문에 감히 변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미 분정하여 견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쓴 것을 분명하게 조사해서 저축되어 있는 남은 물건을 국용에 보충하는 것으로 등록을 다시 만들어 후래의 법으로 삼는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건원릉(健元陵)은 바로 개국하신 태조의 능입니다. 지금의 석물(石物)도 의당 건원릉의 것보다 좀 작게 만들어서 낮추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억측을 밝은 것으로 여기시어 화를 내며 편벽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에 말이 승여(乘輿)에 미치면 업신여기는가 의심하시고, 일이 궁액에 관계되면 불경한가 의심하시고, 논의가 권귀에 미치면 경알(傾軋)하는가 의심하시며, 관리의 간사함을 논핵하면 부실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시며, 재이(災異)에 대해 진달하면 견강 부회하는가 의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말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정 밖의 분부가 있기까지 하여 말한 자를 견책하고 배척하여 쫓아내면서도 조금도 고려하거나 용서함이 없습니다. 이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다 의심을 품은 나머지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르기만을 힘쓰고 있으니, 신은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한 충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일은 모두 백성을 구활하는 계책이니 마땅히 채택하여 시행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23면
-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국용(國用) / 재정-상공(上供)
- [註 009]공상(貢上) : 지방에서 진상함.
○乙酉/大司諫尹煌上疏曰:
臣奉使關西, 目見生民之屠戮, 兵食之匱竭, 歸奏救急之策。 請停宗廟樂舞, 諸司浮費, 以補軍餉。 噫! 國之大事, 在祀與戎。 太廟奏樂, 是何等大禮? 臣雖病風喪心, 豈不知廟樂之難撤? 第必以廟樂爲言者, 蓋廟樂旣撤, 則御膳必不求甘, 御服必不求美, 內需、內帑, 不得不出; 宦官、宮妾, 不得不減, 進上可罷, 貢物可除, 推此以往, 則百爲浮費, 一切蠲省, 而轉危爲安, 在此一着故也。 我國昇平之時, 物盛財阜, 祀享之典, 極其豊備, 至於五享大祭, 旣行於宗廟, 又行於陵寢, 是誠有違於墓藏、廟祭之義。 雖在平時, 不免爲煩瀆之歸, 陵寢五享之罷, 無可疑者矣。 且祭需上貢之弊, 有不可勝言者。 外方之物, 雖極精蠲, 不得自售, 供於粢盛者至少至鮮, 而出於民間者至重至煩。 臣意以爲, 悉罷貢物, 市貿以用, 則享祀無闕, 而民弊除矣。 至於進獻之物, 其弊同於祭享, 雖不敢有所減損, 亦宜悉罷貢物, 而市貿也。 至於御供, 是在殿下。 雖一切蠲除, 何患乎食不足, 而衣不美乎? 服用、玩好, 大異初年。 以供上紙一事言之, 反正初, 以草注進用, 而今則紙品之好, 過於平時, 一卷之直, 至木綿十匹。 臣以此, 知殿下守約之心怠矣。 且大君第宅, 極其宏麗。 此誠何時而擧贏若是乎? 頃日憲府之論踰制家舍也, 剛方如金尙憲者, 猶不敢直斥。 臣知殿下克修之心弛矣。 至於司饔之漁箭, 尙方之織組工作等事, 其所以耗民財, 而費民力者, 不知其幾。 此非有司之所敢請, 只在聖斷之如何耳。 且外方進上, 遠來失味, 多不近口, 而其爲民弊, 罔有紀極, 乃有 "手持進上, 馬載人情" 之諺。 至於工曹其人之害, 甚於貢物, 故其價布之多, 倍於平時。 蓋平時則尙御貴嬪, 皆處板房, 而今則宮中下賤, 盡處溫堗故也。 至如司僕寺事, 臣竊怪焉。 自古有國之養馬者, 爲戰用也。 今日太僕內外司所養, 各官分養, 諸島牧養者, 不知其幾千匹, 諸員價布、馬料、草價, 各處屯田之穀, 其數鉅萬, 而曾未有一匹馬、一端布及於戰用, 不過爲閑漫賞賜之資。 臣意以爲, 內廐御乘十數匹外, 悉取其馬, 以給戰士, 收其錢穀, 以養戰士, 則其爲利益, 豈淺淺哉? 臣取考戶曹文案, 則頒祿、散料及他一年費用, 不過米十萬餘碩矣。 且考五道時用田結及三道新量, 加出十八萬結, 一年稅入, 竝十五六萬。 雖除別收米, 猶不下十三四萬。 十萬碩經費之外, 尙餘三四萬碩, 又蕩滌冗費, 則亦可得萬餘碩。 取其所餘, 以充貢物之價, 則以祭享、以事大、以御供, 必無不足之患矣。 元稅外各樣雜賦, 悉皆蠲免, 每田一結, 只收五斗米、一匹布, 以爲養兵之資, 則軍食有餘, 而兵力自强矣。 臣竊觀兵政, 尤極無形。 爲閫帥、邊將者, 各以諸色軍兵, 除防徵布, 故雖富民, 一隷其役, 則傾貲破産, 繼之以逃, 侵及隣族, 一村爲墟。 至如各官束伍, 則編籍農民, 自備衣糧, 兼供雜役, 不能自保, 雖有百萬, 何賴於緩急? 臣意以爲, 就各色正軍及出身、新選牙兵、束伍中, 極擇精銳, 免其身役, 贍其衣食, 使民樂於爲兵, 各擇將領, 分番操錬, 以十結所收米布, 養一卒則通八路, 可得七八萬兵。 以七八萬精兵, 據險守要, 則何患乎南倭、北虜哉? 嗚呼! 我國方數千里, 土地之廣、人民之衆, 倍於彼虜, 而只以江都爲保障之地, 築宮闕、充府庫, 以爲避亂之計, 其於姑息、偸安得矣, 奈八路生靈, 何哉? 臣且伏念, 臣子之所當自盡者, 君、親之喪, 於此而有所欠闕, 則不忠、不孝矣。 第我國全盛之日, 國葬儀物, 率多浮華, 因載《謄錄》, 莫敢變通。 今雖已分定, 無及於蠲減, 猶當明覈實用, 而留儲餘物, 以補國用, 改成《謄錄》, 以爲後來之法, 豈不幸甚? 健元陵, 是開國太祖之陵也。 今之石物, 亦宜差小於健元陵, 以示謙約之意。 臣竊覵殿下, 臆逆爲明, 忿懥而僻, 故言及乘輿則疑其倨侮, 事涉宮掖則疑其不敬, 論及權貴則疑其傾軋, 糾劾官邪則疑其不實, 指陳災異則疑其附會, 非特不用其言, 至有情外之敎, 譴責之、斥逐之, 略無顧藉。 在廷之臣, 咸懷自疑, 務爲含糊巽懦之道, 臣不勝痛歎焉。
答曰: "嘉爾爲國之忠。 所陳之事, 無非救民之策, 當採施焉。"
-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6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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