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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 5월 11일 경신 1번째기사 1635년 명 숭정(崇禎) 8년

관학 유생 송시형 등 2백 70여 명이 성혼과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다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백 70여 명이 상소하기를,

"도학(道學)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선유(先儒)는 백대의 종사(宗師)입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제왕 가운데 사문(斯文)에 뜻을 둔 사람치고 선유를 숭장(崇奬)하여 도학을 흥기시킬 바탕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문묘에 봉향하고부터 후세의 선비로서 사문에 공이 있는 자는 으레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신라에서는 최치원(崔致遠)·설총(薛聰), 고려에서는 안유(安裕)·정몽주(鄭夢周), 본조에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다섯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사람입니다. 명종·선조의 시대에 와서는 이황을 뒤이어 유림의 종사(宗師)가 된 이가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입니다.

이이는 천품이 매우 뛰어나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도(道)를 구할 뜻을 품고 비루한 속학(俗學)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이교(異敎)를 드나들었으나, 이윽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반성을 하였으니, 단 한 번의 변화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 그의 도학은 지(知)와 행(行)이 겸비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도학으로 꽉 찼었습니다. 따라서 정미한 도체(道體)를 진작 의심없이 환히 꿰뚫어 보았음은 물론, 또한 그 규모가 굉원(宏遠)하고 체용(體用)이 완비되어, 임금을 선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전성(前聖)을 이어받아 후학을 계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 성인의 경지에 도달을 못할지언정 소성(小成)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정(程)·주(朱)의 진맥(眞脈)을 깊이 체득한 데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저술에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배우는 자의 일용 공부에 더없이 절실하거니와, 《성학집람(聖學輯覽)》은 제왕이 닦아야 할 학문의 요점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또 《동호문답(東湖問答)》은 분명한 체(體)와 적절한 용(用)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에 대한 여러 글들은 여러 선유(先儒)들이 아직 확정하지 못한 논리를 단정하기에 족합니다. 이러한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이를 상고하여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정에 들어온 이래 좀처럼 나오지 않고 늘 물러나 있기만 하다가 늦게서야 선조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서 계미년012) 변란 때 병조 판서를 위임받았습니다. 굉원한 계책이 치밀하고 동작마다 기의(機宜)에 들어맞아서 선조께서 거는 기대가 갈수록 커지니, 소인배들의 시기가 더욱 가중되어 보이지 않는 모함과 드러난 배척으로 기어코 헤아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명의 통철한 지감을 힘입어 사(邪)와 정(正)은 저절로 판명되었으나, 불행히도 복이 없어서 배운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뜻있는 선비들은 오늘날까지도 통한스러워하는 바입니다.

신(臣) 성혼은 천품이 돈후하고 장중하여 독실히 배우고 힘써 실행하여 동정(動靜)과 어묵(語默)에 있어서 한결같이 《소학(小學)》·《가례(家禮)》로 준칙을 삼았으며, 소신의 엄정함은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고 효제의 품행은 신명과도 통할 만하였으며, 덕기(德器)가 성취됨에 따라 표리가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신 이이가 그의 독실한 면은 미칠 수 없다고 매번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이이와 사귀며 절차 탁마하였는데, 서로 뜻이 맞고 도가 통하였습니다. 그 뒤 이이는 벼슬에 진출하여 세도(世道)를 담당했고, 성혼은 시골에 묻혀 살면서 비록 은지(恩旨)에 쫓겨서 이따금 연하(輦下)에 나아오기는 하였으나, 그의 속마음은 늘 산야를 잊지 못하였습니다.

계미년에 이이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았을 당시 성혼은 서울에 와 있으면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호했다가 드디어 한쪽편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를 입었고 나중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추악한 비난을 받아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선왕의 거룩한 마음으로도 끝내 보존해 주지 못하여, 황천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지가 벌써 수십 년째입니다. 우리 성명께서 등극하시어 비로소 신원되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이 흥성하느냐, 침체되느냐 하는 일대 기회로써 그 사이에 어찌 가로 막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 두 사람은 오현(五賢)을 뒤이어 태어나서 도학을 강명(講明)하여 오묘한 이치를 발휘하였습니다. 무릇 이기 이합(理氣離合)·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의 학설은 여러 선유들의 논리와 서로 득실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하여 분석해 보면 귀추에 가서는 가려진 것을 밝히고 빠진 것을 보완하여 아직 개발되지 않은 것을 확충하고 아직 미치지 못한 곳을 바로잡았으므로 동방 이학(理學)의 근원이 여기에서 자못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으니, 참으로 거룩하다 할 만합니다.

대저 두 신이 우리 도학에 있어 그 공덕이 이와 같은데도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은 여태 소식이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들의 죄이자 또한 성세(盛世)의 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금 성화(聖化)가 다시 새로워지고 있음을 만물이 다 함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참으로 사풍(士風)을 고무시켜서 도맥(道脈)을 배양할 일대 기회이기에, 신들이 감히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문(斯文)의 지중함을 깊이 생각하고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두 유신의 문묘 종사를 의정케 하신다면 그 다행스러움 이루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은 비록 착한 사람이기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으니, 막중한 문묘 종사의 예전을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이는 도학이 고명하고 성혼은 품행이 독실하여 참으로 백대의 유종(儒宗)이라 할 만하니, 문묘 종사의 논의는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으로 한번 알력이 생긴 뒤부터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고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속속 일어나서 왕왕 유언 비어를 지어 내어 비방, 중상할 계책으로 삼았다. 상의 하교에서 이른바 도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말도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시형 등은 시세도 헤아려 보지 않고 노유(老儒)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부질없이 소회를 개진하였다가, 선대의 대현으로 하여금 도리어 소인배들의 추악한 헐뜯음을 받게 하였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9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편사(編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庚申/館學儒生宋時瑩等二百七十餘人上疏曰:

道學, 國家之元氣; 儒先, 百代之宗師。 是以, 古昔帝王, 留意於斯文者, 莫不崇奬儒先, 以爲興起道學之地。 自先聖、先師享廟宮之專祀, 後儒之有功斯文者, 例得從食於兩廡。 其在我東, 於則有若崔致遠薛聰, 於則有若安裕鄭夢周, 於本朝則有若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等五臣者, 皆其人也。 當之際, 繼李滉而爲儒林所宗者, 有二人焉, 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是已。 李珥天資極高, 穎悟絶世, 其在童年, 已有求道之志, 厭俗學之卑陋, 泛濫百家, 出入異敎, 旣而翻然反求, 一變至道, 知行兼進, 足目俱到。 其於道體精微, 固已洞澈無疑, 而規模宏遠, 體用充備, 以致君澤民, 繼往開來爲己任。 寧學聖人而未至, 不肯自安於小成, 蓋深有得於眞路脈者也。 其見於著述者, 《擊蒙要訣》, 極切於學者日用功程, 而《聖學輯覽》, 備盡帝王學問之要, 不下於《大學衍義》, 《東湖問答》, 可以見明體、適用之實, 而四端七情諸書, 足以斷諸儒未定之論。 其書具在, 可考而知也。 立朝以來, 多退少進, 晩被宣廟殊眷, 當癸未之變, 受委本兵, 訏謨密勿, 動合機宜, 宣廟倚注彌重, 益爲群小所忌, 陰搆顯斥, 必欲置之不測。 幸賴聖鑑洞燭, 邪正自別, 不幸無祿, 未克畢展所學, 有志之士, 至今痛恨。 臣成渾, 敦厚莊重, 篤學力行, 語默動靜, 一以《小學》《家禮》爲準則, 操守之嚴, 不愧屋漏; 孝悌之行, 可通神明, 德器成就, 表裏如一。 故臣李珥, 每稱其篤實, 以爲不可及。 早與臣李珥定交, 講劘切磋, 志同道合。 則出當世道, 而則屛處丘園, 雖迫於恩旨, 時詣輦下, 然其雅志, 長在山野。 及癸未年間, 臣李珥爲群小所搆, 時在洛下, 上章伸辨, 遂爲一邊人所仇嫉。 初中李弘老之巧譖, 卒被鄭仁弘之醜詆, 使先王好賢之盛心, 不得保全終始, 抱冤泉壤, 幾數十年。 逮我聖明當宁, 始得昭雪, 嗚呼! 此實斯文隆替之會, 夫豈容人力於其間哉? 臣等竊念, 此二臣者, 生五賢之後, 講學明道, 發揮幽眇。 凡理氣離合、四端七情等說, 諸儒所論, 互有得失, 而反復辨難, 極其歸趣, 能使晦者復明, 缺者復完, 擴其所未發, 匡其所不逮, 東方理學源委, 於是乎, 殆無遺憾, 可謂盛矣。 夫二臣者之於斯道也, 其功其德, 有如是者, 而崇報之典, 尙今寥寥, 此誠臣等之罪, 抑恐爲盛世之欠事也。 方今聖化維新, 萬物咸覩, 此誠鼓舞士風, 培植道脈之一大機會也。 臣等玆敢冒死上請, 伏願聖明, 深思斯文之至重, 俯察多士之血誠, 亟命有司, 議定二儒臣從祀文廟之典, 不勝幸甚。

答曰: "文成公 李珥 文簡公成渾, 雖曰善人, 道德未高, 疵累有謗, 莫重從祀之典, 決不可輕議矣。"

【史臣曰: "李珥之道學高明, 成渾之踐履篤實, 眞可謂百世之儒宗, 則從祀之論, 固不可無, 而一自黨論傾軋之後, 媢賢醜正之徒, 相繼而起, 往往造爲飛語, 以售謗傷之計。 上敎所謂道德未高, 疵累有謗云者, 安知非出於先入之言也? 時瑩等不度時勢, 不咨諸老, 妄陳所懷, 使旣往之大賢, 反被群小之醜詆, 可勝嘆哉?"】


  • 【태백산사고본】 31책 31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9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편사(編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