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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9권, 인조 12년 3월 13일 기해 2번째기사 1634년 명 숭정(崇禎) 7년

이문웅 등이 이수백의 머리를 베어 와서 상소하다. 이에 대한 처벌 논의

고(故)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이문웅(李文雄)·이문위(李文偉)박영신(朴榮臣)의 아들 박지병(朴之屛)·박지원(朴之垣)·박지번(朴之藩) 등 5인이 이수백(李守白)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대궐에 나와 상소하기를,

"신 등은 갑자년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 때 국사에 목숨바친 신(臣) 청홍군 이중로, 풍천 부사(豊川府使) 박영신의 아들입니다. 이수백은 신의 아비가 저탄(猪灘)에서 전사하던 날 쌓인 시체 속에서 신의 아비를 찾아내어 머리를 베어 가지고 역적 이괄한명련(韓明璉)에게 가서 공을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 여러 장수의 머리를 원수(元帥)가 있는 곳에 보내어 그들이 사기를 잃게 하라.’고 하자, 이괄이 그의 계책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의 아비 영신은 이가 부러지고 혀가 잘렸는데, 이는 모두가 수백이 한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그를 사지(死地)에서 특별히 용서하여 흉악한 자의 목숨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신들은 뼈가 저리고 가슴 아파하면서 11년 동안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다행스럽게도 길에서 만나 쳐죽였는데, 비록 하늘에 사무치는 개인적인 원한을 씻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살인한 죄를 면하기는 어려우므로 신들은 감히 스스로 숨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형관에게 내려 신들의 죄를 다스리게 하여 신들로 하여금 지하에 가서 선신(先臣)을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유사가 마땅히 법대로 처치해야 할 터인데 대신에게 미룬단 말인가. 금부로 하여금 나국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금부가 문웅·문위·지병·지원·지번 등을 안문(按問)하여 아뢰니,

답하기를,

"반신 적자(叛臣賊子)가 궁지에 몰리자 와서 항복하였는데, 그와 원수진 사람이 감히 보복하지 못하는 것은 국법이 있기 때문이다. 원수진 사람이 임의대로 죽이기를 모두 문웅 등이 한 것처럼 한다면, 어찌 귀순하는 자가 있겠으며 또한 괴수의 머리를 베어 살기를 도모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가 비록 하늘에 치솟는 죄악이 있더라도 조정에서 이미 공이 있다 하여 목숨을 살려주고 상을 베풀기까지 하였다면 원수진 사람으로서 함부로 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낮에 도성 안에서 떼를 지어 살육하고 머리를 베어 들고 대궐에 나왔으니 매우 놀라운 일일 뿐더러 뒷폐단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치하되, 사사로운 정에 동요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류가 의논드리기를,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천지 만고의 대법이니 피살자의 공과 죄는 논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수백이 죄는 있고 공은 없더라도 문웅 등의 죄를 감할 수 없고, 수백이 공은 있고 죄는 없더라도 문웅 등의 죄가 무거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비를 위하여 복수한 자들이 많았는가 하면 역대 제왕이 법을 굽혀 용서해 준 일도 많았습니다. 옛날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회양(淮陽)사람 상응화(常應和)가 그 고을 태수 성안락(成安樂)을 죽이고 성을 바쳐 내부(內附)해 오자 무제(武帝)가 공이 있다고 여겨 상을 주었는데, 안락의 아들 성경준(成京寯)이 사람을 사서 찔러죽이고 그의 처자식까지 죽여 씨도 남기지 않았으나, 무제는 의롭다 하여 석방시켰습니다. 우리 광묘조(光廟朝)006) 에서도 신용개(申用漑)의 아버지가 함길도 감사(咸吉道監司)로 있을 적에 이시애(李施愛)의 도당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 뒤 용개가 대낮에 도성 복판에서 아비의 원수를 칼로 베어 머리를 들고 대궐에 나아가 목숨을 빌자 성묘(成廟)께서 끝내 용서하였습니다. 공이 있는 자를 멋대로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경준의 일이 근사하고, 도성에서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한다면 용개의 일과 근사한데, 이 두 가지로 논하면 문웅의 죄가 어디에 해당되는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중로·박영신은 충신이고 이수백은 역적인데, 충신의 아들이 한 역적을 죽인 것을 법으로 다스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윤기(綸紀)를 부식하고 절의를 숭상하는 도리에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위로는 조정 신하로부터 아래로 여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소문을 듣고 손뼉을 치며 그 의리를 높게 여겨 말하기를 좋아하니, 인정이 같은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윤방은 의논드리기를,

"삼가 어제 판부하신 내용을 보건대, 국법을 엄하게 하고 후환을 염려하신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성인의 한 말씀이 바로 만세의 금방(禁防)을 세우는 것입니다. 수백의 죄에 대해서 이미 그의 죽음을 용서해 준 이상 멋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로 등이 국사를 위하여 죽었으니 그 아들이 복수한 일에 대해서도 상례로 논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복수의 한 가지 일은 윤기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경(經)에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의리를 말하였는가 하면 율(律)에는 일정한 조문(條文)이 없습니다. 따라서 경에는 그 의리를 분명하게 말하였는데 율에는 그 조문이 아예 없으니, 옛 성현이 의리를 말하고 율을 만드는 데 있어 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문웅 등의 죄를 특별히 용서해 줌으로써 자식들에게 효도를 권면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오윤겸(吳允謙)은 의논드리기를,

"수백을 베지 않는 것은 일시적으로 뒷일을 염려한 계책이고 아들로서 아비의 원수를 보복하는 것은 만고의 떳떳한 의리인데, 어떻게 일시의 뒷일을 염려하는 계책으로 만고의 떳떳한 의리를 손상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문웅 등의 의열(義烈)에 대해서는 법을 굽혀 용서해 줌으로써 국가의 원기를 부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옛날에 장심소(張審素)는 장오죄를 범했다는 것으로 고발을 당했는데 어사 양왕(楊汪)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가서 안찰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심소의 두 아들인 장황(張瑝)·장수(張琇)도 연좌되어 영외(嶺外)로 유배갔었는데, 양왕이 억울하게 죽인 것에 대해 늘 통분해 하다가 몰래 도망쳐 돌아와 도성 안에서 양왕을 죽였습니다. 양왕심소를 죽인 것은 조서를 받들고 가서 안옥(按獄)한 것이고 ·양왕을 죽인 것을 망명(亡命)하여 제멋대로 죽인 것이니, 법률로 논할 경우 죄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장구령(張九齡)이 그들을 살리려 하였지만 이임보(李林甫)·배요경(裵耀卿)이 법을 무너뜨렸다 하여 끝내 죽였는데, 당시 사민들이 가엾게 여겨 애뇌(哀誄)를 짓고 돈을 거두어 장사지냈으니, 인정의 소재를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유(先儒) 호치당(胡致堂)장구령이 살리려고 한 것은 옳다고 하였습니다. 수백이 역적 이괄의 척후였는데 이중로 등이 그에게 살해되었으니, 수백중로를 죽인 것은 양왕심소를 죽인 것과 다르고, 문웅이 아비 원수를 갚은 것은 ·와 같이 망명한 것도 아니고 불공대천의 의리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자신이 필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원수진 사람을 찔러 죽였다면 어려운 일이라 하겠지만,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이런 일을 하였다면, 한 필부를 죽이는 것이 무엇이 어려웠겠는가. 대체로 이런 일은 제멋대로 경솔하게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해조가 지나치게 비호하니, 국가의 체모가 이럴 수는 없다. 살인자는 본시 정해진 법률이 있으니 실로 경솔히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아비의 충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가벼운 율에 따라 결장하고 정배시키라."

하였다. 이에 문웅을 전주에, 문위익산(益山)에, 지병창평(昌平)에, 지번비안(庇安)에, 지원의성(義城)에 유배시켰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국편영인본】 34책 546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역사-고사(故事)

  • [註 006]
    광묘조(光廟朝) : 세조(世祖).

○故靑興君 李重老之子文雄文偉, 朴榮臣之子之屛之垣之藩等五人, 斬李守白之頭, 詣闕下上疏曰:

臣等甲子逆之變, 死事臣靑興君 李重老豐川府使朴榮臣之子也。 李守白, 當臣父戰死於猪灘之日, 閱視於積屍之中, 斬首要功於逆明璉曰: ‘送此諸將之頭於元帥處, 使喪其士氣’, 賊從其計。 且臣父榮臣, 則至於折齒、斷舌, 皆守白之所爲, 而國家特貸其死, 凶喘尙存, 臣等腐心痛骨, 共戴一天, 十有一載。 今者幸得窺於路, 而格殺之, 雖得以私洩窮天之痛, 而固難免擅殺之罪。 臣等不敢自隱, 乞下司敗, 以正臣等之罪, 使臣等歸見先臣於九地之下。

上下其疏於該曹, 該曹請議于大臣, 答曰: "有司所當執法處置, 而推諉於大臣, 令禁府拿鞫定罪。" 於是, 禁府按問文雄文偉, 之屛之垣之藩等以啓, 答曰: "叛臣賊子, 勢窮來降, 而其讐人不敢報復者, 以其有國法也。 讐人之任意屠殺, 若皆如文雄等所爲, 則人豈有歸順者, 亦豈有斬渠魁, 圖生之人哉? 彼雖有滔天之惡, 朝廷旣謂之有功而貸死, 至於施賞, 則有非仇人所敢擅殺而白晝都中, 成群殺戮, 提頭詣闕, 事甚駭異, 其後弊不可不慮也。 議大臣處置, 勿爲私情所撓。" 右議政金瑬以爲: "殺人者死, 通天地、亘萬古之大法也。 被殺者之功罪, 固不可論也。 使守白有罪無功, 文雄等之罪, 不當減也; 使守白有功無罪, 文雄等之罪, 不當加也。 自古及今, 爲父復讎者多矣。 歷代帝王, 屈法而宥之者亦多焉。 昔在 天監中, 淮陽常應和, 殺其太守成安樂, 擧城內附, 武帝以爲功而賞之。 安樂之子京雋, 購人刺殺, 竝其妻子而不遺噍類, 武帝義而釋之。 逮我光廟朝, 申用漑之父, 爲咸吉道監司, 被害於李施愛之黨。 其後用漑, 劍斬父讐於白晝都城之中, 提頭詣闕請命, 成廟竟赦之。 以言其擅殺有功者, 則京雋之事近之; 以言其戮人都市, 則用漑之事近之。 執此二者論之, 則文雄之當, 可以定矣。 李重老朴榮臣, 忠臣也; 李守白, 逆豎也。 忠臣之子, 殺一逆豎, 而置法抵死, 則其於扶倫紀、崇節義之道, 果如何歟? 上自薦紳, 下至閭巷, 莫不聞風抵掌, 高其義而樂道之, 人情所同, 斷可知矣。" 領議政尹昉以爲: "伏覩前日判付之辭, 其嚴國法慮後患之意至矣。 聖人一言, 亦足以立萬世之防禁。 守白之罪, 旣貸其死, 則難容擅殺, 而重老等死於國事, 其子之復讐, 亦不可以常例論之。 大抵復讐一事, 倫紀所關, 經垂不共之義, 律無一定之文。 丁寧其義於經, 而深沒其文於律, 古聖垂律, 實有深意。 執此而論之, 則文雄等之罪, 特爲原赦, 以勸人子之孝, 似乎得當。" 左議政吳允謙以爲: "不斬守白者, 一時慮後之計也; 子復父讎者, 萬古經常之義也。 豈可以一時慮後之計, 傷萬古經常之義乎? 臣之愚意, 文雄等義烈, 屈法而宥之, 以扶國家之元氣可也。 昔張審素被告犯贓, 御史楊汪, 承制按殺。 審素二子, 坐流嶺外, 常憤楊汪誣殺, 潛身逃歸, 殺於都中。 楊汪之殺審素, 承制而按獄也; 之殺楊汪, 亡命而擅殺也。 論以法律, 置罪宜矣, 而其時張九齡欲活之, 唯李林甫裵耀卿, 以爲壞法, 遂殺之, 當時士民憐之, 爲作哀誄, 斂錢葬之。 人情所在, 可見於此。 先儒致堂 胡氏, 亦以九齡之欲活爲韙。 守白爲賊斥堠, 李重老等爲其所殺, 則守白之殺重老, 與楊汪之殺審素有異; 文雄之復父讐, 無之亡命, 而有不共之大義。" 上下敎曰: "知其必死, 而刺殺讎人, 則可謂難矣; 知其必不死, 而有此擧措, 則殺一匹夫, 有何難哉? 大抵此事, 不可擅自輕議, 而該曹過加營救, 國家事體, 不當如是也。 殺人者自有法律, 誠難輕貸, 而其父忠義, 亦不可不念, 姑從輕律, 決杖定配。" 於是, 流文雄全州, 文偉益山, 之屛昌平, 之藩庇安, 之垣義城


  •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국편영인본】 34책 546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