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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8월 10일 기사 2번째기사 1633년 명 숭정(崇禎) 6년

《광해군일기》 도청과 낭청을 임명하다. 밀실 벽 속에서 발견된 이이첨의 서찰 내용

찬수청(纂修廳)이 아뢰기를,

"국(局)을 열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수정하다가 국휼(國恤)을 만났고 이어 국경에 사변(事變)이 있어서 그 《일기》강도(江都)020) 로 실어 보냈었는데, 지난번 포쇄(曝曬)하러 갔던 길에 이미 그 《일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도청(都廳) 두 사람을 전에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로 하셨는데, 장유는 신병으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으로 그를 대신케 하소서. 낭청은 이명한(李明漢)·이식(李植)·정백창(鄭百昌)으로 삼으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앞서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이 늘 광해군과 사적으로 서찰을 왕래했는데, 그 초본을 남겨 두었다가 밀실의 벽 사이에 감추어 놓고 밖에서 종이로 발라 벽처럼 해 놓았다. 그 후 그가 패망하자 시민들이 집을 헐어 내다가 그 초본이 나왔기 때문에 사관(史官) 임숙영(任叔英)이 그것을 수집하였으나 미처 기록하지 못하고 마침 딴 관직으로 전임하게 되어 검열(檢閱) 나만갑(羅萬甲)에게 부탁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그 글을 찬수청에 전송(轉送)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혹(鄭㷤)의 아낙이 김내(金琜)의 아내와 사촌간이라고 하니 이 역시 역적의 무리입니다. 어떻게 국혼(國婚)을 간택하는 일로 궁궐을 드나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종묘에 부제(祔祭)하는 일에 있어서는 신이 두세 차례나 회계하여 도감 설치에 대한 분부를 속히 내려 주시기를 주청하였습니다.

서인·남인 쪽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런 때에 누가 감히 말하겠습니까. 중자(中子) 【 이른바 ‘중자(中子)’라는 것은 중북(中北)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의 행적이 올바르지는 않지만 반드시 대북(大北)의 의논과 맞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요즈음 신의 동료들이 다행히도 성상의 은혜로운 등용에 힙입어 삼사(三司)에 들어 있는 자가 많으므로 사론(私論)이 빗발치고 있지만 굳이 염려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지나치게 염려하여 자주 하문하시니 신은 답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훈호(勳號)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의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원훈(元勳)에 관한 일은 한희길(韓希吉) 외에 더 참여했던 사람은 신도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초 박응서(朴應犀)가 올 때에 그 모의에 동참한 자는 김개(金闓)였다고 하기에 잡아들였는데, 그를 석방할 때에 또 힘써 아뢰어 변호하였던 사람은 바로 병조 판서였습니다. 이는 모두 성상께서 훤히 통촉하여 역력히 셀 수 있는 일입니다. 한희길은 신이 그 사건을 알고 있다고 하여 그가 와서 말해 줄 때 작은 쪽지에 몇 사람만을 적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인 박응호(朴應虎)김개를 배신하고 박이서(朴彛叙)에게 붙자, 무단히 형조에서 취초(取招)하여 박응호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만들어서 뒷날의 증빙 자료를 삼으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로 온 국민이 침뱉고 비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남이공(南以恭)의 무리들이 박응호한희길을 맞아들여 그들을 원훈 공신에 참여시키려고 도모한다 하니 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소북인(小北人)들은 박응호를 기화로 삼아 이미 노예 하천인에게 관상감(觀象監)의 정직(正職)을 제수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나서 이번에는 또 원훈 공신을 만들려고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소북인 한 떼가 모두 박응호의 턱밑을 우러러보며 모록(冒錄)021) 할 꾀를 생각하고 있다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고 간교합니다. 이의숭(李義崇) 무리가 때마침 신의 집에 들렀다가 저들의 하는 짓에 분개하여 큰소리를 지르기에, 신이 ‘그렇지 않다. 기축년 고변(告變)을 했던 조하(趙嘏)진(珒)의 역모를 기찰(譏察)했던 김위(金渭)와 같은 사람도 다 원훈 공신이 되지 못했는데, 더구나 박응호는 형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 잃었던 은(銀)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가 고변이나 역모를 알아내는 데 무슨 공로가 있겠는가. 훈신(勳臣)을 기록하는 문서에 성명이 오른 것만도 족하다고 하겠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부귀는 사람마다 누리고 싶은 것이지만 공을 다투는 데 있어서는 도무지 염치마저 잃어 버리고 있으며, 또 요즈음 여기에 분망(奔忙)한 무리들이 근거 없는 말을 많이 지어내어 요행을 꾀하려고 합니다. 이는 성명께서 얼마 만큼 통찰하여 명확하게 분변하시느냐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상께서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신 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궁궐을 건립하려는 일에 있어서는 온 국민이 이미 도읍을 옮기는 걱정을 면케 되었고 또 상이 거처를 옮기는 일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므로, 그들로 하여금 별궁(別宮)을 창건하게 하더라도 필시 원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마치 자식처럼 모여들어 일을 도울 것입니다.

동래(東萊)에서 체포한 적도를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하고 나서 역적 무리들이 칠성산(七星山) 산중에 깊숙이 숨어 있다는 설을 바야흐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토벌하고 포박하는 술책은 오로지 지방 장관에게 달려 있으니 이경전(李慶全)을 체직한 뒤 재략이 있는 자로 차송(差送)한다면 남쪽 지방도 과히 염려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경전은 백면서생으로서 본디 무사(武事)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 신이 올린 계사 내용 중의 ‘《문선(文選)》이백(李白)·두보(杜甫)의 시부를 강하여 인재를 시취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 아직도 판하(判下)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일반 여염집에서 공부하는 사자(士子)들이 모두 《문선》이백·두보의 시부를 주로 배우고 있어서 흥기(興起)하리라는 기대가 다분하기 때문에 아뢴 것이니, 이 공사(公事)를 속히 판하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조식(曺植)의 서원에 관한 일은 관학 유생(館學儒生)들도 비답을 빨리 내려 주시기를 몹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이 큰 경사에는 마땅히 증광시(增廣試)를 보여야 하겠습니다마는 좌의정과 병조 판서가 ‘별시(別試)를 치러서 인재를 많이 뽑는 것이 더 좋겠다.’ 하였기 때문에 당초 증광시를 즉시 주청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은 모두 두 경사를 합하여 증광시를 치르되 2월 중에 날짜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마는 오직 성상의 재결에 달려 있습니다. 을묘년022) 정월 25일."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3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註 020]
    강도(江都) : 강화도.
  • [註 021]
    모록(冒錄) :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기록함.
  • [註 022]
    을묘년 : 1615 광해군 7년.

○纂修廳啓曰: "《光海日記》設局修正, 而因遭國恤, 繼有邊警, 文書輸送于江都, 頃日曝曬之行, 旣已取來矣。 都廳兩員, 前以崔鳴吉張維啓下, 而張維有病不得察任。 請以禮曹判書洪瑞鳳代之, 而郞廳則以李明漢李植鄭百昌爲之。" 答曰: "依啓。" 先是, 賊臣李爾瞻, 常與光海, 私相通書, 留其手草, 藏于密室壁間, 外塗以紙, 若完壁焉。 及家敗, 都民毁其家, 其書乃出。 故史官任叔英得之, 未及錄, 適遷官, 屬檢閱羅萬甲, 至是, 轉送于纂修廳。 其書曰:

鄭㷤女子, 旣與金琜妻四寸, 則此亦逆屬也。 何可揀定國婚, 出入宮禁乎? 祔廟事臣再三回啓, 以請亟下設都監之命矣。 西、南雖有屋下之說, 而孰敢開口於此時乎? 中子跡雖不正, 必不能與大北之論相抗, 況近日臣之儕輩, 幸賴 聖明寵擢, 布在三司者多, 邪論橫生, 固不足慮也。 自上過慮, 屢勤下問, 臣不勝憂悶。 勳號以此用之, 果爲宜當。 元勳事, 韓希吉外, 加參之人, 臣亦未知。 但當初朴應犀來時, 有同參其謀者, 金闓也, 旣捕致, 欲放時, 又有力言啓達者, 兵判也。 此皆聖明所洞燭, 而歷歷可數也。 希吉以臣有所與知, 其時來言於臣, 書名於小紙者, 只若干人, 而厥後尸親朴應虎金闓, 附朴彛叙, 無端取招於刑曹, 以出應虎口吻者, 爲他日取信之地, 誠可駭也, 擧國莫不唾鄙。 近聞南以恭輩, 邀致應虎希吉, 欲圖渠之參於元勳云, 尤可笑也。 小北之人, 以應虎爲奇貨, 旣以奴隷下賤, 圖授觀象監正職, 示其施惠圖報之意然後, 今又欲作元勳。 小北一隊, 咸仰應虎頷下, 以爲冒錄之計, 吁亦巧矣。 李義崇輩, 時過臣家, 憤彼情狀, 大言之, 臣曰: "不然。 己丑告變之趙嘏逆譏察之金渭, 皆不得爲元勳, 況應虎不過爲兄報仇, 不過欲推失銀, 渠有何功於告變, 何功於知逆? 得參勳籍, 亦云足矣。" 大槪富貴, 人雖有欲, 至於爭功, 都喪廉恥。 近日奔忙之輩, 多做虛語, 以圖僥倖。 此在聖明, 洞察明辨之如何耳。 移御之後, 擇吉建宮事, 擧國之人, 旣免遷都之患, 又喜移御之擧。 雖使營建別宮, 必不怨苦而子來矣。 東萊見捉之賊, 入京鞫問然後, 七星山中竄匿逆徒之說, 方可取信。 勦捕之策, 專在於方伯, 李慶全旣遞之後, 以有才略者差遣, 則南方亦不足慮也。 慶全白面書生, 素不閑武事, 故敢及之。 前日臣啓辭中, 《文選》 講取等事, 尙未判下。 閭閻間士子, 皆學《文選》 , 多有興起之望, 其公事速下幸甚。 曹植書院, 館學儒生, 亦顒望批答之速下矣。 今此大慶, 當爲增廣, 但左相、兵判以爲: "莫如爲別試而多取" 云, 故臣當初不以增廣直請矣。 物情皆謂: "合二慶爲增廣, 進定於二月宜當" 云, 惟在上裁。 乙卯正月二十五日。 【所謂中子者, 指中北而言。】


  •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3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