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에서 금차 소도리에게 전할 예단을 논의하다
신들이 금차(金差)에게 가 보았더니, 소도리(所道里)가 ‘그저께 한 말을 조정에 품달했는가?’ 하고 묻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국서(國書)는 애초 우리 나라가 먼저 보낸 것이 아니라 그대 나라의 국서 안에 좋지 못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답서를 했던 것이다. 설령 말의 표현에 본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점이 있었더라도 시일이 오래 지난 오늘날 하필 다시 제기할 것이 있는가. 그리고 예단(禮單)에 관한 일은 일찍이 헤아리지 못했던 것으로서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생각하며 이번의 사행(使行)은 반드시 맹약을 바꿀 의도로 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것을 어찌 이토록까지 요구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소도리가 말하기를 ‘우리의 한(汗)의 명을 전한 것뿐인데, 어찌 그리 준엄한 말로 거절하는가. 혹시 1년에 한 차례씩 하려는 것인가.’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의 피폐한 상황은 귀국이 알 것이다. 아무리 힘을 다해 마련하려 해도 산을 옆에 끼고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1년이니 2년이니 하는 도수(度數)를 논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소도리가 차하리(車河里)와 한참 동안 저희들끼리 얘기를 나눈 뒤에 말하기를, ‘우리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귀국의 신하들과 뭐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어째서 어떤 것은 마련할 수 있고 어떤 것은 마련할 수 없으며 어떤 것은 줄여야 하고 어떤 것은 줄일 수 없다는 뜻을 시험삼아 말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수효를 줄이더라도 우리 나라의 물력(物力)으로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으나, 이러한 뜻을 조정에 통보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소도리 등이 화난 기색은 없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물건은 마련하고 어떤 것은 마련하지 못한다거나 어떤 것은 줄여야 되고 어떤 것은 줄일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가 이미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상,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저들이 이미 수효를 줄일 수 있는 단서를 내놓았고, 조정에 품달하겠다고 대답한 이상 오늘 회보(回報)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김신국(金藎國)·최명길(崔鳴吉)로 하여금 구관소의 당상과 함께 들어가 보고 다시 의사를 탐색한 뒤 내일쯤 또 찾아가 의논하여 정한 수효를 말해주고 그들과 더불어 이모저모로 논의하여 확정짓게 하소서."
하였다. 김신국과 최명길이 마침내 구관소의 당상과 함께 호차(胡差)를 가 보고 나서 이르기를,
"신들이, ‘국왕께서 초상(初喪) 중이라서 인사(人事)를 닦을 겨를이 없었는데도 두 나라 간의 화친하는 일을 중히 여겨 사신을 보내 신의를 보였다. 그런데도 귀국에서는 끝내 답서를 보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예단(禮單)까지 돌려 보냈으니, 어찌 너무나도 미안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귀국이 전일 보낸 글 가운데에 이미 미안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만약 다시 한 번 확정짓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다면 재물을 탐내는 것과 가깝기 때문에 감히 받지 못했을 뿐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단의 일은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우리 나라는 국토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니 만약 전날 말한 수효를 갖추어 보내게 되면 한 번도 치루지 못하고서 민력(民力)이 이미 바닥이 나 나라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텐데, 오래도록 우호 관계를 맺고 싶어도 될 수 있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한(汗)의 뜻만 전할 따름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돌아가 한(汗)에게 고할 것이니, 귀국의 사신이 나름대로 한에게 가서 결정을 보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네 명의 대관이 나와 영접하지 않거든 즉시 돌아오라는 것이 곧 한의 분부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한에게 죄를 얻으면서까지 참고서 들어 온 것은 귀국의 말을 듣고 돌아가 한에게 전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의 글에도 언급이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결정짓게 할 수는 결코 없다. 말을 잘 만들어 타일러서 핑계대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0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무역(貿易) / 외교-야(野)
○句管所啓曰: "臣等入見金差, 則所道里問曰: ‘再昨之言, 已稟於朝廷乎?’ 臣等答曰: ‘國書初非我國之先發, 因貴國書中不好之語而答之。 措語之間, 雖或未達情意。 年月已久, 何必提起於今日? 且禮單事, 曾所未料。 國人莫不駭怪以爲: 「今行, 必是渝盟之計, 不然則責人之力所不及, 何至於此乎?」’ 所道里曰: ‘吾則只傳汗命, 何其峻辭拒之乎? 或欲以一年一度爲之乎?’ 臣等答曰: ‘我國之凋弊, 貴國所知。 雖欲竭力責辦, 無異挾山而超海, 奚暇論其一年二年之度數也?’ 所道里與車河里私語良久言曰: ‘吾等之不得爲任意者, 與貴國群臣何異? 然何不以某物可辦、某物不可辦、某物可減、某物不可減之意, 試言之也?’ 臣等答曰: ‘雖減其數, 亦非我國物力之所可及, 更無可答之言。 然當以此意, 通於朝廷’ 云, 所道里等似無慍色, 而某物辦不辦, 減不減之說, 旣出於其口, 請令廟堂議處。" 備局回啓曰: "彼旣發減數之端, 而以稟於朝廷爲答, 則今日不可無回報。 請令金藎國、崔鳴吉, 偕句管所堂上入見, 更探其意然後, 明間又往見之, 乃言議定之數, 而與之反覆停當。" 金藎國、崔鳴吉, 遂與句管所堂上, 入見胡差曰: "國王在初喪中, 不遑人事, 而以兩國和事爲重, 遣使致信, 貴國終不爲答書, 又還送禮單, 豈非未安之甚乎?" 渠等曰: "貴國前日書中, 旣有未安之語。 若不更加停當而受之, 近於貪貨, 故不敢受耳。" 渠又曰: "禮單事, 何無所答乎?" 臣等曰: "我國地小民貧, 若以前日所言之數而備送, 則不過一番, 民力已竭, 國不能爲國, 雖欲永世相好, 其可得乎?" 渠答曰: "吾則只傳汗意。 當以此歸告於汗, 貴國使臣, 自可停當於汗處。" 且曰: "四大官不出迎, 則還卽入來者, 是汗之分付也。 吾等寧得罪於汗, 而隱忍入來者, 欲聞貴國之言, 歸傳於汗而已。" 上曰: "汗書所無之事, 自我國萬無遣人停當之理。 宜措辭諭之, 俾無推托之言。"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5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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