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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27권, 인조 10년 7월 10일 병오 2번째기사 1632년 명 숭정(崇禎) 5년

신릉을 건원릉 안 다섯 번째 산등성이에 정하다

신릉(新陵)을 건원릉(健元陵) 안 다섯 번째 산등성이에다 정하였다. 당초에 관상감 제조 장유(張維), 예조 참판 윤흔(尹昕) 등이 여러 술관(術官)들과 더불어 건원릉의 여러 산등성이들을 살펴보고서 와 아뢰기를,

"본릉 좌우에 각각 다섯 개의 산등성이가 있는데, 왼쪽 두 번째 산등성이는 목릉(穆陵)061) 이고 세 번째 산등성이는 유릉(裕陵)062) 입니다. 첫 번째 산등성이 및 다섯 번째 산등성이가 쓸 만한데, 첫 번째 것이 다섯 번째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산등성이와 다섯 번째 산등성이의 도형(圖形) 및 지관(地官) 등이 논한 바를 별단자(別單子)에 써서 올립니다."

하니,

"첫 번째 산등성이에다 정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예조 판서 최명길이 상차하기를,

"신이 관상감 제조의 계사 및 여러 술관들의 논한 바를 보니, 첫 번째와 다섯 번째 산등성이가 낫고 못함이 없는 것 같은데 특별히 첫 번째의 산등성이에다 정한 것은, 필시 이 산등성이가 목릉에 더욱 가까워 신령(神靈)이 편안하게 여기리라 생각해서 일 것입니다. 다만 신의 마음에는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지난해 능을 이장할 때에 여러 술관들과 더불어 건원릉 사이를 드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첫 번째 산등성이가 참으로 쓸 만한 땅이 되지마는, 두 능의 사이에 끼어 있어 건원릉에 있어서는 내청룡(內靑龍)이 되고 목릉에 있어서는 내백호(內白虎)가 됩니다. 비록 지세(地勢)가 낮고 미세하여 별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마는, 이미 청룡 백호의 안에 있고 보면 아마도 산가(山家)의 꺼림을 범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국초(國初)에 산릉 자리를 잡은 뒤에 술관들이 ‘건원릉 안은 곳곳마다 명당이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백 년 동안에 현릉(顯陵)063) 하나만 있되 당국(堂局) 밖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에 있으니, 그 시조(始祖)의 능침에 근신한 것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설사 산가의 말이 사도에 가까워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손치더라도, 영침(靈寢)과 지척의 땅에서 돌을 끌어오고 흙을 쌓느라 달을 넘도록 시끄럽게 하는 것이, 어찌 신도(神道)에 대하여 대단히 미안스럽지 않겠습니까. 인도(人道)는 왼쪽을 숭상하고 신도는 오른쪽을 숭상하기 때문에, 유릉(裕陵)을 잡아 장사지낼 때에 선조(宣祖)께서 첫 번째의 산등성이를 놔두고 세 번째 산등성이를 이용한 것은 위차(位次)가 순조로움을 취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산등성이는 실로 유릉 왼쪽에 있고 목릉(穆陵)에 있어서도 그다지 멀지 아니하여, 이미 산가의 꺼리는 것이 없고 위차도 순조로우니, 그 취하고 버리는 즈음에 다시 더 조심스럽게 살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제 산릉을 살펴보고 올린 계사 중에서 첫 번째 산등성이를 좋다고 하였기 때문에 거기에다 정하였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위차가 순조롭지 못하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다섯 번째 산등성이의 형세가 실로 첫 번째 산등성이와 다름이 없고 또 위차가 순조롭지 못한 혐의도 없으니, 재심(再審)할 때에 다시 살펴보아 재혈(裁穴)하여 오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총호사 이정귀(李廷龜)로 하여금 가서 다섯 번째 산등성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형국이 몹시 아름답다고 하여 마침내 그 자리로 정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9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註 061]
    목릉(穆陵) : 선조(宣祖)의 능.
  • [註 062]
    유릉(裕陵) : 선조의 왕비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처음 능.
  • [註 063]
    현릉(顯陵) : 문종(文宗)과 문종비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

○卜新陵於健元陵內第五岡。 初, 觀象監提調張維、禮曹參判尹昕等, 與諸術官, 看審健元陵諸岡, 來啓曰: "本陵左右, 各有五岡, 而左邊第二岡, 則穆陵也, 第三岡, 則裕陵也。 第一岡及第五岡可用, 而第一, 優於第五云。 第一岡、第五岡圖形及地官等所論, 書諸別單以進矣。" 答曰: "定於第一岡。" 至是, 禮曹判書崔鳴吉上箚曰:

臣伏見觀象監提調啓辭及諸術官所論, 則第一第五岡, 似無優劣, 而特定於第一岡者, 必以此岡, 尤近穆陵, 神靈所安故也。 但於臣心, 有不能無疑者焉。 臣曾在頃年遷陵時, 與諸術官, 出入健元陵之間非一再。 第一岡, 固爲可用之地, 而介於兩陵之間, 於健元則爲內靑龍; 於穆陵則爲內白虎。 雖曰地勢低微, 不能爲有無云, 而旣在龍虎之內, 則恐不可謂不犯山家之忌矣。 國初卜山之後, 術者相傳以爲, 健元陵內處處明堂云, 而二百年間, 獨有顯陵, 而在於堂局之外, 眼所不見之地, 則其所致謹於始祖陵寢者, 豈無其由乎? 設使山家之說, 近於左道, 不可專信, 靈寢咫尺之地, 曳石築土, 經月喧闐, 豈不大未安於神道乎? 人道尙左, 神道尙右。 故裕陵卜葬時, 宣祖舍一岡, 而用三岡者, 取其位次之順也。 第五岡, 實在裕陵之左, 而在穆陵, 亦不甚遠, 旣無山家之拘忌, 而位次便順, 其於取舍之際, 不可不更加愼審也。

答曰: "昨日山陵看審啓辭中, 以第一岡爲優, 故定之, 今更思之, 則位次不順。 議大臣處置。" 大臣以爲: "第五岡形勢, 實與第一岡無異, 而又無位次不順之嫌, 再審時, 請更看審裁穴以來。" 於是, 使摠護使李廷龜, 往審第五岡, 皆以爲格局甚美, 遂定卜焉。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491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