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에서 맹인 이후성의 급변을 보고하여 국청이 열리다
정원이 아뢰기를,
"맹인(盲人) 이후성(李後晟)이 본원(本院)에 와서 급변(急變)을 올렸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국청으로 하여금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이때 청안 사람 정호학 등이 아뢴바 때문에 바야흐로 국청을 설치하고 있었다.】 후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연방축(蓮妨築)에 사는 동지(同知) 유응형(柳應泂)과 한동네 살면서 점을 치는 일로 왕래하다 서로 친하게 되었습니다. 갑자년009) 에 응형이 나를 불러 그 여종을 시집보냈는데, 그후 묻기를 ‘너는 사대장(四大將)의 팔자(八字)를 아는가?’ 하기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말하기를 ‘네가 비록 네 사람의 운명은 모른다 하더라도 시험삼아 국운(國運)의 장단(長短)을 점쳐 보아라.’ 하기에 답하기를 ‘어찌 감히 그런 점을 칠 수 있겠는가.’ 하니, 응형이 이에 더 묻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응형이 중군(中軍)이 되었는데 또 묻기를 ‘내가 중군이 되었으니 용병(用兵)할 일이 있겠는가. 시험삼아 길흉을 점쳐 보라.’ 하기에 흙을 파 산을 만드는 점괘를 얻어 성사(成事)는 늦을 듯하고 외임(外任)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응형이 북로(北路)의 수령이 되었으나 끝내 부임하지 않고 별초 무사 별장(別抄武士別將)이 되었습니다. 또 묻기를 ‘이제 이 별장이 되었는데, 이 무리들과 더불어 하면 성사되겠는가?’ 하여, 즉시 점을 쳐보았는데 지금은 그 점괘의 내용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미년 9월에 그 집에 갔더니, 세 사람이 자리에 있었는데, 경오생(庚午生)·계유생(癸酉生)·신사생(辛巳生)의 명(命)을 묻기에 답하기를 ‘아주 좋은 줄을 모르겠다.’ 했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너는 이일원(李一元)과 이웃에 사니 그의 운명을 알 것이다.’ 하기에, 답하기를 ‘그의 명 역시 좋지 않다’ 했더니, 좌객(座客)은 일어나 나가고, 응형이 칼을 들어 내 손에 쥐어주면서 어루만지게 하고는 말하기를 ‘내가 이 칼로 이식(李植)·정백창(鄭百昌)·박로(朴𥶇)를 제거한 후에 일을 도모하려 하는데 이 칼의 성공 여부에 대하여 너는 점을 쳐보라.’ 하기에 이어 솥의 발이 부러지는 괘를 얻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세 손님을 처음에는 누구인가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응형의 종 두게(豆揭)에게 물었더니 한 사람은 바로 전평군(全平君) 이신(李愼)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이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9월 사이에 불려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즈음에 중군청(中軍廳) 군사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응형이 나가 묻기를 ‘그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오늘 조암(槽巖)에서 만났는데 장관(將官) 3인이 소 세 마리를 다 잡았고, 술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정했다.’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너는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즉시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지경(尹知敬)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경이 말하기를 ‘너는 그 일의 단서를 자세히 알아보고 나서 상변(上變)하라.’ 하였습니다.
그후에 또 응형의 집에 갔더니, 응형이 또 김응학(金應鶴)이란 자를 불러 말하기를 ‘기패(旗牌) 이득경(李得京) 역시 데리고 와야 된다.’ 하고, 인하여 들어와 말하기를 ‘전일의 경오생은 이신(李愼)의 명(命)이며 계유생은 나덕헌(羅德憲)의 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묻기를 ‘신사생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물을 필요 없다. 기묘생은 이신의 첩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여기에 있어야 바야흐로 내응(內應)할 수 있는데 이신이 지금 인솔하여 외방(外方)에 갔으니, 언제나 올라오겠는가?’ 하기에 답하기를 ‘2월 사이에 반드시 체직되어 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손대신(孫大信)이 일찍이 묘책이 있다고 하였는데, 한 번 나팔을 불면 대장이 마땅히 나올 것이니 먼저 격살(擊殺)시키고, 인하여 그 군사를 거느리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기에 신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놀라서 즉시 나만갑(羅萬甲)에게 말했더니, 나만갑이 말하기를 ‘잠시라도 숨겨 지체해서는 안 되니, 내가 마땅히 훈재(勳宰)에게 말하겠다.’ 하였습니다.
그후 신의 처족(妻族) 석몽복(石夢福)이 신의 집에 와서 그릇을 빌리면서 말하기를 ‘도감 장관이 가을 강신(講信)을 하려 한다.’ 하고 인하여 묻기를 ‘내가 여러 벗들에게 이끌리고 유 수사(柳水使)와 서로 절친하니, 이제 그 은(銀)으로 소를 사 군사들을 먹이려 하는데, 나도 가서 참석하고자 한다.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런 말을 어찌 나에게 하느냐?’ 하니, 몽복은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하루는 응형이 말하기를 ‘추숭한 후에 만약 대과를 설치하게 되면 그때 거자(擧子)들이 성 안에 모여 들 것이니 궁시(弓矢)를 지니고 섞여 들어가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미 이런 말을 듣고는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유응형(柳應泂)·이일원(李一元)·이신(李愼)·나덕헌(羅德憲)·두게(豆揭)·김응학(金應鶴)·이득경(李得京)·석몽복(石夢福) 등을 잡아와 내병조(內兵曹)에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응형의 공초에,
"신이 이후성(李後晟)과 과연 서로 절친하였는데 후성이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여종을 사간(私奸)했습니다. 4대장의 사주 및 국운에 관하여 점쳐보라고 언급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설사 역모를 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그런 무리에게 바른대로 말하겠습니까. 중군 별장(中軍別將)이 되었을 때 점을 쳤다고 하는데 역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신처럼 연소한 무부(武夫)가 만약 국가의 변란을 만났다면 절친한 맹인(盲人)에게 길흉을 점치는 것이 그럴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만 전후해서 후성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신이 이신과는 서로 가장 절친하게 지내며 경오생(庚午生)은 과연 그의 운명입니다.
신은 일생 동안 구설(口舌)을 들어 왔으며, 이신 역시 여러 차례 탄핵을 입었으므로 때로 길흉을 물어보긴 했습니다만 계유생(癸酉生)·신사생(辛巳生)은 전혀 모릅니다. 자리를 같이했던 세 사람의 경우는 맹인이 수시로 왕래했는데 어느 때 누구와 서로 만났는지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이일원(李一元)의 팔자를 물었다는 것은 도무지 거짓말입니다. 비록 흉악한 모의를 하였다 하더라도 하필이면 맹인의 손을 잡아 칼을 만져보게 하고서 점을 쳐보도록 했겠습니까.
정백창(鄭百昌)이 신을 논핵함이 매우 참혹했음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이 맹인이 반드시 그 일을 듣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신이 처음 경기 수사(京畿水使)가 되었을 때 구굉(具宏)을 하직하니, 굉이 말하기를 ‘들으니, 네가 역모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므로 신이 놀라서 묻기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였습니다. 구굉이 말하기를 ‘이식(李植)이 와서 말하였는데, 박로(朴𥶇)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박로는 너의 매부(妹夫) 박진(朴)의 형이니 반드시 자세히 알 것이기 때문에 믿고 들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상소하고자 하니, 굉이 말하기를, ‘이는 전해진 말이고, 또 우리가 이미 들었으니, 비록 상소하지 않아도 된다.’ 하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훈척 중신(勳戚重臣)이 스스로 말했다가 스스로 중지시키니, 그 말을 따라야 할 듯하다.’ 하였기 때문에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는데, 혹 후성이 이를 듣고 형적 없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까?
조암(槽巖)에서 군사를 먹였다는 일은, 집이 조암에서 가깝기 때문에 후성이 그렇게 말한 것인데, 비록 은벽(隱僻)한 곳이라 하더라도 소 세 마리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면 먹은 사람이 반드시 많았을 텐데 사람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덕헌(羅德憲)은 함께 체부(體府)의 막하(幕下)에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상면하였으나 덕헌이 죄를 얻고 하향한 후로는 다시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그의 생년(生年)이 무슨 갑(甲)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신(李愼)은 본래 축첩(蓄妾)하지 않았으니, 기묘생이 내응해야 한다는 설은 더욱 매우 형적이 없습니다. 신이 과연 이후성(李後晟)과 큰 혐의가 있습니다. 후성이 소첩(小妾)을 두었기에 신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 꾸짖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후성이 이 일 때문에 감정을 품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모함을 한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후성과 면질(面質)하게 했으나 그 곡직(曲直)을 가려내지 못하였다. 후에 민람(閔灠)의 고변을 인해 다시 민람과 면질하게 하니 역시 아주 억울하다고 하였다. 이득경(李得京)의 공초에,
"신이 처음에는 응형을 몰랐는데 이괄(李适)의 변란 때 응형이 부원수(副元帥) 진중(陳中)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장차 진을 치려고 했었습니다. 원수(元帥)가 신이 진법(陣法)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가서 가르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응형의 사람됨을 알았습니다. 그후 응형이 중군이 되어 때때로 혹 불러 보았으나 모역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김응학(金應鶴)은 공초하기를,
"응형이 중군이 되었을 때 배행(陪行)했을 뿐 나팔수(喇叭手) 등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하였다. 두게(豆揭)는 공초하기를,
"아노(兒奴)로 심부름만 해서 다른 일은 모릅니다."
하고, 이일원(李一元)은 공초하기를,
"응형과 나이가 비슷하지 않고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전에는 서로 알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체부 막하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유흥치(劉興治)의 난리에 응형이 경기 수사(京畿水使)가 되고 신이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되어 단지 항오(行伍) 사이에서 서로 보았을 뿐 본래 서로 두터운 의리는 없었으니, 응형이 점장이에게 명을 점쳤다는 것은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하고, 석몽복(石夢福)은 공초하기를,
"경오년010) 안주(安州)에 수자리를 가 신미년011) 에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수자리를 살고 돌아온 후에 강신(講信)은 스스로 도감(都監)의 규례가 있어 장사(將士)들과 조암에서 모여 각기 무명베 반 필(匹)씩을 내어 소를 사 반찬을 삼았으나 우박(雨雹)을 인해 조용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참석한 장관(將官)은 허정준(許廷準)·김성발(金聲發)·안경성(安敬誠)과 별무사(別武士) 30여 명이었습니다. 모여 술을 마시며 강신하던 날 후성(後晟)에게 그릇을 빌렸는데 후성은 바로 사촌 매서(妹婿)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모역했다고 말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하였다. 허정준은 공초하기를,
"신의 형 첩(妾)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응형이 첩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응형은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며 그 서모의 시양녀(侍養女)를 취해 첩으로 삼았다. 또 창기(娼妓)를 많이 간통했으니, 지금 만약 시골 여자를 그의 첩으로 허락하면 응형의 한 여종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이 말을 듣고는 항상 매우 분해 욕을 했기 때문에 신과 응형 사이는 원수와 같았습니다. 그후 신은 초관(哨官)이 되고 응형은 중군(中軍)이 되었기 때문에 예(例)에 따라 명함(名啣)을 통했을 뿐입니다.
경오년 안주로 수자리를 살러 갔다가 돌아와 과연 조암에서 강신의 모임을 가졌으나 응형이 은(銀)을 주어 소를 샀다는 일은 전혀 모릅니다."
하고, 이신은 공초하기를,
"신이 전년 7월, 응형을 가서 보았더니 자리에 앉은 지가 오래지 않아 맹인이 들어왔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이는 유명한 점장이다.’ 하여 신은 단지 사주(四柱)만 묻고는 일어나 왔습니다. 그후 응형의 병든 어미가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맞았기 때문에 가까워 편리함을 취해 신의 외채에 와 지내다가 15일에 돌아갔습니다. 신은 본래 첩이 없는데 기묘생이 신의 첩 명(命)이라 하였으니, 그 여인이 어떻게 내응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의 처조카에게 첩 딸이 있는데 응형이 결혼시켜주기를 청해 작년 7월에 과연 그 첩자(妾子)와 성혼시켰습니다. 고장(故將) 이일(李鎰)은 바로 신의 삼촌이어서 응형의 아비 유지신(柳止信)과 함께 그 막하에 있었습니다. 응형이 고인(故人)의 어린 아들이어서 서로 친하게 되었는데 만약 유응형을 안다는 것으로 죄를 준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으나 역모에 동참했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이 이미 진무 공신(振武功臣)012) 정훈(正勳)에 들었고 두 번씩이나 곤직(閫職)을 지냈으니 무슨 부족한 일이 있어 감히 불측한 계획을 했겠습니까.
응형이 신의 집에 드나들면서 아주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고 【 유응형이 이신의 아내를 간통했다고 한다.】 또 그 아비가 사간(私奸)한 어린 여종과 함께 한방에서 자서 비로소 그의 형편없음을 알고 절교하고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덕헌이 공초하기를,
"신은 체부 막하에 있으면서 비로소 응형과 서로 알게 되었고, 그후에는 관(官)의 일로 오랫동안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는 병 때문에 출입하지 못하였고 서울과 시골이 서로 천리나 떨어져 있으니 어찌 응형이 점을 친 곡절을 알겠습니까."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이갱생(李更生)이 상소하여 진달한 ‘민람(閔灠)과 응형이 문답하였다.’라는 말은 일이 아주 의심스러우니, 민람을 잡아다 묻기를 청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민람이 공초하기를,
"신은 응형과 처음으로 체부 막하에서 알게 되었는데, 전년 응형을 찾아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신이 말하기를 ‘요즈음 가을 천둥이 크게 우니 일이 매우 놀랍다.’ 하니 응형이 말하기를 ‘반드시 뜻을 가진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묻기를 ‘너의 향리에 사는 최완(崔𤾂)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서로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좋고 나쁜지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임국(林國)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그 사람은 상인(常人) 가운데 선한 자이다.’ 하니, 유응형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과연 선하다면 비록 팔도의 병사가 되더라도 부족하지 않겠다.’ 하고 또 묻기를 ‘송진(宋震)은 어떤 사람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매우 좋다.’ 하였습니다. 응형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도 역시 어려운 인물이다.’ 하였는데, 그때 옆에 작은 종이를 두고 그 사람의 사주를 적었습니다. 또 신의 명(命)을 묻기에 신이 비로소 의아하여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돌아와 즉시 이갱생에게 말했고, 이갱생은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에게 말했습니다.
그후 상경했더니, 갱생이 말하기를 ‘네가 다시 탐청(探聽)해야겠다.’ 하기에 즉시 유응형의 집으로 갔습니다. 들어가 앉자마자 초관(哨官) 허정준(許廷準)이 들어와 단지 한담을 나누다 물러나왔습니다.
또 응형의 말을 돌켜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은 부인들과 모의할 수가 없다. 살아 있으면 부인이 없을까 걱정할 것이 무엇이며, 죽어서는 부인이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남자가 혹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어디 간들 뜻을 얻지 못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추관을 인견하고 옥정(獄情)을 물으니, 대신이 먼저 응형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응형은 형을 받고도 끝내 불복하다 죽었으며 허정준 및 김응학(金應鶴)·석몽복(石夢福) 역시 형을 받았으나 불복하였다. 상이 국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니, 국청이 회계하기를,
"허정준·이신은 유응형과 친밀하게 사귀어 전석(全釋)해서는 안 되니, 유배(流配)하는 율을 시행해야 마땅하며, 나머지는 모두 분간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이후성(李後晟)과 민람(閔灠)은 끝내 무고한 율을 면하니, 듣는 자들이 의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67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註 009]갑자년 : 1624 인조 2년.
- [註 010]
경오년 : 1630 인조 8년.- [註 011]
신미년 : 1631 인조 9년.- [註 012]
진무 공신(振武功臣) : 1624 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만(張晩)·정충신(鄭忠信) 등 29명에게 내린 공훈.○政院啓曰: "有盲人李後晟, 到本院上急變, 何以處之?"答曰: "令鞫廳問啓。" 【時以淸安人丁好學等所告, 方設鞫廳。】 後晟供云: "臣與蓮妨築居同知柳應泂同里, 以推卜往來, 仍與相親。 甲子年, 應泂招我, 交嫁其婢。 其後問曰: ‘汝知四大將八字耶?’ 答以不知則曰: ‘汝雖不知四人之命, 試占國運長短。’ 答曰: ‘何敢爲此等占乎?’ 應泂仍不更問。 其後應泂爲中軍, 又問曰: ‘吾爲中軍, 有用兵之事, 試占吉凶。’ 因得掘土爲山之占, 云: ‘成事似遲, 可爲外任耳。’ 其後應泂果爲北路守令, 終不赴任, 爲別抄武士別將, 又問曰: ‘今爲此別將, 可與此輩成事乎?’ 因卽占之, 今忘其辭。 辛未九月, 又往其家, 則三人在座。 問庚午生、癸酉生、辛巳生之命, 答曰: ‘未知其極好。’ 應泂曰: ‘汝與李一元隣居, 可知其命矣。’ 答曰: ‘其命亦不好矣。’ 座客起出。 應泂取劍執吾手, 使撫之曰: ‘吾欲以此, 斬李植、鄭百昌、朴𥶇後, 有所爲。 此劍成功與否, 汝其占之。’ 因得鼎折足之爻。 座上三客, 初不知其爲誰, 歸路問諸應泂奴豆揭, 則一人乃全平君 李愼云, 故始知李愼姓名矣。又於九月間, 招致談話之際, 有一人稱以中軍廳軍士, 來謁。 應泂出問曰: ‘其事何以爲之?’ 其人答曰: ‘今日會于槽巖, 將官三人, 買三牛椎之, 酒則分定於各人矣。’ 應泂曰: ‘汝須勿洩。’ 臣聞言大駭, 卽言于忠淸監司尹知敬, 知敬曰: ‘汝須詳知其端緖後上變。’ 其後又往應泂家, 應泂又招金應鶴者曰: ‘旗牌李得京亦可率來。’ 因入來, 言: ‘前日庚午生, 李愼之命也; 癸酉生, 羅德憲之命也。’ 因問: ‘辛巳生何人耶?’ 應泂曰: ‘不須問也。 己卯生則李愼之妾也。 必其人在此, 方可內應, 愼今率往外方, 何時上來?’ 答曰: ‘二月間必遞來矣。’ 應泂曰: ‘孫大信嘗言妙策云, 一吹喇叭, 則大將當出, 先擊殺之, 仍領其衆, 何事不成?’ 臣聞之愈駭, 卽言於羅萬甲, 萬甲曰: ‘不可一刻隱滯, 吾當言於諸勳宰耳。’ 其後臣妻族石夢福, 來借器皿於臣家, 稱以都監將官秋講信云。 仍問曰: ‘吾爲諸友所引, 與柳水使相切。 今以其銀, 買牛餉士, 吾將往參, 未知如何?’ 臣曰: ‘此言奚及於吾耳也?’ 夢福辭去。 一日, 應泂曰: ‘追崇之後, 若設大科, 則其時擧子聚會城中, 混持弓矢, 人必不疑’ 云。 旣聞此等語, 不敢不告" 云。 鞫廳請拿柳應泂、李一元、李愼、羅德憲、豆揭、金應鶴、李得京、石夢福等, 鞫問于內兵曹。 應泂供云: "臣與李後晟, 果相親切。 後晟朝夕往來, 仍私奸婢子矣。 四大將八字及國運推占事, 全不語及。 設若謀逆, 豈直說於此輩? 中軍別將時推占, 亦無是事。 如臣年少武夫, 若値國家變亂, 則推占吉凶於親切盲人,不無其理, 而前後亦不一問於後晟矣。 臣與李愼最相親切,庚午生果是其命。 臣一生在口舌中, 李愼亦屢被彈劾, 時問其吉凶, 而癸酉生、辛巳生, 則全然不知。 在座三人, 則此盲往來無常, 某時某人之在座相値, 何以記憶? 李一元八字推問, 都是虛言。 且雖有兇謀, 何必執盲人之手, 使之撫劍而占之乎? 鄭百昌之論臣孔慘, 人孰不知? 此盲必聞此事,而有此言矣。 臣初爲京畿水使時, 往辭具宏, 宏曰: ‘聞汝爲逆謀云, 是何言耶?’ 臣驚問: ‘從何聞此言乎?’ 宏曰: ‘李植來言, 聞諸朴𥶇云。 朴𥶇是汝妹夫朴 之兄, 必詳知,故信聽矣。’ 臣卽欲上疏, 則宏曰: ‘此是傳說, 且吾輩已聞之, 雖不上疏可也。’ 臣以爲勳戚重臣, 自言而自止之, 似當從其言’, 故終不陳疏自明。 或者, 後晟聞此, 而作此無形之言耶? 槽巖犒軍事, 則家近槽巖, 故後晟有此云云, 雖隱僻之處, 至於椎三牛而犒饋, 則所饗必多, 人豈不知? 羅德憲則同在體府幕下, 始得相面。 德憲得罪下鄕之後, 更不相見, 其生年之爲某甲, 何以知之? 李愼則本無所畜之妾, 己卯生人內應之說, 尤甚無形。 臣果與後晟有大嫌。 後晟有少妻, 臣嘗送簡挑之而事覺。 後晟以此, 積憾構陷, 至於此極矣。" 遂令後晟面質, 不得辨其曲直。 後因閔灠告變, 更與灠面質, 亦極稱冤。 李得京供云: "臣初不知應泂, 适變時, 應泂以副元帥陣中左營將, 到楊州將結陣,元帥以臣稍解陣法, 使往敎之, 始識應泂之爲人。 其後應泂爲中軍, 時或招見, 而謀逆之事, 全不得知。" 金應鶴供云: "應泂爲中軍時, 陪行而已, 全不知喇叭手等事。" 豆揭供云: "以兒奴使喚, 不知他事。" 李一元供云: "與應泂年齒不侔, 居住隔遠, 初不相知, 始識於體府幕下。 劉興治之亂, 應泂爲京畿水使, 臣爲長淵府使, 只得相見於行伍間, 本無相厚之義。 應泂之推命於卜者, 萬無其理。" 石夢福供云: "庚午赴戍安州, 辛未年始還。 赴戍回還後, 講信自是都監規例, 與將士等會集于槽巖, 各出木半匹, 買牛爲饌, 而因雨雹, 不得從容。 同參將官, 則許廷準、金聲發、安敬誠, 別武士三十餘人。 會飮講信之日, 借器皿于後晟, 後晟卽四寸妹壻故也。 所謂謀逆云者, 千萬無據。" 許廷準供云: "臣兄之妾生一女, 應泂求作妾。 臣以爲: ‘應泂貪財嗜色, 取其庶母侍養女爲妾, 且多狎娼妓。 今若以鄕曲之女, 許爲其妾, 則不過作一婢子於應泂也。’ 應泂聞此語, 常極憤罵, 故臣與應泂, 有同仇讐。 其後爲哨官, 則應泂爲中軍, 故循例投刺耳。 庚午年赴戍安州, 旣還, 果行講信之會于槽巖, 而應泂之給銀買牛, 則全不知之。" 李愼供云: "臣前年七月, 往見應泂, 則坐未久, 盲人入來。 應泂曰: ‘此是名卜。’ 臣只問四柱而起來矣。 其後應泂以其病母, 受鍼於李馨益, 故取其便近, 來接于臣外舍, 十五日而還。 臣本無妾, 所謂己卯生, 卽臣妻命, 渠以女人, 有何內應之事? 臣之妻娚有妾女, 應泂要與結昏, 上年七月, 果與其妾子成昏矣。 故將李鎰, 卽臣之三寸也。 與應泂之父止信, 同在其幕下。 應泂以故人稚子, 仍與相親。 若以知應泂爲罪, 則死亦不辭, 至於同參逆謀云者, 則臣旣參振武正勳, 再經閫職,有何不足之事, 而敢生不測之計乎? 應泂出入臣家, 頗有不美之談, 【應泂私愼妻云。】 且與其父所私年少之婢,同宿一房, 始知其無狀, 絶不相通矣。" 羅德憲供云: "臣在體府幕下, 始與應泂相識。 其後以官事, 長在外方, 旣還鄕土, 病未得出入, 而京鄕相隔且千里, 何以知應泂之推卜曲折乎?" 禁府啓曰: "李更生疏陳閔灠與應泂有問答之言,事極可疑, 請拿閔灠以問之。" 答曰: "依啓。" 閔灠供云: "臣與應泂, 始識於體府幕下。 前年往見應泂談間, 臣曰: ‘近日秋雷大鳴, 事可驚駭。’ 應泂曰: ‘必有有意者矣。’ 仍問曰: ‘汝鄕中崔𤾂, 何如人?’ 答以 ‘相住隔遠, 不知其善惡。’ 又問曰: ‘林國何如人?’ 答曰: ‘此乃常人之善者也。’應泂曰: ‘其人果善, 雖爲八道兵使, 不爲不足。’ 又問 ‘宋震何如人?’ 答曰: ‘甚善。’ 應泂曰: ‘以吾所見, 亦是罕得人物耳。’ 其時, 坐傍置小紙, 記人之四柱。 又問臣之命, 臣始驚訝, 不以實對, 還來, 卽言於李更生, 更生言于靑雲君 沈命世。 其後上京, 則更生言: ‘汝可更加探聽。’ 臣卽往應泂家, 纔入座, 哨官許廷準入來, 只做閒說話而退。 又追記應泂之語, ‘凡事不可謀及婦人。 有生何患無婦, 無生則有婦何爲? 男兒或爲某事, 則安往而不得志乎?’ 云。" 上引見大臣、推官, 問獄情, 大臣請先鞫應泂。 應泂受刑, 終不服而死。 許廷準及應鶴、夢福亦受刑不服。 上令鞫廳議處。 鞫廳回啓曰: "許廷準、李愼, 與應泂交密, 不可全釋, 當施流配之律, 餘皆分揀似當。" 上皆從之。 後晟、閔灠竟得免誣告之律, 聞者疑之。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67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註 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