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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24권, 인조 9년 6월 28일 경오 2번째기사 1631년 명 숭정(崇禎) 4년

노병이 철수하여 돌아가다

노병(虜兵)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보다 앞서 가도에 있는 유흥치(劉興治)의 어미가 노중(虜中)에 있었는데, 노병이 유흥치에게 항복하라고 달래려 하였고 유흥치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약속하고서 노병을 빌려 동으로 우리 나라를 공략하려 하였다. 유흥치장도(張燾) 등에게 살해되자, 가도에 투항했던 달자(㺚子)가 다시 노중으로 도망쳐 들어가 말하기를 ‘유흥치가 피살되고 도중(島中)이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이때 한 부대의 군사로 가도를 습격하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자 한(汗)이 그럴 듯하게 여겨 일고산(一高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의주를 거쳐 급히 선천·정주·가산·철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중남(仲男)·만월개(滿月介) 등을 차출하여 우리에게 배를 빌리게 하고는, 먼저 자신이 해상을 수색하여 11척을 얻어 신미(身彌) 【 섬 이름.】 선사(宣沙) 【 섬 이름.】 도치(都致) 【 곶 이름.】 등처에 나누어 둔(屯)을 치고 가도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에 도독 황룡(黃龍)이 가도에 와서 진을 지켰는데, 노병이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장도(張燾)를 시켜 신미도에 가서 싸우게 하였다. 싸움이 조금 유리해지자 다시 대소 병선 1백여 척을 독려하여, 사포(蛇浦)에서 맞아 싸워 일고산우록(牛鹿) 두 장수를 참획하였는데, 죽은 호병이 매우 많았으며, 명나라 군사도 육지에 올라와 적의 수급을 다투다가 노병에게 기습을 당하여 사망한 자가 많았다. 중남 등이 돌아가자 호장(胡將) 등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이 배를 빌려 주지 않은 것은 참으로 대의에서 나왔다. 가령 배를 빌려 주었더라도 우리에게 이로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고 그날로 11척을 우리에게 직접 돌려주고 마병(馬兵) 2백여 기만 남겨 놓고 갔다.

노병이 청천강 이북에 들어왔을 때, 가산(嘉山)의 마을 사람들이 숲 속에 숨어 있다가 흩어져 있던 노병을 쳐죽였다. 노가 이를 알고 본읍 군수 방식(方軾)에게 힐문하였는데, 방식이 부원수 정충신과 병사 유림(柳琳)에게 말하여, 사형시킬 우리 도졸(逃卒)을 대신 죽여 보상하기를 청하였다. 정충신 등이 허락하였는데,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상소하여 안 된다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자강(自强)하지 못하니, 이 뒤로 호인들이 죽으면 매번 인명으로 보상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변민들은 모두 호병 죽이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데, 지금 우리 나라 사람을 대신 죽여 보상하면 변민들이 어떻게 그가 사형수인 줄 알겠습니까. 변민들의 적을 토벌하는 마음을 저해할 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의 사정을 호로가 모르는 것이 없는데, 뒤에 사형수를 대신 죽여 속였다고 말하면 신의를 잃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하였다. 조정에 미처 보고하지 못하였는데, 방식이 끝내 사형수를 호장에게 주어 죽이게 하니, 사형수가 호소하기를 ‘나는 호병을 죽인 사람이 아니다.’ 하자, 호장이 풀어주어 다시 가두었다. 뒤에 정충신 등이 몰래 방식을 시켜 그 사형수를 죽여서 보상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식이 사형수를 대신 죽이기를 청했다 하더라도, 정충신 등은 사실에 근거하여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충신유림의 죄는 추고해야 되고 방식은 곤장을 쳐야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34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

    兵撤歸。 先是, 椵島 劉興治之母, 在中, 欲誘降興治, 興治亦遣使約降, 仍欲借兵, 東搶我國。 及興治張燾等所殺, 降逃入中曰: "興治被殺, 島中未定。 若於此時, 以一枝兵襲島, 則可全利也。" 汗然之, 使一高山, 領甲騎一萬二千餘人, 由義州猝入, 而差仲男滿月介等, 借船於我, 先自旁搜海上, 得十一船, 分屯身彌 【島名。】 宣沙 【島名。】 都致 【串名。】 等處, 將欲攻島。 會, 都督黃龍, 來鎭椵島, 聞將襲之, 使張燾身彌島戰。 少利, 復督大小兵船百餘艘, 迎戰于蛇浦, 斬獲一高山牛鹿二將, 兵死者甚衆, 兵下陸爭首級, 爲所掩, 亦多死亡者。 及仲男等回, 將等皆曰: "朝鮮之不借船, 眞出大義。 假使借船, 我無所利。" 卽日放其十一船, 面授我人, 只留馬兵二百餘騎而去。 當之入北也, 嘉山村氓, 竄伏林谷中, 擊殺兵之散處者。 覺之, 詰問本邑郡守方軾, 言于副元帥鄭忠信、兵使柳琳, 請以逃卒之當死者, 代斬以償, 忠信等許之。 監司閔聖徽疏陳其不可曰: "我國不能自强, 此後胡人之死, 每以償命爲言, 一也。 邊民皆以殺爲快, 今乃代斬, 安知其爲死囚也? 沮邊民討賊之心, 二也。 我國事情, 虜無不知。 後以代斬相欺爲言, 則失信, 三也。" 朝廷未及報, 竟以死囚與將殺之, 死囚呼曰: "吾非殺者也。" 釋不斬, 復仍囚。 後, 忠信等陰使方軾, 斬而償之。 備局啓曰: "方軾雖請代斬死囚, 而鄭忠信等不能據實處置, 忠信, 罪當推考, 當決棍。"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434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