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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23권, 인조 8년 7월 13일 경인 8번째기사 1630년 명 숭정(崇禎) 3년

전 판관 안사열이 천릉하는 일에 대해 소장을 올리다

전 판관(判官) 안사열(安士說)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은 듣건대 옛날에는 총분(冢墳)을 수장(壽藏)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래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세(上世)에는 제왕을 장사지낼 적에 자리를 가렸다는 말을 못 들었고, 공성(孔聖)께서 부모를 합장(合葬)할 적에도 자리를 가려서 천개(遷改)했다는 글이 없습니다. 무릇 장사지내는 사람은 지역이 높고 건조하고 경작하지 않는 곳을 가리는 것을 최상으로 여겼는데, 자리를 가리는 것은 말세의 옳지 못한 의논인 것입니다. 그것이 자손에게 길흉을 끼치게 한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너무도 무리한 말인 것입니다. 설사 그런 이치가 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술법(術法)이 모호하여 세상에는 여기에 밝은 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땅속에 물이 있는 것은 그 또한 분명히 알기 어려운 것인데, 그저 한 사람의 견해만 믿고 경솔하게 선왕(先王)께서 백년 동안 잠들었던 안택(安宅)을 차마 옮길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근래 살펴보건대 사대부들의 집안에서 천장하고 난 뒤에 이롭지 못한 경우가 속속 있었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더욱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신이 사마광(司馬光)의 장론(葬論)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나의 형은 나이 79세에 경재(卿宰)의 반열로 치사(致仕)했고 나는 나이 66세로 외람되이 시종(侍從)에 몸담고 있으며 종족(宗族) 가운데 벼슬에 종사하는 사람이 23인이나 되니, 삼가 장서(葬書)를 이용하여 장사지낸 사람들과 견주어 볼 때 그들이 우리 집안보다 반드시 나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에 나의 처가 사망했으므로 관을 만들고 염을 해서 제구를 준비하여 가지고 가서 광중(壙中)을 파고 장사지냈는데, 음양가(陰陽家)에게 한마디도 물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일이 없다. 내가 일찍이 음양가들이 사설(邪說)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킴으로써 세상에 걱정거리가 되는 것을 증오했으므로 지난번 대관(臺官)이 되었을 적에 천하의 장서(葬書)를 금지시키도록 주청했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장서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 집안을 보라.’ 했습니다.

그리고 송유(宋儒)인 정이(程頤)의 장설(葬說)에는 ‘택조(宅兆)를 가리는 것은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를 가리는 것이지 음양가의 이른바 화복(禍福)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좋은 땅은 흙빛이 윤택하고 초목이 무성한 곳이다.’ 했으며, 땅의 방위(方位)를 가리고 날짜의 길흉(吉凶)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잘못이라 했고, 장혈(葬穴)에 있어서는 ‘제일 높은 사람이 가운데 위치하고 왼쪽은 소(昭)이고 오른쪽은 목(穆)으로 후손은 동쪽이나 서쪽에 위치한다.’ 했으니, 산의 형세를 가리는 데 자손을 위해서 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양정수(楊廷秀)이 시강(李侍講)에게 준 서한에는 ‘경순(景純)090) 의 장서는 동한(東漢)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의 부조(父祖)를 어떠한 곳에 장사지냈기에 이런 성현을 탄생하였고 귀(貴)와 수(壽)를 누릴 수 있었습니까. 신이 삼가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효종(孝宗)의 산릉(山陵)에 토육(土肉)이 천박하고 밑에 물과 돌이 있다 하여 성지를 내려 회의하게 하였는데, 그때 유신(儒臣) 주희(朱熹)가 의장(議狀)을 올리기를 ‘황성(皇聖)의 의관(衣冠)을 수장(壽藏)하는 곳은 마땅히 명산(名山)에서 널리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대사(臺史)091) 만 믿고서 물·돌·자갈 속에 버려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으니, 옛날에 대사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선왕(先王)의 의관을 수장한 것이 바로 6월이었는데, 그때는 우수(雨水)가 잇따랐을 뿐만 아니라 용이(龍轜)가 출발할 적에는 비가 들어 붓듯이 쏟아졌었으니, 만에 하나 수기(水氣)가 있었다면 배시(陪侍)했던 대소 신민들이 당연히 보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이항복(李恒福)은 어진 정승으로 일컬어졌고 지금의 상신인 이정구(李廷龜)김상용(金尙容)도 명신(名臣)인데 이들이 보고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그 죄가 똑같습니다. 장마가 질 때를 당해서도 이미 수기가 없었다면 지금에 와서 어디서 물이 나오겠습니까. 상신과 중신이 한 사람도 말한 이가 없었는데 유독 심명세(沈命世)만이 오늘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길흉을 가지고 논한다면 폐조의 패륜과 실덕으로도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고 전하께서 인륜을 밝히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거사가 있게 되었으니, 먼저의 능(陵)이 길하다는 것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유념하여 채택해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8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 [註 090]
    경순(景純) : 곽박(郭璞)의 자(字).
  • [註 091]
    대사(臺史) : 지관(地官).

○前判官安士說上疏曰:

臣聞古者冡墳, 謂之壽藏, 取其久遠之意。 上世帝王之葬, 未聞擇地。 孔聖父母合葬之時, 亦無擇地遷改之文, 則凡爲葬者, 只擇高燥不耕之處爲上, 而擇地之事, 乃末世不經之論。 至如吉凶於子孫者, 亦甚無謂。 設有或然之理, 而其術茫昧, 世無明於此者, 地中有水, 亦難明知。 徒信一人之見, 輕遷先王百年之安宅, 其可忍乎? 臣近觀, 士大夫家遷葬之後, 不利者比比有之, 臣以是益懼。 臣嘗見司馬光葬論曰: "吾兄年七十九, 以列卿致仕; 吾年六十六, 忝備侍從; 宗族之從仕者二十三人,視他人之謹用葬書者, 未必勝吾家也。 前年吾妻死, 棺成而斂, 裝辦而行, 壙成而葬, 未嘗以一言, 詢陰陽家, 迄今亦無他故。 吾嘗疾陰陽家立邪說, 以惑衆爲世患。 頃爲臺官, 奏禁天下葬書。" 且曰: "欲知葬書之不足信, 其視吾家。" 且程頤葬說曰: "卜宅兆, 卜其地之美惡, 非陰陽家所謂禍福者也。 地之美者, 土色之光潤, 草木之茂盛" 云, 而甚非其擇地之方位, 決日之吉凶。 其葬之穴, 則尊者居中, 左昭、右穆, 後則或東或西。 其不擇山之形勢,爲子孫者明矣。 楊廷秀, 與李侍講書曰: "景純葬書, 東漢以前無有" 云。 臣未知周公孔子之父祖, 葬於何地, 生此聖賢, 而貴且壽乎? 臣謹按《宋史》, 孝宗山陵, 以土肉淺薄, 下有水石, 有旨會議。 其時儒臣朱熹上議狀云: "壽皇聖德衣冠之藏, 當博求名山, 不宜偏信臺史,委之水石、沙礫之中。" 古之不信臺史之言, 其類此矣。 臣竊伏念, 先王衣冠之藏, 正當六月。 其時不特雨水連仍, 龍輀臨發, 雨下如注。 萬一有水氣, 則陪侍大小臣民, 所觀瞻。 況相臣李元翼沈喜壽李恒福, 世稱賢相, 今相臣李廷龜金尙容, 亦是名臣, 見而不言, 則厥罪惟均。 當淋潦之時, 而旣無水氣, 則到今何從有水乎? 相臣、重臣, 曾無一人言者,而獨沈命世言於今日, 何哉? 若以吉凶論之, 則以廢朝悖倫、失德, 國不滅亡, 而有 殿下明倫、靖社之擧, 則先陵之吉, 據此可知矣。

答曰: "嘉爾爲國之誠。 當留念而採施焉。"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89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풍속-예속(禮俗)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