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신사 박난영이 심양에 있으면서 치계하다
춘신사(春信使) 박난영(朴蘭英)이 심양(瀋陽)에 있으면서 치계하였다.
"신은 정월 초순에 심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중남(仲男)이 찾아와 말하기를 ‘오늘 요토(要土)와 호구(虎口) 두 장수가 유해(劉海)의 아우를 사로잡아 멀지 않은 지역에 와 있다.’고 하면서 신에게 가서 그들을 만나보라고 하기에, 신이 답변하기를 ‘사신은 명을 전할 따름이다. 어찌 감히 다른 일로 한 걸음이라도 내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중남이 신의 군관인 이형장(李馨長) 등 두 사람을 파견하여 줄 것을 청하기에, 신이 그것은 허락했습니다.
하루 뒤에 이형장 등이 돌아와 말하기를 ‘중남과 함께 요토와 호구 두 오랑캐 장수를 60리 밖에서 맞아 만났는데, 호장(胡將)이 포로로 잡은 남녀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였습니다. 이어 한(汗)이 관중(關中)에 들어간 일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한은 몽고 지방으로부터 홍산구(紅山口)에 들어가고 대왕자(大王子)는 마래구(馬來口)로 들어가 혹 장성의 문을 습격하기도 하고 혹 장성을 깨뜨리고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지난해 겨울 10월 그믐부터 향하는 곳마다 큰 승리를 거두어 준화(遵化)·영평(永平)·계주(薊州) 등 30여 성을 잇따라 함락시키고, 북경(北京)의 병사들과 황성(皇城) 밖 5리쯤 떨어진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무찌른 뒤, 북경의 서북쪽으로 70리쯤을 넘어가 양현(梁縣)에서 말을 먹이며 몽고 병사들로 하여금 누가교(樓哥橋)를 지키게 하고 북경을 진격하여 포위해 20여 일을 보냈다. 금년 1월이 되자 한이 군마를 모두 거느리고 영평부(永平府)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는데, 명나라 대장들이 많이 죽었고 원 경략(袁經略)도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홀합(忽哈)·용골대(龍骨大)·중남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사신이 왜 이다지도 더디게 오는가. 이는 필시 우리 나라가 남조(南朝)와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승패를 관망하려고 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하기에, 신이 답변하기를 ‘한이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는 명을 전할 곳이 없을까 염려해서 지체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였더니, 골대(骨大)가 좌우를 물리치고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원공(袁公)030) 이 과연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일이 누설되어 체포당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필시 반간계(反間計)를 쓰는 말일 것입니다.
신이 골대와 중남 등에게 말하기를 ‘가지고 온 국서와 예단(禮單)은 어떻게 전해야 하겠는가?’ 하였더니,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한이 지금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사신은 머물면서 기다려야 하겠다. 돌아오면 사람을 보내 귀국 사람들과 함께 내보내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말하기를 ‘중남이 처음에 말하기를 「진영에 머물고 있는 왕자가 충분히 응접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급히 춘신(春信)의 예를 갖추어 말을 몰아 들어왔는데, 지금 나를 잡아두려고 하니, 이는 크게 서로 믿음이 없는 짓이다.’ 하였더니, 용골대가 마침내 일어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 돌아와서 이왕자(二王子)의 뜻을 전하며 말하기를 ‘중남이 의주(義州)에서 「사신을 응접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한이 오래지 않아 곧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귀국의 사신과 몽고 등 여러 지역의 사자들이 모두 머물러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사신은 어찌하여 이처럼 의심을 내는가. 금나라와 귀국과는 이미 하늘을 두고 맹서하였으니, 모든 일에 부디 의심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66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註 030]원공(袁公) : 원 경략을 이름.
○春信使朴蘭英, 在瀋中馳啓曰: "臣正月初, 到瀋陽。 仲男來言: ‘今日要土、虎口兩將擄劉海弟, 在不遠之地’, 令臣往見之。 臣答云: ‘使臣傳命而已, 奚敢越一步地?’ 仲男請遣臣軍官李馨長等二人, 臣乃許之。 越一日, 馨長等還言: ‘與仲男, 迎見要、虎兩胡於六十里外, 胡將所獲男女萬餘。 仍問汗入關之事則言: 「汗從蒙古地方, 入紅山口, 大王子入馬來口, 或襲長城門, 或穿長城而入。 自前冬十月晦, 所向克捷, 連陷遵化、永平、薊州等三十餘城, 與北京兵, 戰於皇城外五里地敗之, 過北京西北七十里許, 秣馬於梁縣, 使蒙兵守樓哥橋, 進圍北京二十餘日。 至今年正月, 汗盡領軍馬, 退駐永平府, 天朝大將多死, 袁經略亦繫獄」云。’ 越數日, 忽哈、龍骨大、仲男等謂臣曰: ‘使臣來何遲也? 此必以我國, 與南朝方戰, 故欲觀望勝敗, 而然矣。’ 臣答以聞汗之出兵, 恐無傳命處, 仍致稽滯之意, 則骨大辟左右, 附耳語曰: ‘袁公果與我同心, 而事洩被逮耳。’ 此必行間之言也。 臣謂骨大、仲男等曰: ‘所齎國書及禮單, 何以傳致乎?’ 龍骨大等曰: ‘汗今未還, 使臣當留待。 還則發差, 偕貴國人出送’ 云。 臣曰: ‘仲男初言: 「留鎭王子, 足以接應, 故急於春信之禮, 驅馳入來, 今欲拘我, 殊無相信之道也。’ 龍骨大遂起去。 俄頃, 還傳二王子意曰: ‘仲男之在灣上也, 謂應接使臣云者, 果不虛, 而汗不久當還, 故貴國使臣及蒙古等諸處使者, 皆當留待。 使臣奈何以此生疑乎? 金國與貴國, 旣有誓天之盟, 凡事須勿致訝’ 云。"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66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