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2월 4일 갑인 3번째기사 1630년 명 숭정(崇禎) 3년

원주 목사 심명세가 선왕의 능묘를 옮길 것을 상소하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옛날에는 묘를 개수(改修)하지 않았다024) 고 하는데, 이는 어버이의 장례는 마땅히 그 시초에 신중히 해야 된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체백(軆魄)이 편안치 못하게 될 걱정이 있으면 개장(改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예에도 천장(遷葬) 때에 입는 복(服)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의 장례025) 에 장인(匠人)이 광중(壙中)에 나무틀을 잘못 설치하여 곧 무너져 내릴 화가 있게 되자, 정이(程頤)부필(富弼)에게 극력 권하며 수개(修改)할 것을 건백(建白)하여 청하게 하면서 대신 그 상소의 초안을 작성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때가 늦어 결국은 올리지 못하게 되자 항상 충효죄인(忠孝罪人)이라는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송 효종(宋孝宗)의 장례 때에도 대사(臺使)가 속설을 잘못 적용하여 물이 솟는 땅을 잡아 쓰자 주희(朱熹)가 두번이나 상소를 올려 강력히 개복(改卜)할 것을 청했습니다만, 한탁주(韓侂胄) 등이 도리어 요망한 말이라고 배척하여 문도인 채원정(蔡元定) 등을 귀양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영종(寧宗) 때 종묘 제사가 끊겼고 송나라의 운세도 길게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보건대 풍수설 또한 하나의 도(道)가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서 성현의 견해가 결코 허탄한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엄밀하게 자리를 가려 혹시라도 처음에 살피지 못해 물이 솟는 걱정이 있으면 반드시 개복할 것을 생각하여 기어코 온전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인군이 추원(追遠)하는 효성을 가지고 조종(祖宗)을 편히 모시려는 계책을 세우면서 어떻게 그럭저럭 구차하고 소홀하게 함으로써 씻지 못할 후회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목릉(穆陵)은 곧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영원히 계실 현궁(玄宮)인데 당시 총호사(摠護使)가 풍수설을 극도로 배척한 나머지 용렬한 지사(地師)에게 맡김으로써 길하지 못한 땅을 잡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미안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너무도 중대한 관련이 있는 일인 까닭에 감히 앞장서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속으로 통탄할 따름입니다. 우선 지가(地家)의 설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장법(葬法)에서는 바람이 막히고 기(氣)가 응결하는 것을 선결과제로 삼습니다. 그런데 목릉은 혈도(穴道)가 우뚝 드러나고 지형이 비탈지고 험준하고 안쪽에 가려주는 산이 없어 큰 들과 평평히 맞닿아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곧바로 보이니, 이것은 모두가 장법에서 크게 꺼리는 것들입니다.

신이 일찍이 공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고 상신(相臣) 신흠(申欽)과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를 수행하여 봉심(奉審)했는데, 그때 보니 동쪽 사대석(莎臺石) 한 모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발라놓은 유회(油灰)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수복(守僕)에게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술방(戌方)·자방(子方)·축방(丑方) 등에 사초(莎草) 아래쪽에서 장마가 질 때면 물이 샘솟듯 솟아난다.’고 하였습니다. 또 재랑(齋郞)의 경력이 있는 자의 말을 듣건대 혹 연일 비가 내리면 무석(武石) 아래쪽에서 물이 새어나와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땅속에 물이 있어 돌과 흙으로 쌓은 축대에 막혀 있다가 콸콸 솟아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장법상 이미 저토록 의심스럽고 능(陵)에 의심됨이 또 이와 같으니, 이 어찌 선왕의 체백이 안정될 땅이겠으며 종묘 사직의 혈식(血食)을 구원하게 할 도리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영릉(英陵)026) 의 장지를 상고해 보건대 처음에는 광주(廣州)대모산(大母山) 아래에 있다가 그 뒤에 여주(驪州)로 옮겼는데, 그 당시 개장(改葬)에 대한 의논들이 필시 국승(國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해오는 소문에 의하면, 처음 영릉에 장례를 지낸 뒤로 문묘(文廟)의 재위가 짧았고 노산(魯山)이 양위(讓位)하였으며 6명의 대군(大君)들이 잇따라 일찍 죽는가 하면 덕종(德宗)이 또 오래 살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 모두들 대모산의 능이 불길하다고 탓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개장하는 논의를 결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종(睿宗) 원년에 여주로 옮겼는데, 여주는 풍수학상으로 국가의 능묘 중 첫번째로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이것이 어찌 조종의 깊고 먼 계획이 아니겠으며 나라의 운세가 영원히 힘입을 복록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국가의 여론을 살피건대 대부분이 목릉을 이장하는 논의를 절대로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들 하고 있는데, 신 또한 이것을 밤낮으로 애태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땅에 묻히신 선왕의 체백도 불안한 바가 있을 것이며 하늘에 계신 영혼도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번에 우연히 듣건대 목릉의 방위가 유좌(酉坐)여서 금년이야말로 묘를 옮기기에 아주 길하며 만일 올해를 넘기면 계유년 이전은 모두 불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에도 속히 도모하여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주희가 전후에 걸쳐 올린 산릉에 대한 장차(章箚)를 상고하시어 유념해서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이 아뢰기를,

"일이 매우 중대하니 이 방면의 술(術)을 아는 자들을 널리 불러 정밀히 살피고 강정(講定)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6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 역사-전사(前史)

  • [註 024]
    묘를 개수(改修)하지 않았다 : 공자(孔子)가 방(防)에 어버이 묘를 합장(合葬)했을 때 제자들이 생각보다 늦게 돌아오자 그 까닭을 물으니 "묘가 무너져서 그랬다."고 하였다. 이에 공자가 아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내가 듣건대 옛날에는 어버이 묘를 개수하지 않았다……."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
  • [註 025]
    송 인종(宋仁宗)의 장례 : 인종(仁宗)의 장례 때에 영종(英宗)이 병환 중이었는데, 황급한 상황에서 능(陵)의 제도를 모두 장인(匠人)의 손에 맡겼다. 그런데 광(壙)의 천개(天蓋)를 큰 바윗덩이로 하고 그것을 목재(木材)로 받치게 하였으므로, 정이가 백년이 채 못되어 반드시 공중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하면서 태후(太后)를 합장할 때 이런 위험을 제거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의 주(註)에 부필(富弼)의 간곡한 청에 의해 상소문을 지었으나 부필이 그것을 올리지 못하였다고 하였다.《이정전서(二程全書)》 이천문집(伊川文集) 대부필상신종황제소고(代富弼上神宗皇帝疏稿).
  • [註 026]
    영릉(英陵) : 세종 대왕의 능.

原州牧使沈命世上疏曰:

臣聞古者不修墓者, 明其葬親, 當謹之於始也。 有體魄不安之虞, 則不可不改, 故禮有遷葬之服, 良以此也。 昔 仁宗之葬也, 匠人於壙中, 誤設木械, 將有崩壓之禍, 程頤力勸富弼, 建請修改, 至於代草其疏。 適後時而不果, 上每有忠孝罪人之歎。 孝宗之葬也, 臺史誤用俗說, 用於水泉之地, 朱熹再上章, 力請改卜, 而韓侂冑等, 反以妖說斥之, 竄其徒蔡元定等。 其後寧宗絶祀, 祚不長。 由此觀之, 風水之說, 亦或一道, 聖賢所見, 決非虛誕。 尋常士夫之家, 尙且極擇, 如或不審於始, 而有水泉之患, 則必謀改卜, 期於盡美。 況以人君追孝之誠, 爲祖宗安厝之計, 豈可因循苟簡, 以貽千萬世不可復之悔哉? 臣竊惟穆陵宣祖大王萬年之玄宮, 而當時摠護之臣, 極詆風水之說, 付之庸師, 用此不吉之地。 至于今日, 人人皆知未安, 而事係重大, 莫敢先發, 臣竊痛焉。 姑以地家之說論之, 則葬法以藏風、聚氣爲先, 而穆陵穴道騰露, 地勢斗峻, 內無關欄, 平臨大野, 直見水去, 此皆葬法之大忌也。 臣曾忝工曹參判, 隨故相臣申欽、禮曹判書臣李廷龜奉審時, 東邊莎臺石一隅破缺, 塗縫油灰有剝落處。 問諸守僕, 皆曰: "戌、子、丑等方莎草, 下雨潦之時, 則水湧如泉。" 又聞曾經齋郞者之言: "或連日下雨, 則武石之下, 水洩而流" 云。 此必地中有水, 而阻於石土之築, 仍成湧沸, 可的知也。 夫葬法之可疑, 旣如彼; 陵上之可疑, 又如此。 此豈先王體魄安寧之地, 宗社血食久遠之圖哉? 臣竊稽英陵之葬, 初在廣州 大母山下, 而其後遷卜驪州。 其時改葬之議, 必詳在國乘。 未知何故而遷也, 但以流傳所聞, 則英陵初葬之後, 文廟短祚, 魯山讓位, 六大君相繼夭促, 德宗又不永年, 故當時咸咎大母山宅兆不吉, 遂決改卜之議。 睿宗元年, 遷用驪州, 而驪州風水, 稱爲國陵第一, 此豈非祖宗深遠之計, 國祚永賴之福也? 今日國論, 多以穆陵遷卜之議, 必不可已, 臣以此, 日夜耿耿。 竊恐先王在地之魄, 有所不安, 而在天之靈, 不能無望於殿下也。 玆者偶聞, 穆陵方位坐酉, 今年遷兆協吉。 若過今年, 則癸酉以前, 皆稱不吉云, 此又不可不亟圖遷卜者也。 伏乞聖明, 取考朱熹前後山陵章箚, 留神省察焉。

上下其疏于禮曹, 禮曹請議于大臣。 大臣以爲: "事極重大, 請廣召知此術者, 精審熟講", (上下其疏于禮曹, 禮曹請議于大臣),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64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