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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1월 27일 정미 1번째기사 1630년 명 숭정(崇禎) 3년

조강에서 《서전》을 강하면서 낭관, 왕세자 책봉, 능침의 오향 등에 관해 논하다

조강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괜히 그 말만 꾸미려 해서는 안 되고 실천해야 마땅하니, 군신 상하가 이 점을 서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편(篇)014) 가운데, ‘심상하게 여기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惟庸罔念聞]’고 하였다. 지금 아름다운 말들이 적지 않은데도 제대로 듣고 따르지 못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

하니, 영사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조정 신하들이 경계하며 아뢰는 일들과 초야의 충직한 말들이 모두 겉치레로 끝나버리는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하였다. 이정구가 또 아뢰기를,

"광해군 때의 사기(史記) 1백 80개월 분량 가운데 1백 30개월의 것은 이미 중초(中草)015) 를 마쳤습니다만, 나머지 50개월의 분량은 아직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기가 중단될까 두렵습니다. 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현재 겸춘추(兼春秋)를 겸대하지 않고 있는데, 반드시 대학사(大學士)가 겸대한 뒤에라야 사국(史局)의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지경연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신이 정정경세가 낭관의 추천 제도에 대해 아뢴 일을 들었는데, 잘못 전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이(李珥)가 계미년간에 전장(銓長)이었는데, 그 때 과연 파격적인 분부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랬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미 경연에서 분명히 말했던 것인데, 주서(注書)가 기록한 것은 크게 본래의 뜻을 잃고 있었다. 경연에서 나온 말들은 좋거나 나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후세에 전해야 하는 것인데, 기록한 것이 이처럼 실상을 잃고 있다면 《정원일기(政院日記)》 모두 믿을 것이 못되고 말 것이다. 다만 근래 경연에서 신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너무 빠른 듯싶은데, 뛰어난 문장력과 속필(速筆)의 솜씨를 가졌다 할지라도 다 써내려가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들으니 일을 아뢰는 구례(舊禮)는 반드시 아뢸 말만 간추려 진달하면서 천천히 말을 해 사관이 다 쓰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말을 빨리 하는 병통이 있으나 경연의 신료들은 더욱 심하다. 지금부터는 상하가 모두 마땅히 유념하여 사관이 받아 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원수(袁帥)모장(毛將)016) 의 일로 인해 의심을 품고 우리 나라의 공로(貢路)를 바꾸어 각화도(覺華島)에 배를 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로(水路)가 등주(登州)보다 배나 멀 뿐 아니라 배는 큰데 수심이 얕아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옛길대로 하지 않으면 사행(使行)이 통하기 어렵게 될 뿐 아니라 중국의 상인들도 장차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현재 남쪽과 북쪽의 두 적을 응수해야 하는 때에 중국의 물화(物貨)가 아니면 결코 모양을 갖추기가 어려우니, 사신이 왕래할 때에 혹 주청(奏請)하거나 혹 예부에 이자(移咨)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많아 아직 왕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일을 못했습니다. 이는 대체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가 어려워 그랬던 것이지만 지금은 비록 법식대로 청한다 하여도 중국 사신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찌 응당 행해야 할 막대한 일을 오래도록 미루어 둘 수 있겠습니까. 이번 동지사(冬至使) 편에 겸하여 주청하게 하고 또 일을 아는 역관(譯官)을 데리고 가게 하여 면복(冕服)과 의장(衣章)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물력이 이와 같아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매우 많으며 만약 중국 사신이 오지 않을 경우 예(禮)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니 우선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정구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간이 능침에 지내는 오향(五享)에 대한 일을 논하자 상께서 정지할 수 없다고 분부하셨습니다. 반정 초기에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있을 때 소신도 종백(宗伯)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신들이 의논해 결정하기를 ‘약·사·증·상(禴祠蒸嘗)017) 은 태묘에 지내는 제사이니, 능침에 쓰는 것은 잘못된 예이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복계(覆啓)하여 줄일 것을 청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해조가 마침내 다시 거행할 것을 청하자 대간이 이렇게 논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가 반복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어지러워집니다. 더구나 예는 충분해도 경(敬)이 부족한 것보다는 경이 충분하고 예가 부족한 것이 나은 데이겠습니까."

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배사(拜辭)하러 온 수령인 춘천 부사(春川府使) 김덕함(金德諴) 등을 인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6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註 014]
    편(篇) : 《서전》 태갑(太甲) 상(上)을 말함.
  • [註 015]
    중초(中草) : 정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정한 원고.
  • [註 016]
    모장(毛將) : 모문룡(毛文龍).
  • [註 017]
    약·사·증·상(禴祠蒸嘗) : 사시(四時)에 지내는 제사.

○丁未/朝講《書傳》。 上曰: "君子之道, 不當徒飾其言, 當務其實。 君臣上下, 以此相勉可矣。 篇中有曰: ‘惟庸罔念。’ 聞今之嘉言非一, 而不能聽從, 予竊慙焉。" 領事李廷龜曰: "廷臣告戒之事, 草野忠直之言, 盡歸虛套, 則臣等之罪也。" 廷龜又曰: "光海時史記, 一百八十朔內, 一百三十朔, 則已修中草, 其餘五十朔, 則尙未畢修, 恐其史記中絶也。 大提學鄭經世時未帶兼春秋。 必太學士兼帶後, 可修史局之事也。" 上曰: "然。" 知經筵李貴曰: "臣聞鄭經世言郞薦事, 而有誤傳者。 李珥於癸未年間爲銓長, 其時果有破格之敎矣。" 上曰: "予亦知其然, 故旣已明言於筵中, 而注書所記, 殊失本意。 筵中說話善惡, 皆當傳於後世, 所記之失實如是, 則《政院日記》, 皆不足信矣。 但近來筵臣言語, 似其疾數, 雖以雄文速筆, 亦難及書。 予聞奏事舊例, 必擇可言者陳之, 且徐徐致辭, 以俟史官訖書而言之。 予亦有疾言之病, 而筵臣則尤甚。 其自今, 上下皆當留念, 使史官得書。" 廷龜曰: "帥以毛將之故, 有疑慮之心, 改定我國貢路, 使下陸於覺華島。 水路之遠, 倍於登州, 而且水淺舟大, 常多致敗。 若不從前路, 則非但使行難通, 中原商賈, 亦將阻絶。 目今南北兩敵酬應之際, 若非上國物貨, 則決難成形。 宜於使臣往來之時, 或奏請、或移咨禮部。" 上曰: "然。" 廷龜曰: "國家多事, 尙未行王世子請封之擧, 蓋以天使接待爲難, 而今雖準請, 天使則未易出來。 (且)〔然〕 豈可久寢應行莫大之事乎? 今於冬至使兼奏請, 又以解事譯官帶行, 請賜冕服、衣章似當。" 上曰: "目今物力如此, 民弊甚多。 若天使不來, 則於禮亦歉, 姑宜待之。" 廷龜曰: "頃者, 臺諫論陵寢五享事, 而自上以不可停止爲敎。 反正初, 李元翼方在朝, 小臣亦冒居宗伯, 其時大臣議定以爲: ‘禴、祀、烝、嘗, 太廟之祭, 而用之陵寢, 非禮’ 云, 故以此覆啓請減矣。 今者, 該曹遽請復設, 宜臺諫之有是論也。 禮數則煩, 煩則亂矣。 況與其禮有餘, 而敬不足, 不若敬有餘, 而禮不足者乎?" 講罷, 上引見拜辭守令春川府使金德諴等。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6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