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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11월 20일 신축 1번째기사 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고변서’로 인해 진명생과 양경홍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다

가도사(假都事) 한득복(韓得福)이 북도에 이배(移配)된 죄인 장세철(張世哲)·진명생(陳命生) 등을 압송해 오면서 18일 낭천현(狼川縣)에 당도하자, 진명생이 언서(諺書)로 된 서찰을 도사에게 몰래 바쳤는데 이는 곧 고변서(告變書)였다. 그 글 속에 "죄인 양경홍(梁景鴻)호(胡)에 투항한 양계현(梁繼賢)과 더불어 역모하였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진명생·양경홍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진명생이 공초하기를,

"양경홍과는 당초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동관(潼關)에 충군(充軍)된 출신 노돈무(盧敦武)가 와서 양경홍이 만나자는 뜻을 전하면서 하는 말이 ‘귀양사는 죄인 진사(進士) 이극규(李克揆)양경홍과 절친한데 항상 네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으므로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이극규가 와서 역시 ‘양경홍이 네가 의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만나고자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내 비록 의기가 있기로소니 양경홍이 무엇 때문에 만나려 하는가? 내가 지금 안치(安置) 중에 있는데 또 어찌 왕래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극규가 말하기를 ‘너는 사부(士夫)가 아닌데 가까운 곳을 왕래하는 데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신이 양경홍에게 가서 남초(南草)086) 를 구하였는데, 양경홍이 흔쾌히 만나 주면서 말하기를 ‘서로 만나기가 어찌 이리 늦었는가? 내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또 가서 만났는데, 양경홍이 그의 첩을 내보내고 함께 자면서 귀에 대고 말하기를 ‘유원(柔遠)에 사는 양계현은 곧 나의 일가로서 절친한 사람인데 이 사람을 통해 오랑캐 내부의 소식을 듣고 있다. 벌써 양계현을 시켜 오랑캐에게 통보하였으니 오래지 않아 의당 회답이 올 것이다. 그들이 만약 산북(山北)에 오면 내가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려고 한다. 너에게 전마(戰馬)가 없으면 두 마리의 소(牛)를 너의 말값으로 보태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이어 칼을 빼어 창문을 치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이 보검(寶劍)이 있으니 한 사람은 죽일 수 있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오랑캐들은 짐승 같은 놈들이니 지금 비록 투항하더라도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양경홍이 ‘오랑캐가 산북에 올 것 같으면 즉시 너에게 통고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죄인을 이배(移配)시키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장세철을 가서 만났는데, 임기지(任器之)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이 묻기를 ‘이배를 한다는 일은 무슨 일인가?’ 하였더니, 장세철이 말하기를, ‘오랑캐에게 투서(投書)한 변이 있어 우리가 모두 위태롭게 되었으나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양계현양계인(梁繼仁)이라고도 하는데 유원 사람으로 어릴 때 포로가 되어 자호(者胡)를 따라 빈번하게 왕래하던 자입니다. 양경홍이 이로써 죄인 최배선(崔拜善)에게도 말하였으므로 이번 이배된 뒤에 최배선도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양경홍진명생과 대질시켰는데, 서로 변명하여 다투다가 형문 받기에 이르러 실토하기를,

"작년 9, 10월 사이에 이극규·정운백(鄭雲白)·한옥(韓玉)·신상연(申尙淵) 등 4명이 신에게 말하길 ‘의복을 준비해 줄 터이니 꼭 오랑캐에게 가라.’고 하였으나 신은 노친(老親)이 있고 호어(胡語)를 알아 듣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 뒤 정운백 등이 말하기를 ‘네가 호어를 알지 못하나 지금 마침 함께 갈 사람을 구하였는데 호인(胡人)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인마와 행구(行具)도 준비 안 된 것이 없으니 너는 속히 가라.’ 하였는데, 신은 사고가 있다고 칭탁하고 머뭇거리며 시일을 넘겼습니다.

금년 봄 자호(者胡)가 나왔는데 양사복(梁嗣福)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한옥·정운백·이극규·한회(韓會)·신상연 등이 양계현에게 노자를 주어 흉서(兇書)를 부쳐 보냈는데, 한옥정운백이 상의하여 글을 짓고 이극규가 썼다. 그 글의 내용은 「적당들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 강홍립(姜弘立)이 오게 되었다기에 우리들은 서로 축하하였는데, 마침내 침략이 정지되었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다. 모름지기 속히 나와 달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양사복이 또 말하기를, ‘정운백이 별도로 한 통의 서찰을 써서 한윤(韓潤)에게 보내 이르기를 「만약 오랑캐를 이끌고 오면 마땅히 향도할 것이며 군사를 모아 투항하겠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수창(首倡)한 자는 한옥·정운백 등 4 명이고 한회는 출발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알았으며, 최배선은 침술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정운백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장세철이 공초하기를,

"지난달 15일에 고개를 넘어 회양부(淮陽府)에서 잤는데, 진명생이 말하기를, ‘귀양살이 중에 겨우 한 자식을 얻어 7살이 되었는데 양경홍오랑캐에게 투서를 하여 부자가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비분함을 이길 수 없다.’고 하므로, 신이 묻기를 ‘양경홍이 누구와 함께 하였는가?’ 하니, 진명생이 ‘역시 양가 성을 가진 자가 오랑캐에게 출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시 권하여 도사(都事)에게 보냈는데, 도사는 그때 길떠날 차비를 하고 있으면서 별다른 치계(馳啓)하겠다는 기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도사에게 ‘진명생이 고한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인데 어찌 지금까지 지체하는가?’ 하였더니, 도사가 ‘금성(金城)에 도착하면 치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과 진명생은 이날부터 길이 나뉘어졌는데, 떠날 때에 신이 지필(紙筆)을 진명생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관아가 비었을 때는 지필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이것으로 속히 치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사는 3일이 넘도록 치계하지 않으므로 신이 다시 재촉하였습니다. 신이 함께 모의하지 않았음은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을 것입이다."

하였다. 양경홍이 재차 공초하기를,

"이극규·정운백·한옥·신상연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인마가 벌써 장령(長嶺)에서 기다리고 있고 오늘이 매우 좋은 날짜이니 속히 들어가라.’고 하기에, 신은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가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후 한회(韓會)가 신의 집에 와서 ‘정운백 등이 양계현에게 노자를 주어 그 흉서를 벌써 부쳐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상연이 공초하기를,

"임길후(任吉後)가 신을 만나고자 하므로 신이 가서 임길후를 만났습니다. 임길후자호(者胡)가 갈 때에 네가 한윤(韓潤)의 소식을 물어 볼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파총(把摠) 황계언(黃繼彦)이 출입할 수 있으니 이 사람을 시켜 물어 봐야 할 것이다.’ 하였더니, 임길후가 ‘네 말이 그럴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임길후를 만났는데, 임길후가 ‘벌써 황계언에게 물어 보았다.’고 하고, 또 ‘한윤 아비의 백골이 경흥(慶興)에 묻혀 있는데 제사 지내러 올 수 있겠느냐는 뜻을 자호 편에 통문(通問)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황계언을 시켜 통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뒤 황계언이 신을 만나 말하기를 ‘임 영공(任令公)이 나를 시켜서 서찰을 가지고 정랑(正郞) 임흥후(任興後)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임흥후가 이번 모의를 주장한 자이므로 통서(通書) 한 통과 한윤에게 보내는 서찰 한 통을 이영남(李英南)을 시켜 자호의 행차에 부쳐 보낸 것입니다."

하였다. 정운백이 공초하기를,

"흉서를 부쳐 보낼 때에 한옥이 글을 짓고 한회가 썼습니다."

하였고, 이극규도 승복하였다. 최배선이 공초하기를,

"신은 침구(鍼灸)의 기술을 조금 아는데 정운백이 병(病)을 보아 달라고 하기에 신이 즉시 가서 만났더니, 정운백이 술을 빚고 빈객을 모아 김이일(金以一)·한옥·양경홍·정운서(鄭雲瑞) 등과 함께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양경홍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우습다 삼각산아

옛임금은 지금 어디 있는가

지난번에 강도를 만나서

강화도에 가서 있지."

하였으며, 정운백이 또 하나의 노래를 불렀는데, 저들은 모두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 노래에,

"여덟 칸 크고 큰 집

불강도 들어왔나

재물이야 말할 것 없고

주인이나 상치 않았나."

하였습니다. 양경홍의 일가인 양가(梁哥)라는 자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자호를 따라 왕래하였으므로 이전방(李傳芳)이 신을 시켜 서찰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전방이 말하기를, ‘이번에 오랑캐들이 나올 것인데 네가 양경홍과 함께 사생(死生)을 같이할 것 같으면 너도 이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운백·한회·신상연·이극규·양경홍·최배선 등은 모두 승복하고 복주(伏誅)되었으며, 정운서·임길후·한옥 등은 모두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국청이 아뢰기를,

"임기지의 경우, 진명생이 말하기를 ‘임기지는 일찍이 저들을 보내 오랑캐의 사정을 탐지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하였으며, 흉서에 대해 의논한 일에도 드러난 단서가 없습니다. 임흥후의 경우, 황계언이 서로 알지 못함을 명백하게 말하였고, 노돈무의 경우는 양경홍진명생을 만나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을 뿐입니다. 양사복(梁嗣福)양계현의 아비로서 서찰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의당 형신(刑訊)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 예재(睿裁)를 기다립니다."

하니, 모두 풀어 주되 사복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며, 진명생은 당상(堂上)의 품계에 승진시키고 또 적몰한 노비와 전택(田宅)을 주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4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어문학-어학(語學) / 변란-정변(政變)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 사법-행형(行刑)

○辛丑/假都事韓得福, 押來北道移配罪人張世哲陳命生等, 十八日到狼川縣, 陳命生密納諺書於都事, 乃告變書也。 其書曰:

罪人梁景鴻, 與投梁繼賢, 爲逆謀云。

遂拿陳命生梁景鴻等鞫之。 命生供稱: "與景鴻初不相識。潼關充軍出身盧敦武, 來傳景鴻欲見之意, 蓋謫居罪人進士李克揆, 與景鴻相切, 常言: ‘汝是壯士, 故欲見之矣。’ 厥後李克揆來見, 亦言: ‘景鴻聞汝有義氣, 欲與相見’ 云。 臣答云: ‘吾雖有義氣, 景鴻以何故欲見乎? 吾方在安置中, 又何能往來耶?’ 克揆曰: ‘汝非士夫, 往來近地, 有何所妨?’ 上年冬, 臣往索南草於景鴻, 則景鴻欣然相接曰: ‘何相見晩也? 吾欲從容談話。’ 今年春又往見之, 則景鴻屛去其妾, 仍與之同寢, 付耳言曰: ‘柔遠梁繼賢, 乃吾姓親, 而相切者。 因此人得聞中消息, 已使繼賢, 通于中, 不久當有回答矣。 賊若來山北, 則吾欲導賊前去。 汝無戰馬, 則當以兩牛, 助爾馬價。’ 仍拔劍擊窓曰: ‘吾有此寶劍, 可殺一人。’ 臣答云: ‘賊是犬羊, 今雖投入, 何能免於死乎?’ 景鴻曰: ‘此虜若來山北, 則卽當通告於汝。’ 厥後, 聞有罪人移配之擧, 往見張世哲, 則任器之亦在座。 臣問曰: ‘移配之擧, 是何事耶?’ 世哲曰: ‘中有投書之變, 吾輩皆危矣。 若不知耶?’ 臣始覺景鴻前日之言, 而衆中, 不敢發言。 大槪梁繼賢, 或稱繼仁。 本以柔遠人, 兒時被擄, 隨者胡頻頻往來者。 景鴻以此亦言於罪人崔拜善, 故今番移配之後, 拜善亦甚憂慮云。" 梁景鴻命生面質, 互相爭辨。 及受刑, 乃吐實以爲: "去年九十月間, 李克揆鄭雲白韓玉申尙淵等四人, 謂臣曰: ‘當備給衣服, 須往中。’臣以有老親, 且不解語爲辭。 其後雲白等言: ‘汝雖不解語, 而今幸募得同往者, 與胡人無異。 且人馬、行具, 無不措辦, 汝可速往。’ 臣託以事故, 拖過時月。 今年春者胡出來, 梁嗣福來言於臣曰: ‘韓玉鄭雲白李克揆韓會申尙淵等資給繼賢, 付送兇書, 而韓玉鄭雲白相議爲書, 李克揆書之。 其書中措語則 「賊黨遍滿一國, 姜弘立之來也, 吾輩相賀, 而竟止侵掠, 深可惜也, 須速出來。」 云。’ 梁嗣福又言: ‘鄭雲白別作一書, 送于韓潤曰: 「若引而來, 則當作導, 聚兵投入。」 云。’ 首倡則韓玉鄭雲白等四人, 而韓會則臨其行, 而始知之, 崔拜善則以針術往來, 因聞於雲白處云。" 張世哲供云: "去月十五日踰嶺, 宿淮陽府, 陳命生曰: ‘謫居中僅得一子, 纔七歲, 而以梁景鴻之投書中, 父子分離, 不勝悲憤。’ 云。 臣問曰: ‘景鴻與誰爲之乎?’ 命生曰: ‘亦有姓者, 出入中矣。’ 臣曰: ‘汝旣發言, 不可還諱。’ 卽勸送于都事, 則都事方治行, 別無馳啓之奇。 臣言於都事曰: ‘命生所告之事極重, 何至今稽滯乎?’ 都事答以到金城馳啓云。 臣與命生, 自此日分路, 臨行, 臣給紙筆於命生曰: ‘空官時, 得紙筆不易, 以此須速馳啓’ 云, 而都事過三日尙不馳啓, 臣更趣之, 臣之不同謀, 據此可知" 云。 景鴻再供云: "李克揆鄭雲白韓玉申尙淵等, 謂臣曰: ‘人馬已待於長嶺。 今日極吉, 須速入往’ 云, 臣答以 ‘待秋間當往矣。’ 其後韓會到臣家言曰: ‘雲白等資送繼賢, 已付其兇書’ 云。" 申尙淵供稱: "任吉後欲見臣, 臣往見吉後, 吉後云: ‘者胡去時, 汝可問韓潤消息耶?’ 臣答以 ‘把摠黃繼彦可以出入, 宜因此人問之。’ 吉後曰: ‘爾言然矣。’ 其後見吉後, 則吉後曰: ‘已問于繼彦矣。’ 且曰: ‘之父骨, 埋在慶興, 可以來祭之意, 因者胡通問耶?’ 臣曰: ‘可使繼彦通之。’ 其後繼彦見臣曰: ‘令公使吾持書, 往見正郞興後處。’ 蓋興後專主此謀者, 以通書一度及抵韓潤書一度, 使李英南付送于者胡之行。" 鄭雲白供稱: "付送兇書時, 韓玉製之, 而韓會書之云。" 李克揆亦承服。 崔拜善供稱: "臣粗解鍼灸之術。 鄭雲白以病邀之, 臣卽往見, 則雲白釀酒會客, 與金以一韓玉梁景鴻鄭雲瑞等同飮。 景鴻作歌唱之曰: ‘笑矣三角山, 舊主今安在? 頃者遇强盜, 往在江華島。’ 雲白又唱一歌, 渠輩皆稱善。 其歌曰: ‘八間大大廈, 火强盜入云耶? 財物不足言, 得無傷主人耶?’ 景鴻之族姓者, 被擄中, 隨者胡出來, 故李傳芳使臣傳書。 臣問其由則傳芳曰: ‘賊今當出來, 若與景鴻同死生, 則汝亦當有利’ 云。" 鄭雲白韓會申尙淵李克揆梁景鴻崔拜善等, 竝承服伏誅。 鄭雲瑞任吉後韓玉等竝死於杖下。 鞫廳啓曰: "器之命生以爲: ‘器之曾無送渠, 探知虜情之事。’ 兇書通議, 亦無現出之端。 興後繼彦明言其不曾相識, 敦武則只傳景鴻欲見命生之意。 至於嗣福則以繼賢之父, 與聞傳書之事, 似當刑訊。 竝竢睿裁。" 命皆疏釋, 嗣福則絶島定配, 陞陳命生堂上資, 且賜籍沒奴婢、田宅。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54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어문학-어학(語學) / 변란-정변(政變) / 외교-야(野) / 어문학-문학(文學)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