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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10월 9일 경신 1번째기사 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대사간 이식이 붕당에 관해 차자를 올리다

대사간 이식(李植) 등이 상차하기를,

"국가가 민사(民事)를 걱정하여 수령을 신중히 선발하고 아울러 시종(侍從)으로 번갈아 임명하는 것은 참으로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평을 잃거나 맡기는 방법이 타당치 못하고 구차스레 견책의 벌로 보낸다면 인정이 염려하고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임명를 받은 사람도 어떻게 시책을 펼 수 있겠습니까.

장유(張維)는 총재(冢宰)를 지낸 관료로 문병(文柄)을 주장하고 있으니 대신의 다음이요 귀신(貴臣)의 우두머리이니, 비록 실수가 있었더라도 의당 예의로써 물리칠 일입니다. 나주(羅州)는 4품 관원을 제수하는 곳으로 우후(虞候)나 도사(都事)도 그 윗지위에 있게 되고 군(郡)·현(縣)·진(鎭)·보(堡)가 동등하게 여기니, 예모에 있어서나 문첩(文牒)하는 사이에 욕됨이 심할 것입니다.

옛날 당(唐)·송(宋) 시대의 폄관(貶官)은 아래로 사마(司馬)나 사호(司戶)에까지 이르렀으나, 공사(公事)에는 서명하지 않고 원외(員外)의 녹봉을 받게 하였는데, 이것은 존귀(尊貴)의 체면에 크게 손상됨이 없는 것이니, 관원 등급의 일에 대해 옛사람들이 어찌 조심스럽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번 장유의 폄관은 전례에 없던 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박정(朴炡)유백증(兪伯曾) 등이 오래도록 하읍(下邑)에 머물렀다가 겨우 시종으로 돌아왔는데, 수령으로 번갈아 차임함에 있어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번에 차례대로 특별히 제수하면서 성의(聖意)에 나무라고 노여워한 뜻이 없지 않았으니, 이것이 곧 조신(朝臣)들이 놀라워하고 사론(士論)이 저상되는 까닭입니다. 성명께서 전후로 내린 간절한 유지에 늘 붕당을 경계시켰으니 이미 나뉘어졌던 붕당도 합하려고 하는데, 설령 박정유백증의 무리가 스스로 서로 다름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청명한 조정의 사부(士夫)로서 누가 함께 등지고 나뉘어져 서로를 배척하려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박정 등이 애초에 한두 사람의 과오있는 자를 적발하였을 뿐인데 마침내 분당의 말까지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 처신한다면 저절로 오래되면 잊게 되어 다시 흔적이 없을 것이니, 비록 경솔한 말이 새로 나오더라도 마침내 성조(聖朝)의 근심이 되지는 않을 것을 신들은 확신합니다.

지난번 대신들이 탑전에서 나만갑을 계론(啓論)했던 뜻은 외직으로 보내어 억제시켜 보려던 것에 불과하며, 그들이 사제(私製)에서 논한 바를 들어봐도 역시 전랑(銓郞)의 의망을 정지시키고 지방 수령에 제수하고자 했을 따름이었습니다. 대신은 국사를 공정하게 다스림에 있어 백성의 원망을 떠맡으며 할 말을 모두 다 말하니, 어찌 마음속을 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있겠으며 경중을 짐작해서 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죄주기를 한층 가중시켜서 그 여파가 연루자에게 점차 확대되어 시끄러운 단서가 어지럽게 생겨나 도리어 대신들로 하여금 미안한 바가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당론을 진정시키고 알맞게 다스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붕당을 미워하여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뜻이나 제거하는 방법을 돌아보건대 미진한 것 같습니다. 당 문종(唐文宗)이 ‘하북(河北)의 도적을 없애기는 쉽거니와 조정의 붕당을 없애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만승의 위엄으로 수십 명의 서생(書生)을 몰아냄을 어찌 강한 도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어렵게 여겼겠습니까. 그 형세를 살펴보면 마침내 매우 어려운 것이 있기 때문이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은 언제까지나 탄식할 일입니다. 옛날부터 사대부로서 붕당이란 지목을 당한 자는 대부분 총명하고 재예가 있어 대중들의 추앙을 받던 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임금이 이들을 알맞게 화합시키고 분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비록 같은 무리라도 이견이 있기도 하고 이견이 있다가 합하기도 할 것이나 마침내 대동(大同)이 되기에는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혹 붕당이란 명목에 의거하여 긁어 없애려는 데에만 힘써 오늘 내일 날마다 한 명씩 쫓아내고 금년 명년 해마다 한 당씩 없앤다면 조정 내의 인물은 땅을 쓴 듯 없어지고 등용되는 자는 모두 아첨하고 재주없는 무리에 불과할 것이니 국가가 공허하게 된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옛날 소식(蘇軾)은, 왕안석이 풍속을 동일하게 하려는 폐단을 비난하여 척박한 땅에 나는 황모(黃茅)와 백위(白葦)에 비교하였는데, 당파를 없애는 어려움도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사론(士論)이 둘로 갈라지는 것은 국가의 큰 불행으로, 어진이와 사악한 자가 진퇴하는 자취를 쉽게 밝힐 수 없습니다. 우(牛)·이(李)의 시비(是非)074)원우(元祐) 연간의 세 당파075) 같은 것은 당시에 능히 평정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서도 결정짓지 못한 일입니다. 가령 그 당파들을 모두 없애버렸다면 이덕유(李德裕)의 정술(政術)이나 정이천(程伊川)의 정학(正學)도 의당 배척되는 중에 포함되었을 것이니 세도(世道)에 있어 어떠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붕당의 근심과 같은 경우는 유래가 있습니다. 전랑(銓郞)의 권한이 막중하여 국정이 하부에 맡겨진 셈이 되었으므로 기백이 예리한 신진(新進)들이 쉽게 흔단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는 실로 백년 동안 흘러온 폐단이며 반정(反正) 이후로도 다 없애지 못한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묘당의 보좌하는 중신들과 함께 일대 현재(賢才)들의 잘잘못과 장단점을 강론하여 낱낱이 안 다음 그들을 배양시키고 취사 선택하여 품계와 서열을 분별하여 직임을 맡겨서 의심하지 마소서. 그러면 어찌 붕당과 색목(色目)이 저절로 소멸될 뿐이겠습니까. 천지가 서로 통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사람이 못났다 해서 말까지 버리지는 마소서. 그러면 조정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올린 차자는 잘 보았다. 너희들이 당파를 없애는 것은 당 문종(唐文宗)도 어렵게 여긴 것이라 하였거늘, 나는 문종보다 휠씬 혼미하고 용렬한데도 없애려고 하니 오활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당파를 세우고 그 당만을 옹호하는 무리들을 축출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국가가 멸망된 뒤라야 그만둘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너희들은 허물삼지 말라. 그리고 차자 끝에 진달한 말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

  • [註 074]
    우(牛)·이(李)의 시비(是非) : 당(唐)의 목종(穆宗)에서 무종(武宗) 대에 조신 우승유(牛僧孺)·이종민(李宗閔)·이덕유(李德裕) 부자 사이에서 서로 붕당을 만들어 40여 년간 논쟁한 것을 이름. 일설에는 우승유와 이봉길(李逢吉)로도 봄. 《신당서(新唐書)》 권 180 이덕유전(李德裕傳).
  • [註 075]
    원우(元祐) 연간의 세 당파 : 송 철종(宋哲宗) 때의 세 당파, 곧 소식(蘇軾)의 촉당(蜀黨), 유지(劉贄)의 삭당(朔黨), 정호(程灝)의 낙당(洛黨)을 말함. 《송사(宋史)》 권336 사마광전(司馬光傳).

○庚申/大司諫李植等上箚曰:

國家軫念民事, 愼簡守令, 兼用侍從交差, 此固淸朝美事也。 若秤衡失當, 寄任非宜。 苟以譴罰行遣, 則不但人情危懼, 受任之人, 亦焉得以展布施措乎? 張維官經冡宰, 方主文柄, 大臣之次, 貴臣之首也。 雖有所失, 自當退之以禮。 羅州是四品官得除之地, 虞候、都事亦居其上, 郡縣鎭堡, 視爲等夷, 禮貌、文牒之間, 卑辱甚矣。 在昔貶官, 雖下至於司馬、司戶, 然而不簽書公事, 受員外, 置之祿, 則是於尊貴體面, 無大傷損, 堂階之際, 古人豈不致謹? 今之貶官, 謂之前所未有, 非過言也。 朴炡兪伯曾等, 久淹下邑, 甫還侍從, 守令交差, 豈無他人? 今者次第特除, 聖意不無譴怒, 此朝臣之所以疑駭, 士論之所以傷沮也。 聖明前後懇惻之旨, 每以朋黨爲戒, 已分之黨, 尙欲保合。 設令之倫, 自欲標榜相異, 淸朝士夫, 孰肯與之分背而相踶乎? 況等始初, 只因糾摘一二人有過差者, 遂有分黨之說。 若平心相處, 自當日遠日忘, 無復痕迹耳, 縱有新出浮薄之說, 臣等決知終不爲聖朝患也。 頃者, 大臣榻前啓論羅萬甲之意, 不過欲補外而裁抑之, 聞其在私第所論, 亦不過欲姑停銓望, 仍試州縣而已。 大臣, 平章國事, 任怨盡言, 則其有不罄竭肺腑者乎, 其有不斟酌輕重者乎? 今殿下不循大臣之議, 罪之加數等, 延及漸廣, 鬧端橫生, 反使大臣, 有所未安, 此果合於鎭靜調劑之道乎? 殿下惡朋黨而欲去, 此甚盛意, 顧其所以去之之術, 恐未盡也。 文宗謂: "去河北賊易, 去朝廷朋黨難。" 夫以萬乘之威, 驅逐數十書生, 何至甚於去强寇之難乎? 顧其勢, 終有所甚難者, 何哉? 人才之難, 終古所歎。 自古士大夫, 被朋黨之名者, 多是聰明、才力, 爲衆所推之類也。 若其君上, 果能裁成保合, 不使潰裂, 則雖於同中有異, 異中有同, 終不害其爲大同也。 如或只據朋黨之名, 而務刮絶去之, 今日逐一人, 明日逐一人, 今年去一黨, 明年去一黨, 則朝著之間, 人物掃盡, 其所登用, 不過依阿不才之徒, 則雖謂之國空虛, 可也。 昔蘇軾王氏同俗之弊, 比之於瘠地之黃茅、白葦, 去黨之難, 亦何以異此? 大抵士論之携貳, 乃國家之大不幸, 其賢邪進退之跡, 未易明也。 若子是非, 元祐之三黨, 非但當年不能平, 後世亦不能定。 設使盡去其黨, 則李德裕之政術, 程伊川之正學, 當幷在棄斥中矣, 其於世道何如耶? 若我朝朋黨之患, 則有由來矣。 銓郞柄重, 國政下移, 新進氣銳, 易生瑕釁, 此實百年流弊, 反正以後, 猶未盡祛者也。 惟聖上, 與廟堂心膂之臣, 講論一代賢才, 姸媸、長短, 無所逃隱然後, 培植而裁取之, 品藻序別, 任之勿疑, 則豈唯朋黨、色目自底消滌? 亦天地交泰之會也。 惟聖明, 勿以人廢言, 則朝廷幸甚。

上答曰: "省箚具悉爾等之意去黨, 所難, 予之昏庸, 甚於文宗, 而欲去之, 可謂迂矣。 雖然樹黨護黨之類, 不爲斥黜, 則必底滅亡而後已。 故不得不爾, 爾等勿以爲咎。 且箚末所陳, 當留念焉。"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34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관리(管理)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