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8월 7일 기미 1번째기사 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주강에 자정전에서 《서전》을 강하고 원 군문의 일로 자문을 구하다

상이 주강에 자정전(資政殿)에서 《서전》을 강하였다. 상이 원 군문(袁軍門)의 일로 자문을 구하니,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원 군문의 자게(咨揭)에 대해서는 묘당(廟當)에서 헤아려 처리하겠습니다마는, 소위 자문(咨文)이란 것은 공가(公家)의 문서이고 게첩(揭帖)은 사간(私簡)입니다. 대아문(大衙門)에서 자문을 보냈는데 우리 쪽에서 게첩으로 답할 경우, 신은 그것이 체면에 어떠할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자문 끝 부분에 ‘그대의 국왕’ 이라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하니, 특진관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에게 보낸 자문이 아니라 묘당에 통지한 글이니, 자문으로 답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대신의 소견도 그러합니다. 그 글을 보면 ‘이상의 내용을 고려국(高麗國)에 자(咨)한다.’고 했을 뿐 왕(王)이라는 글자는 없으니, 전적으로 상에게 자문을 띄운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그러나 홍서봉의 말도 소견이 있긴 합니다. 대신의 뜻은 자문을 보내고 싶어하나 말을 만들기를 난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나라에 산재해 있는 중국인이 많은 만큼 쇄환해 보낸다는 내용으로 자문을 작성하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쇄환할 중국 군사가 한 명도 없는데 거짓말로 핑계댄다면 성신(誠信)이 부족한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별도로 자문을 만드는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이귀(李貴)는 대신이나 중신(重臣)을 보내고 싶어 하는데, 묘당에서는 안 될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꼭 중신을 보내야 하겠는가. 설령 중신을 보낸다 하더라도 군대 출동시기를 어떻게 미리 알겠는가."

하였다. 남이공이 아뢰기를,

"저쪽의 정세를 탐지하는 것은 관직의 고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양서(兩西)에는 중국인이 매우 많으니 차관(差官)이 돌아가기 전에 속히 모아 집결시키게 하고, 인하여 이런 내용을 가지고 따로 자문을 만들었다고 칭하면 일이 매우 순하게 풀리고 모양이 좋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한다면 이자(移咨)를 해도 근거가 없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나만갑(羅萬甲)이 진중하지 못한 탓으로 말을 가려서 하지 못했는데, 상신(相臣)이 건백(建白)한 것은 조용하게 되지 못할 단서가 될까 우려한 나머지 외직에 보임시켜 진정시키려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출(竄黜)까지 하는 것이 어찌 상신의 뜻이었겠습니까. 더구나 장유(張維)의 경우는 좌천까지 당했으므로 인심이 더욱 답답해 합니다. 나만갑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서는 장유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조정에서 너무 지나치게 조처를 취하는 것을 우려했을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유는 바로 이조 판서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다. 그가 올린 차자 내용 중에는 ‘신은 전장(銓長)과 한 집안 식구이니, 만약 어떤 일이 있었다면 어찌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라는 구절이 있다. 나만갑이 전장을 동요시켰던 말을 몰랐던 것처럼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요즈음 조정의 의논을 보건대 군상(君上)이 그르다고 하는 사람은 군하(群下)가 꼭 옳다고 하고, 위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사람 같지도 않은 자로 지목하고 있다. 군상에게 진정 큰 잘못이 없다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군상에게 아름다운 일이 있으면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지나친 거조가 있을 때에는 간쟁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만갑에게 붕당을 조성하는 자취가 현저히 나타났기 때문에 김류(金瑬)가 그 풍조를 개혁하려 한 것이니,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전일 경연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나만갑은 열 번을 쫓겨나도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

○己未/上晝講《書傳》于資政殿。 上詢以軍門事, 同經筵洪瑞鳳曰: "軍門咨揭, 廟堂當商量處之。 所謂咨文者, 乃公家文書, 揭帖則私簡也。 大衙門送之以咨, 而我以揭答, 臣不敢知, 於體面何如也。" 上曰: "彼咨文末端, 有爾國王之語乎?" 特進官南以恭曰: "然。" 上曰: "然則非咨於我, 乃廟堂之通書, 何必答之以咨乎?" 以恭曰: "大臣所見亦然矣。 其文曰: ‘右咨高麗國’ 而無王字, 似不專咨於上。 然瑞鳳之言, 亦有所見大臣之意, 欲送咨, 而以措語爲難耳。 臣意則唐人散在我國者多, 以刷送之意, 爲咨何如?" 上曰: "今無卒一人之刷, 而托以虛辭, 無乃近於少誠信乎? 別咨則令廟堂議處。" 以恭曰: "李貴欲遣大臣、重臣, 廟堂則以爲不可。" 上曰: "何必遣重臣也? 設遣重臣, 師期何以預知?" 以恭曰: "探知彼情, 不在官之高下矣。 且兩西唐人甚多, 差官未還之前, 速令聚集, 因將此意, 稱以別咨, 則事甚便好矣。" 上曰: "若然則移咨不爲無據矣。" 瑞鳳曰: "羅萬甲浮浪不能擇言。 相臣之建白, 恐有不靖之端, 只欲補外鎭之。 至於竄黜, 豈相臣意乎? 至如張維之左遷, 人心益鬱。 萬甲之過擧, 亦知之, 而只憂朝廷擧措太過耳。" 上曰: "卽吏判金尙容之壻也。 其箚中有曰: ‘臣, 銓長一家人也。 倘有某事, 則豈不相知?’ 云。 萬甲動搖銓長之言, 有若不相知, 何也? 近觀朝議, 君上所非之人, 則群下必是之, 從上之意者, 指爲非人。 君上苟無大過, 則從之亦可矣。" 瑞鳳曰: "君上有美事, 將順之不暇, 誰敢違? 若有過擧, 則爭之可矣。" 上曰: "萬甲顯有朋比之迹。金瑬欲革其習, 豈可非之? 頃日筵中或言: ‘萬甲雖被十黜, 不易其心’, 予所未曉也。"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4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외교-명(明) / 왕실-종사(宗社)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