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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 7월 12일 을미 2번째기사 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나만갑을 유배보내고 김육을 나국하라는 특명을 내리다

상이 나만갑(羅萬甲)을 멀리 유배보내고 김육(金堉)을 나국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영상 오윤겸(吳允謙), 우상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나만갑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신들이 친구의 자제로 자주 대해 왔기 때문에 그의 본래 품성이 착하고 사려가 깊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관원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도 회피하지 않았는데, 조금 우직한 점은 있는 듯해도 뛰어난 점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신들은 조만간 그가 공(功)을 이룰 수 있는 인물로 등용되리라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론(時論)을 주장하며 모든 일을 독단한다는 말에 있어서는 그가 하찮은 소관(小官)의 신분으로서 아무리 해보려고 한들 그 누가 기꺼이 그의 말을 채용하려 하겠습니까. 대개 연소한 사람이 혹 신중하지 못한 나머지 시비를 함부로 논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을 경우 그것만 가지고 죄안(罪案)을 삼기는 어렵습니다. 동료 대신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하면서 ‘형적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견책을 가한다면 사체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을 듯하니, 잠시 외직에 보임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반성케 해야 한다.’고 한 것 또한 이런 뜻에서 한 것입니다. 지금 만약 언어상에 실수가 있었다고 하여 갑자기 꾸짖어 벌을 내린다면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동시에 청명한 조정에서 행할 아름다운 일도 못 될 듯싶습니다.

김세렴의 일에 대해서는 그 곡절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비평하는 의논이 있었다면 잠시 청망(淸望)을 못하도록 한 것도 안 될 것이 없는 일이고, 그러다가 바로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경우 예전대로 거두어 쓰는 것 역시 무방한 일입니다. 김육이 처음에 스스로 그 의논을 내놓았다가 뒤에 끝내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 역시 전후에 걸쳐 들은 것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니,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닐 듯싶습니다. 진정하고 억제하여 서로 협력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붕당으로 인한 피해를 그냥 놔두면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번에 옥당이 자기와 다른 자를 공박한 사건을 인하여 외직에 보임하는 벌을 약간 시행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 과거의 잘못을 씻어주고 다시 청요직(淸要職)에 두었으니, 이야말로 과거의 심술을 고쳐먹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방도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만갑 등은 개전(改悛)의 정을 보이지 않고 시론을 전적으로 주도하면서 시비(是非)의 통색(通塞)을 자기 뜻대로 하여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손발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 일은 필시 거간(巨奸)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서 나만갑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닐 듯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범죄 사실이 먼저 드러났으니, 우선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김육은 전랑(銓郞)의 신분으로서 공도(公道)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죄목을 얽어 만들어 자기와 다른 자들을 배척하면서 어리숙한 사람들만 항상 청요직에 의망했으니, 이 자 또한 군상(君上)을 업신여기고 거리낌없이 행동한 자이다. 그의 방자하게 군 정상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으니, 나국하여 정죄(定罪)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김육은 원정(原情)한 뒤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35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사법-탄핵(彈劾)

○上特命遠竄羅萬甲, 拿鞫金堉。 領相吳允謙、右相李廷龜啓曰: "萬甲爲人, 臣等以故人子弟, 待之之故, 知其本品良善, 且有計慮。 當官盡職, 任怨不避, 雖似少戇, 長處頗多, 意謂早晩用於事功之人。 至於主張時論, 專擅取捨, 則渠以微末小官, 雖欲爲之, 孰肯採用? 大槪年少之人, 雖或不能愼重, 妄論是非, 而其迹未著, 難以成罪。 僚相筵中所陳以未著之迹, 加以譴責, 恐有傷於事體, 姑令補外, 使之自省云者, 亦此意也。 今若以言語之失, 遽施譴罰, 恐人心不安, 亦非淸朝美事也。 金世濂事, 未知曲折, 旣有訾議, 則姑塞淸望, 未爲不可, 旋知其情實, 則因前收用, 亦無所妨。 金堉之初自發言, 而後言不可終棄者, 亦出於前後所聞之異, 似非大叚罪過。 鎭定裁抑, 以爲寅協之圖者, 實爲今日之先務。" 上答以知道, 因下敎于政院曰: "朋比之害, 必亡人之國而後己, 故頃因玉堂伐異之擧, 略施補外之罰。 厥後洗滌前愆, 復置淸要, 此實改革心術, 圖報國恩之處, 而今者羅萬甲等不思悛改, 專主時論, 是非通塞, 惟意所欲, 使銓官不得措其手足, 誠可寒心。 主張此事者, 必有巨奸, 似非萬甲一人所可獨爲。 然此人罪犯先露, 姑先削職遠竄。 且金堉, 身爲銓郞, 不念公道, 搆成罪目, 排斥異己, 黯昧之人, 每擬於淸望。 此亦不有君上, 而無忌憚者也。 其縱恣之狀, 不可不問, 拿鞫定罪。" 金堉原情後, 削黜。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335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