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사 권첩이 중국의 사정을 보고하다
주문사(奏聞使) 권첩(權怗)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지난해 8월 22일 경사(京師)에 도착했는데, 20일에 황제가 붕서하고 황제의 아우 신왕(信王)이 즉위하여 25일에 성복례(成服禮)를 거행하였는데, 중외(中外)의 소장(疏章)이나 주문을 일체 정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4일이 지난 9월 6일에 황상이 직접 황극문(皇極門)에 임어하여 조위(吊慰)를 받았습니다만 그뒤로 잇따라 꺼리는 날을 만나게 되어 주문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일에야 비로소 입계하였고 13일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왔습니다.
새로 등극한 천자는 총명이 뛰어나서 일체의 서찰을 모두 친필로 써서 내렸으며 권병과 기강을 총괄하고 있었으므로 천하가 태평 성대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토색질하는 폐단은 전과 다름이 없어서 가지고 간 노자를 다 바쳤지만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곳에서 출발하려 할 적에 소갑(小甲) 왕유덕(王有德)·주응상(朱應祥) 등이 소첩(小帖)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바로 예부(禮部)에서 우리 나라에 조사(詔使)를 차송한다는 제본(題本)을 올렸는데 황상께서 특명으로 배신(陪臣)이 돌아가는 편에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유숙하고 있는 관소(館所)의 부엌에서 불꽃이 치솟아 맹렬하게 타올랐기 때문에 노자와 관소 1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신들은 간신히 구멍을 뚫고 뛰어나왔습니다. 예부(禮部)의 제독(提督)과 중성(中城)의 찰원(察院)에서 사실을 낱낱이 열거하여 아뢰었는데 황상께서는 관후하고 인자하시어 무심히 저지른 실수로 여겨 특별히 추궁하여 문책하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선황제(先皇帝)를 장사지내는 기일을 처음에는 납월(臘月)로 정했었는데 성모(聖母)의 원역(園役)과 동시에 거행해야 하는 까닭으로 2월로 물려서 정하였습니다.
병부 상서 최정수(崔呈秀)가 간흉을 편들어 권병을 휘둘렀으므로 급사중 양공수(楊孔修)가 맨 먼저 그를 죄줄 것을 청하였고 감찰 어사 양유원(楊維垣)이 잇따라 청하자 최정수는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중도에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의 첩 소씨(蕭氏)도 스스로 목찔러 죽었는데 그의 가산을 모두 적몰하였습니다. 그리고 염명태(閻鳴泰)에게 대신 병부 상서를 맡게 하였습니다. 환관(宦官) 위충현(魏忠賢)은 애초에 봉양(鳳陽)에 정배했었는데 떠나가다가 부성(阜城)에 이르러 또한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그의 아들 위양경(魏良卿)도 아울러 목베고 가산은 적몰하였습니다. 그리고 13성(省)의 총독(總督)으로 있던 환시들을 모두 철회시켰기 때문에 호량좌(胡良佐) 등이 모두 파직되었습니다. 태학생 호환유(胡煥猷)가 소장을 올려 각료(閣僚)인 황입극(黃立極)·이봉래(施鳳來)·장서도(張瑞圖)·이국진(李國搢) 등이 위충현에게 부회한 죄를 논하자 네 정승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으므로 칙서에 서명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신의 출발이 열흘이나 더 지체되었습니다. 황상께서 호환유가 본분을 벗어나 망령되이 말했다는 것으로 죄주자 네 정승이 도로 나아와서 시사(視事)하였는데 황입극이 일곱 번이나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자, 허락하였습니다.
풍성후(豐城侯) 이승조(李承祚)가 소장을 올려 모장(毛將)을 포장할 것을 청하면서 그의 공은 큰데 상은 작다는 것을 극언하였는데, 진영(鎭營)을 옮기는 의논을 막으려는 의도가 현저히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황상께서는 허망한 말로 은혜를 팔려는 짓이라고 분부하였고 병과(兵科)에서도 그가 함부로 떠들었다고 참핵하였는데 황상의 만 리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둔위(前屯衛)에 불이 나서 군자(軍資)와 군기(軍器)를 전부 태워버렸고 민가에까지 불이 번져 화재를 입은 인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이 전둔위는 바로 산해관 밖의 중진(重鎭)인 영원위(寧遠衛)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하의 불행인 것입니다.
신들은 12월 14일에 출발하여 정월 4일에 등주(登州)에 도착하였고 20일에 배를 타고 2월 8일에 증산(甑山)에 상륙했습니다. 신이 녹도(鹿島)에 도착하니 우리 나라의 인민으로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도망하여 이 섬에 표박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12인을 데리고 나와 배타는 곳에 내려놓고 지방관에게 인계하여 진구(賑救)하여 살리게 했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57면
- 【분류】외교-명(明)
○奏聞使權怗馳啓曰: "臣等前年八月二十日到京師, 二十二日皇帝崩逝, 皇弟信王卽位, 二十五日行成服禮, 中外章奏一切停留。 過十四日後九月初六日, 皇上親御皇極門受慰。 厥後連値支干忌諱, 不得呈奏文, 初十日始入啓, 十三日奉聖旨而來矣。 新天子聰明邁古, 十行之札, 皆出宸翰, 摠攬權綱, 天下想望太平, 而漢人需索之弊, 與前無異, 倒盡行資, 難以塞應。 起程之際, 小甲王有德、朱應祥等持小帖來, 拆見則乃禮部之差送詔使於我國之題, 而皇上特命令陪臣, 順帶以去之事也。 且臣所館處竈堗炎上, 烈焰燻空, 行資及館宇十餘間, 盡被燒燼, 臣等僅得穿穴跳出。 禮部提督、中城察院, 枚擧上聞, 皇上寬仁, 謂以無心之失, 特免究問矣。 先皇帝葬期, 初定於臘月, 而以聖母園役, 竝擧一時之故, 退卜於二月。 兵部尙書崔呈秀, 黨兇擅權, 給事中楊孔修, 首請罪之, 監察御史楊維垣繼之, 呈秀出還原籍, 中途聞拿命, 自縊死。 其妾蕭氏亦自刎, 盡沒其家。 閻鳴泰代判兵部。 宦者魏忠賢, 初配鳳陽, 行至阜城, 亦自縊死, 幷其子良卿誅之, 籍沒家財。 十三省總督宦官, 盡令撤回, 故胡良佐等皆罷。 太學生胡煥猷, 上疏論閣臣黃立極、施鳳來、張瑞圖、李國搢等傅會忠賢之罪, 四相皆引入, 署勑無人。 以此, 臣行更遲一旬矣。 皇上以煥猷出位妄言爲罪, 四相還出視事, 而黃立極七疏乞退, 許之。 豐城侯 李承祚, 上疏褒毛將, 極言其功鉅、賞微, 顯有欲遏移鎭之議。 皇上以 ‘浮談市德’ 爲敎, 兵科又參其狂譟, 皇上之明見萬里, 於此亦可見也。 去至月間, 前屯衛失火, 軍資、器械蕩然燒盡, 廬舍人民之被災, 不可勝計。 此乃關外重鎭寧遠衛之根本也, 一朝如此, 是亦天下之不幸也。 臣等十二月十四日起馬, 正月初四日到登州, 二十日乘船, 二月初八日下陸于甑山矣。 臣到鹿島, 則我國人民被擄者逃還, 漂泊於此島。 刷出十二口, 缷下於下陸處, 傳授地方官, 使之賑活云。" 事下備局。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57면
- 【분류】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