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 역모사건을 진압하여 관련자를 국문하고 처벌하는 내용
이때 적당들이 무기를 지니고 이미 도하에 집결하여 있었으나 마침내 모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내 병조(內兵曹)에다가 국청을 설치하고 국문하였다. 전 군수 윤계륜(尹繼倫)이 공초(供招)하기를,
"지난해 체부(體府)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일 때문에 영서(嶺西) 지방에 갔다가 지나는 길에 원주에 들러 정심을 만났는데 정심이 ‘유두립(柳斗立)이 참서(讖書)를 얻었는데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인하여 두립을 불러다가 참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참서의 내용에 ‘초계(草溪)에 조수(潮水)가 들어오고 계룡(鷄龍)에 서울을 건립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모두 벙거지를 쓰고 털옷을 입는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또 ‘남응민(南應敏)이 나와 친한 사이인데 늘 변괴에 대해 말하면서 앞으로 2년이 지나면 세상 일이 결정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두립이 ‘대포를 쏘면서 막바로 들어가 먼저 종묘를 불살라 버린다면 절로 놀라서 무너져 버릴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고, 전 세마 허유는 공초하기를,
"역모에 대해서는 처음 이우명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국청에서 우명과 허유를 불러 대질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명이 말하기를,
"허유의 공초가 사실입니다. 정자가 일찍이 이 모의에 대해 ‘주상께서 성명(聖明)하기는 하지만 이서(李曙) 등의 무리가 포학을 부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형제가 거사하기로 약속했는데 윤계륜의 군대만 가지면 충분히 성사시킬 수 있다. 전라 수사로 있는 여씨(呂氏) 성을 가진 사람과 민대(閔濧), 정린(鄭遴)도 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했습니다. 지난 겨울 정자(鄭洎), 안집중(安執中)이 정월 4일 경성에 들어가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고 초이튿날 기일에 맞추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동대문으로 달아나다가 잡혀왔습니다. 허유가 ‘일찍이 우명의 말을 듣건대 폐주(廢主)가 애통해 하는 글을 조정(趙挺)·정창연(鄭昌衍)·김신국(金藎國)·최관(崔瓘)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조정 등을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불문에 부치라고 명하였다.
급제 유효립(柳孝立), 진사 정린, 전 좌랑 정심(鄭沁), 내관 배희도(裵希度), 사약(司鑰) 김응사(金應獅), 화원(畫員) 김응호(金應虎), 반감(飯監) 이효일(李孝一) 등 50여 인이 신문에 의해 모두 자복하였으므로 전부 처형하였다. 그들의 공초 내용은 대략 서로 같았는데 그 흉참스런 이야기는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정린의 공초는,
"초사흗날 서울에 도착하여 허유의 말을 들으니 ‘이미 군병을 얻었다. 옛 임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배씨 성을 가진 환시가 침전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니 마땅히 용사(勇士) 2인을 배씨 성을 가진 환시에게 주어 대궐 안으로 잠입시킨 다음 임금을 시해하는 불칙한 일을 행하게 하여 안팎에서 일시에 난을 일으킨다면 성사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폐주를 다시 복위시키는데 그의 혼암한 것이 전과 같을 경우에는 바야흐로 어진이를 가려서 세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거라고 할 수 없다.’ 했습니다."
하고, 정심의 공초는,
"듣기로는 민대와 유효립이 인성군을 옹립하려고 하는데 효립은 밖에서 응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승려인 담화(曇華)가 치악산(雉岳山)에 거주하고 있는데 유효립과 사이가 좋기 때문에 옥룡사(玉龍寺)의 비석에다가 ‘술년(戌年)과 해년(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하는데 인년(寅年)과 묘년(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등의 참설을 기재한 뒤 민대가 가서 인성군을 직접 만나 약속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하고, 배희도의 공초는,
"이달 초사흗날 민대를 찾아가 만났는데 민대가 ‘오늘날 온 나라 사람이 다 반란을 일으키는데 종루(鍾樓)가 있는 네거리에 진을 친다. 대장은 도감의 중군과 일선위(一善尉)이다.’ 하고, 김응호도 ‘내가 선봉이 되어 금원(禁苑)에서 담장을 넘어 곧바로 들어갈 것이다. 나의 아우는 동궁(東宮)의 사약(司鑰)으로 있는데 궁녀 몇 사람과 함께 내응하기로 되어 있다. 이 일은 경영해 온 지가 이미 5년이어서 교결한 세력이 매우 많아 아주 완전 무결하다.’고 했습니다."
하고, 김응사의 공초는,
"밤에 응호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응호가 ‘유효립이 폐조의 글을 받아 조정 등에게 전하여 보였는데 내삼청(內三廳)의 장관들도 동모한 자가 있어 궐내에 입직해 있는 사람들을 사살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그날밤 군병들이 담을 넘어 들어가는데 폐위된 중궁(中宮)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군병들이 모두 흰옷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하고, 응호의 공초는,
"지난해 겨울 민대를 찾아가 만났는데 그가 같은 당여 5, 6인과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유종선(柳宗善)이 하나의 서찰을 내어 보였는데 겉에는 조(趙)·김(金)·남(南)이란 세 글자가 쓰여져 있었고 안의 내용은 대체로 ‘사람을 잘 선택해서 모쪼록 삼가 비밀스럽게 하라…….’ 했습니다. 종선이 말하기를 ‘이것은 폐주의 서찰이다. 강화(江華)에 사람을 보내어 받아 왔는데 조·김·남은 조정(趙挺)과 김신국(金藎國)과 남이웅(南以雄)이다. 초사흗날 대사를 거사하는데 밖의 일은 민대가 주관하고 안의 일은 유효립이 주관한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죄다 제거하고 나서 폐주를 받들어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이어 인성군에게 왕위를 전수하게 한다.’ 했습니다."
하고, 하영남(河永男)의 공초는,
"지난해 가을 한유길(韓惟吉) 등 7, 8인이 서로 모의하기를 ‘도감의 중군은 바로 유효립 집안의 가신(家臣)인데 효립이 이미 이 사람과 약속하여 초나흗날 밤 종루가 있는 네거리로 모이기로 했고 윤계륜도 수원의 군병을 거느리고 올라오기로 했는데 경복궁 앞과 신문(新門) 안에다 나누어 진을 치기로 했다. 그리고 나서 먼저 네 대장을 제거한 뒤 군병을 동원하여 대궐을 범한 다음 인성군을 임금으로 추대한다. 그러나 인성군의 인품이 어질기는 하지만 잔약한 것 같기 때문에 응원이 인성군의 운명을 점술가인 이봉춘(李逢春)에게 추연(推衍)하여 보게 했더니, 봉춘이 「이 운명을 가지고서는 임금이 되기에 합당치 못하다. 임금이 되었다 할지라도 오래갈 수 없다.」 했다.’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조정(朝廷)에서 호패법(號牌法)과 군적법(軍籍法)을 설치한 이래 민심이 이반되고 있으니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해서 먼저 이를 주장한 자를 제거한다면 인심이 절로 안정될 것이다.’했습니다."
하고, 효일(孝一)의 공초는,
"일찍이 응사(應獅)의 말을 듣건대, 지난해 오랑캐의 변란이 발생했을 적에 대가(大駕)가 24일에 서울을 떠나고 인성군이 동행하게 되면 그날 거사하려고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가가 마침 행차를 물렸고 인성군이 자전(慈殿)을 모시고 배행하여 먼저 강도(江都)로 가게 되었기 때문에 성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효립이 처음에는 실토하지 않다가 정심 등과 대질하게 되자 말이 궁하였으므로 형신을 가하였다. 효립의 말은 매우 패려하고 오만하였는데 누차 형신을 받고 나서야 자복하였다. 그리고 인성군이 자전의 밀지(密旨)를 받았다고까지 말했다. 국청이 아뢰기를,
"효립의 공초는 말이 매우 흉참스러워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먼저 정형(正刑)에 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고 그의 공초 내용은 불살라 버려라."
하였다. 충주(忠州) 사람인 전 별제(別提) 조희맹(趙希孟)도 소장을 올려 적당들 가운데 법망에서 누락된 자 8, 9인을 고발하니, 상이 아울러 잡아다가 가두라고 명하였다.
상이 국청에 하교하기를,
"흉도들이 강화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내통했으니 일이 매우 흉참스럽다. 광해가 위리 안치되어 있는 곳에 가 있는 나인들도 잡아다가 국문하라."
하였는데, 강화의 안치를 감시하고 있는 별장 권득수(權得壽)가 또 치계하기를,
"역적 효립의 종이 지난해 겨울 두 번이나 본 강화부에 와서 안치를 수직하고 있는 내관·관비 등과 안팎으로 내통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또한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금부 도사가 본부의 관원과 함께 광해군의 침전문 밖으로 나아가니 광해가 문을 막아 서서 통곡하였다. 나인 한 사람은 작은 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즉사하였고 애영(愛英) 【 임 소원(任昭媛)임.】 도 스스로 찔렀으나 절명하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잡아왔다. 그런데 이들은 자복하기도 하고 자복하지 않다가 죽기도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은 역적 민대와 이미 직접 약속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국법은 지엄한 것이어서 사사 은혜 때문에 용서하기는 어려우므로 감히 이렇게 계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성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내가 시종 곡진히 용서하고 죄를 가하지 않았는데, 인성이 어찌 차마 민대와 내통하여 부도한 모의를 했을 리가 있겠는가. 역적 정심이 죽음에 임박하여 분별없이 한 말은 결코 믿을 것이 못 된다. 다시는 이런 말을 제기하지 말아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국청이 연이어 허락할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자전이 언문으로 쓴 하교를 국청에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역적의 변고가 누차 일어났는데 이번의 역옥은 더욱 흉악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역적 유효립 등은 병오년003) 대군(大君)004) 이 탄생한 뒤부터 이미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가 계축년005) 의 화를 선동하여 얽어내었는데, 외척의 권세를 믿고 폐모론에는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그들의 간사한 모의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계해년006) 에 그의 죄를 말감(末減)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완전히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망극한 원수를 통쾌하게 죄다 갚지 못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만을 바랐었다. 그런데 이제 스스로 흉역을 저질렀으니 천도(天道)는 한없이 밝은 것이어서 나의 부형의 원수를 갚게 되었으므로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제 들리는 바에 의하면 괴수 효립의 공초에 인성에게 밀지를 내렸다고 하는데, 이는 틀림없이 흉도들을 속여서 꾀기 위한 계책이었을 것이다. 더더욱 통분스럽고 놀랍다. 이공(李珙)은 나에게 죄를 진 사람이고 이혼(李琿)은 불공 대천의 원수이다. 따라서 밀지에 대한 일을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니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매우 흉참스러우니 말의 출처를 철저히 신문해야 한다."
하였다. 양사에서 일선위(一善尉) 김극빈(金克鑌)이 역적들의 입에서 자주 나온다는 것으로 형신을 가할 것을 청하여 누차 아뢰었는데 비로소 따랐다.
김극빈과 학생 유양선(柳養善), 사직 이정철(李廷哲), 출신 김취려(金就礪), 전 현감 민대(閔濧), 중군 이계선(李繼先) 등 20인은 모두 자복하지 않고 형을 받다가 죽었다. 김유(金裕), 한인발(韓仁發) 등은 역적 이인거(李仁居)의 잔당들로 역적들의 공초에 의해 발각되어 또한 장을 맞다가 죽었다. 상이 국청의 대신 이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의 국문이 끝나가고 있는데 이들이 계속 연루자를 끌어 넣어 체포가 계속되기 때문에 옥사를 완결짓기가 쉽지 않다. 자취가 애매한 사람들은 우선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상 김류가 민대와 이계선을 소급하여 정형에 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물러가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민대와 이계선은 역적 모의의 괴수이니 지레 죽었다고 하더라도 소급하여 정형에 처하는 것이 실로 여러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인견할 때 성교를 받드니 후세를 위한 우려가 매우 타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감히 다시 의논드릴 것이 없습니다만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그 자신은 소급해서 정형에 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손들은 보통 사람들 틈에 끼어 살게 할 수 없으니 처치하는 법전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적당인 이수향(李秀香)·김응원(金應元)·정자(鄭洎)와 승려 담화(曇華)는 모두 망명했었는데 여러 날을 탐문하여 수색한 끝에 비로소 체포하였다.
이수향은 공초하기를,
"지난해 9월 원주에 가서 정심을 만나보았는데 승려인 담화도 거기에 와서 유숙하였습니다. 담화가 말하기를 ‘참기(讖記)에 「자년(子年)과 축년(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인년(寅年)과 묘년(卯年)에 패한다.」 하였고 또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 했다. 이 때문에 원주 사람들이 모두 인성군에게 마음을 붙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뒤 담화가 서울에 왔을 적에 만났는데 모의에 대한 일의 개략을 말하였습니다. 정월 초사흗날 유종선(柳宗善)을 가서 만났는데 종선이 ‘오늘밤에 종루에서 모이기로 하였는데 궐내의 군호(軍號)를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화목(火木)이란 말로 군호를 삼기로 했다.’ 하고, 또 ‘인성군이 2백 명을 데리고 와서 돕기로 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담화도 승복하고서 역모에 참여한 사람을 대체적으로 말하였는데 또 말하기를,
"인성군을 옹립하고 땅을 떼내어 폐주를 봉해 주려고 했습니다."
하였다. 정자·김응원은 말을 꾸며서 공초하였으므로 국청에서 형신을 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같은 적당들이 모두 복주되어 역적의 정상이 모두 드러났다. 망명한 역적은 집에 있다가 체포된 자의 경우와는 다른데 형신을 가할 적에 만약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처치하기가 또한 곤란하니, 바로 정형에 처해야 된다."
하였다. 사련인(辭連人) 유인(柳訒)·장덕무(張德武)·이경항(李景恒)·정여린(鄭如麟)·윤휘(尹暉)·권여경(權餘慶) 등 27인은 석방하고, 장세철(張世哲)·남응민(南應敏)·김경선(金景善)·조유항(趙有恒)·조유도(趙有道) 등 14인은 유배하고, 정배되었던 정혼(鄭渾)·박자전(朴自全)·정오(鄭浯) 등은 도로 배소로 보냈다. 그리고 거제(巨濟)에 정배되어 있는 죄인 유희량(柳希亮)은 역적 두립의 아버지이고 수원부의 죄인 윤굉(尹𥥈)은 역적 계륜의 아버지이고 예산(禮山) 고을의 죄인 서탁(徐倬)은 역적 국재(國材)의 아버지인데 이들은 모두 금부 도사를 보내어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옥사가 완결되고 나자 상이 고변인 김진성 등을 방송(放送)하게 하였다. 황진과 허선 또한 국청의 계사(啓辭)에 의거 잡아다가 국문하니 진성 등의 공초와 들어맞았다. 상이 그 공초 내용을 보고 즉시 석방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고변인들이 객지에서 우거(寓居)하는 가운데 굶주렸을 걱정이 없지 않다. 대내(大內)에서 술과 음식을 내어다 먹이겠으니 그들을 불러오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47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註 003]병오년 : 1606 선조 39년.
- [註 004]
○時, 賊黨持兵器, 已聚都下, 遂皆就捕, 設推鞫廳于內兵曹以鞫之。 前郡守尹繼倫供稱: "上年以體府運糧事, 往嶺西, 歷見原州 鄭沁, 則沁曰: ‘柳斗立得讖書, 未知時事如何也。’ 因邀斗立, 出示讖書, 有: ‘草溪潮入, 鷄龍建都。 朝鮮皆着毛笠、毛衣’ 等語。 又曰: ‘南應敏與我相親, 恒言變怪以爲若過二年, 時事可定。’ 云矣。 斗立曰: ‘當放砲直入, 先火宗廟, 則自然驚潰。’ 云。" 前洗馬許逌供稱以爲: "逆謀, 始聞於李友明" 云。 鞫廳, 請與友明, 兩造而質之, 上從之。 友明曰: "逌之供辭果實。 鄭洎曾言此謀曰: ‘主上雖聖明, 而李曙輩暴虐, 民不堪苦。 吾兄弟相約擧事, 尹繼倫之軍, 足以成事。 全羅水使呂姓人及閔濧, 鄭遴, 亦參此謀’ 云。 去冬, 鄭洎、安執中, 約以正月初四日入城犯闕, 初二日及期上來, 聞有告變之人, 走出東大門, 被執而來矣。 逌曰: ‘曾聞友明言, 廢主送哀痛書於趙挺、鄭昌衍、金藎國、崔瓘處’, 云。" 鞫廳, 請拿鞫趙挺等, 上命皆勿問。 及第柳孝立、進士鄭遴、前佐郞鄭沁、內官裵希度、司鑰金應獅、畫員金應虎、飯監李孝一等五十餘人, 訊問具服, 皆伏誅。 其所供, 大略相同, 凶慘之說, 不可盡記。 鄭遴供稱: "初三日到京, 聞許逌言則云: ‘已得二哨兵矣。 舊主豈可忘也? 裵姓宦者, 昵侍寢殿, 當以勇士二人, 給與裵宦, 潛入闕內, 行不測之事。 自內自外, 一時作亂, 則事無不成。 復立廢主, 若昏庸如舊, 則方可擇賢, 不然則非義擧’ 云。" 鄭沁供稱: "聞閔濧與柳孝立, 謀立仁城, 而孝立爲外援。 僧曇華居雉岳山, 與柳斗立善, 以玉龍寺碑 ‘戌亥載人禍, 寅卯未可知’ 之說, 爲讖記後, 聞閔濧往見仁城, 親約而來云。" 希度供稱: "今月初三日, 往見閔濧, 則濧曰: ‘今夜, 國人盡叛矣, 當結陣于鍾樓街。 大將則都監中軍及一善尉也。’ 金應虎亦曰: ‘吾爲先鋒, 當自禁苑踰墻直入。 吾弟爲東宮司鑰將, 與宮女數人爲內應。 經營此事, 已至五年, 盤結甚多, 事極完實’ 云矣。" 應獅供稱: "嘗夜往應虎家, 則應虎曰: ‘柳孝立受廢朝遺書, 傳示趙挺等, 內三廳將, 亦有同謀者, 約以厮殺闕內入直人。 其夜, 軍兵當踰墻以入, 而廢中宮卒逝之故, 軍皆縞素’ 云。" 應虎供稱: "去年冬, 往見閔濧, 則與同黨五六人同坐。 柳宗善出一書以示之, 外面書趙、金、南三字, 而其內則槪言: ‘善爲物色, 須愼密’ 云云。 宗善曰: ‘此乃廢主書也。 遣人于江華而受之。 趙、金、南, 卽挺與藎國、以雄也。 初三日當擧大事, 而外事閔濧主之, 內事柳孝立主之。 在廷諸臣, 皆當除之, 奉廢主爲上王, 仍傳位於仁城’ 云矣。" 永男供稱: "去年秋, 韓惟吉等七八人, 相與謀議曰: ‘都監中軍, 乃柳家家臣也。 孝立已與此人相約。 初四日夜, 聚會於鍾樓, 尹繼倫亦率水原軍而來, 分陣景福宮前及新門內, 先去四大將然後, 擧兵犯闕, 推戴仁城, 而但其爲人, 仁而似孱。 應元曾推仁城之命於卜者李逢春, 則逢春曰: 「本命, 不合爲君, 雖得之, 不能持久」 云。’ 又言: ‘朝廷設爲號牌、軍籍以來, 民心渙散。 乘此擧事, 先除主張者, 則人心自定’ 云矣。" 孝一供稱: "曾聞應獅言: ‘上年胡變時, 大駕若於二十四日去邠, 而仁城同行, 則其日欲擧事, 待候於闕門外, 而大駕適退行, 仁城陪慈殿, 先往江都, 以此不成’ 云矣。" 孝立初不吐實, 及與沁等面質, 辭屈, 遂刑訊。 孝立言甚悖慢, 屢訊乃服。 至以仁城, 受慈殿密旨爲辭。 鞫廳啓: "孝立所供, 語極兇慘, 不忍正視, 請先正刑。" 答曰: "依啓。 其供辭燒火。" 忠州人前別提趙希孟亦上疏, 告賊黨網漏者八九人, 上竝令拿鞫。 上下敎于鞫廳曰: "凶徒之交通江華, 事極凶慘。 圍中內人, 竝拿鞫。" 江華圍籬別將權得壽又馳啓: "逆賊孝立奴, 上年冬再到本府, 與圍籬守直內官及官婢等, 內外相通云。" 上亦命拿鞫。 禁府都事與本府官, 進入光海寢門外, 則光海當門痛哭。 有一內人, 引小刀自剄卽斃, 愛英 【任昭媛也。】 亦自刺不殊。 竝拿來, 或承服, 或不服而斃。 鞫廳啓曰: "仁城君 珙, 與逆賊閔濧, 旣有親約之說。 國法至嚴, 私恩難貸, 敢此啓稟。" 答曰: "仁城之名, 出於賊招者, 非止一再, 而予終始曲貸, 不加之罪。 仁城安忍與濧相通, 而謀不軌哉? 沁賊臨死亂言, 決不可取信, 更勿提起此言, 以安予心。" 鞫廳連啓以請, 上不從。 慈殿以諺書, 下敎鞫廳。 其書曰:
國運不幸, 逆節累起。 今此逆獄, 尤極凶惡, 有不忍聞。 柳賊等自丙午年大君生後, 已有禍心, 搆煽癸丑之禍, 而恃其戚里之勢, 不參廢論, 故外人意其奸謀未甚。 癸亥年末減其罪, 其諸子等竝皆全宥。 罔極之讎, 未盡快報, 惟望必蒙天殃。 今乃自作凶逆, 天道昭昭, 畢報予父兄之讐, 竊自喜幸。 今聞逆魁孝立之招, 至以密旨仁城爲言, 此必誑誘凶徒之計, 尤極痛駭。 珙則於予得罪之人, 琿乃不共戴天之讎也。 密旨之事, 雖三尺童子, 亦不信之, 不須掛齒, 而其言極凶, 窮訊言根可也。
兩司以一善尉 金克鑌緊出賊口, 請加刑訊, 累啓而始從之。 克鑌及學生柳養善、司直李廷哲、出身金就礪、前縣監閔濧、中軍李繼先等二十人, 皆不服而斃, 金裕、韓仁發等以逆賊李仁居餘黨, 發覺於諸賊之招, 亦殞於杖下。 上引見鞫廳大臣以下。 上曰: "在獄罪人鞫問垂畢, 而援引不止, 逮捕相連, 完獄未易。 跡涉曖昧者, 爲先疏釋可也。" 右相金瑬, 請追刑濧、繼先, 上曰: "議于大臣以處。" 大臣退而議啓曰: "濧及繼先, 爲賊謀首, 雖已徑斃, 追正典刑, 實是群情之所同, 而引見時, 伏承聖敎, 其爲後世慮, 極當。 臣等不敢更議, 而但群議以爲: ‘其身雖不追刑, 其子姓則不可齒之平人, 似當有處置之典。" 上從之。 賊黨李秀香、金應元、鄭洎及僧人曇華竝亡命, 跟捕累月, 始獲之。 李秀香供稱: "上年九月, 往見鄭沁於原州, 有僧人曇華亦來。 曇華曰: ‘讖記云: 「子丑未定, 寅卯敗。」 又云: 「辰巳得仁城。」 以是, 原州人莫不屬心於仁城’ 云。 其後曇華來見於京中, 槪言謀議之事。 正月初三日, 往見柳宗善, 則宗善曰: ‘今夜當會於鐘樓, 而闕內軍號, 必須知之。 吾等以火木爲號’ 云。 又言: ‘仁城欲以二百人相助’ 云矣。" 曇華承服, 槪言參逆之人, 而且云: "欲立仁城, 割地以封廢主" 云。 鄭洎、金應元飾辭以供, 鞫廳啓請刑訊, 答曰: "同黨伏法, 逆狀盡露。 亡命之賊, 與在家就捕者不同, 刑訊之際, 若或援引, 處置亦難, 宜直正刑。" 辭連人柳訒、張德武、李景恒、鄭如麟、尹暉、權餘慶等二十七人放送; 張世哲、南應敏、金景善、趙有恒、趙有道等十四人流配; 定配人鄭渾、朴自全、鄭浯等還發配所。 巨濟定配罪人柳希亮, 逆賊斗立之父; 水原府囚人尹𥥈, 逆賊繼倫之父; 禮山縣囚人徐倬, 逆賊國材之父也。 竝遣都事處絞。 獄旣成, 上命放送告變人金振聲等, 而黃縉、許選, 亦以鞫廳啓辭拿問, 則與振聲等所招相符。 上見其供辭, 卽釋之。 仍下敎曰: "告變人等客寓之中, 不無飢餒之患, 自內當出酒饌饋之, 使之招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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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註 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