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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17권, 인조 5년 12월 22일 을묘 4번째기사 1627년 명 천계(天啓) 7년

청에 사신을 보내 개시하는 문제와 포로 쇄환을 두고 교섭하다

회답사 박난영(朴蘭英)이 치계하였다.

"신이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대해(大海) 등이 잔치를 베풀고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한(汗)은 지금 나가서 사냥중이다. 말에 올라탄 뒤에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우리들에게 사신을 접대하라고 하였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사냥터에 알리려고 한다.’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하나는 의주에서 철군한 것을 사례드리는 것이다. 하나는 진강(鎭江)의 개시(開市) 문제이다. 양서(兩西)가 탕진되어 진강에 개시하는 일이 모양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건이 다 상국(上國)에서 나오는데 상국에서 교역을 일체 끊고 있으니 개시하여도 무익하다. 하나는 포로를 쇄환하는 일이다. 병화(兵禍)가 끝난 후에 가계가 탕진되어 인력이 모자란다. 하나는 쌀을 팔아 가는 일이다. 병화가 끝난 후에 한 곳도 경작한 곳이 없어 대처하기 곤란하다.’ 하였더니, 대해가 사신의 말을 즉시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한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서 제장을 모아 예단(禮單)을 나누어 준 뒤에 다례만을 행하였습니다. 아질월개(阿叱月介) 8인이 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대해(大海)·능시(能詩) 등이 한의 뜻을 전하기를 ‘조선과 강화를 맺은 것은 정성과 믿음으로 상대하면서 유무(有無)를 교환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양서에 사람과 물건이 모두 없어서 개시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 국서에도 있으니, 사신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우선 호시(互市)로 나라 안을 왕래하면서 유무를 교역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한(先汗)이 천조(天朝)를 매우 공손히 섬겼는데 10여 년 전에 남조(南朝)의 변신(邊臣)이 우리를 곤충같이 보면서 지극히 업신여겼다. 선한이 친히 무순(撫順)에 가서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문서를 감추고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선한이 분격하여 하늘에 맹세하고 군사를 일으켜 곳곳에서 이기니, 실로 하늘의 뜻이었다. 조선과는 전부터 원한이 없었는데, 기미년121)남병(南兵)122) 과 길을 나눠 우리를 침범하였으므로 원수가 되었다. 선한이 너그러워서 장관(將官)을 죽이지는 않았고 사신을 보내 조선과 왕래하고 모장(毛將)123) 을 가도(椵島)에 가까이 두기까지 하였으며, 화친한다고 하면서 차사(差使)를 보내온 일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는데도 선한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였다. ‘또 신왕(新王)124) 이 반정(反正)한 후에는 모장과 합심하여 폐관(閉關)하고 사신을 끊었으므로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신왕과 강화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으며, 그후에 왕의 아우를 보내 호의를 보이기에 신왕의 어짊에 탄복하여 즉시 회병하게 하고 정주(定州) 등에서 잡은 인민은 그대로 놓아두고 의주에 머물러 있는 병사들을 철수하였다. 이처럼 조선을 지극히 경모하였으나 조선은 우리를 몹시 비천하게 보았으므로 원한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전후의 분노를 다 삭이고 이미 한 집안과 같이 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으니 어려울 때 서로 구원하는 것이 사람의 떳떳한 도리이다. 모병(毛兵)은 돈도 안 주고 양식을 요구한다고 들었으나, 나는 이런 기근을 당하여 돈을 주고 매매하려는 것이다. 만일 서로 구원하지 않으면 유감이 없을 수 없다. 양서(兩西) 한 편이 보전되고 6도(道)도 역시 완전하니 서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양서는 탕진되고 6도는 실농(失農)하여 지금 기근으로 굶어 죽은 사람이 많다. 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양식을 무역하는 일은 저들이 몹시 갈망하는 것인데 지금 호차가 온 것은 오로지 이 일 때문입니다. 후하게 접대해서 마음을 달래소서."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44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121]
    기미년 : 1619 광해군 11년.
  • [註 122]
    남병(南兵) : 명나라 군사.
  • [註 123]
    모장(毛將) :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 [註 124]
    신왕(新王) : 인조(仁祖)를 말함.

○回答使朴蘭英馳啓曰: "臣到瀋陽, 大海等設宴以待曰: ‘汗方出獵, 上馬之後, 聞使臣入來, 使我輩接待使臣。 君所幹何事? 將欲報知於獵場。’ 臣答曰: ‘一則謝義州捲兵也; 一則兩西蕩然, 鎭江開市, 非但不成模樣, 物貨皆出於上國, 而上國一禁通貨, 開市無益也; 一則被擄刷還也, 兵禍之後, 家計蕩然, 力有所不及; 一則糴米也, 兵禍之後, 無一處耕種, 難以應辦’ 云, 則大海曰: ‘使臣之言, 當卽報知’ 云。 汗罷獵入來, 聚會諸將, 禮單排進後, 只行茶禮。 阿叱月介八人, 來宴於臣所館處。 大海能詩等, 以汗意, 來言曰: ‘與朝鮮和好者, 不過以誠信相待, 通市有無, 而今者兩西人物一空, 開市難便之意, 在於國書, 使臣之言, 亦似有理。 然則姑宜互市, 往來國中, 交易有無。’ 又曰: ‘先汗事天朝甚恭。 十餘年前, 南朝邊臣, 見我如昆蟲, 極其侮慢。 先汗親到撫順呈文, 則匿其文而不報。 先汗發憤, 誓天起兵, 處處勝捷, 實天意也。 與朝鮮自前無怨, 己未, 與南兵分路犯我, 便作仇讐。 先汗寬弘, 不殺將官, 至於送人往來, 朝鮮接置毛將, 雖稱和送差, 皆非實事, 先汗知而不知。 且新王反正之後, 與毛將同心, 閉關、絶使, 不得已動衆, 與新王約和誓天, 而其後送王弟, 以示和好之意, 歎服新王賢聖, 卽令回兵, 留置定州等搶獲人民, 捲還義州留兵。 敬慕朝鮮至矣, 而朝鮮則視我甚卑, 不無惱恨。 然前後憤怒, 今盡掃除, 旣已誓天, 有同一家, 患難相救, 是人常理。 聞兵無價責糧, 而我則當此饑饉, 給價買賣, 若不相救, 不無憾矣。 兩西一邊則安保, 六道亦且全完, 不得不相救’ 云, 臣答曰: ‘兩西蕩然、六道失稔, 時方饑饉, 人多餓死。 情非不足, 力所不及’ 云云矣。 糧米換貿事, 則彼中十分渴望, 今者差之行, 專爲此事, 宜加厚待, 以悅其心" 云。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44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