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에서 국서를 보내 모병을 상륙시키지 말 것과 머리를 깎은 조선인을 쇄환할 것을 요구하다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호차 아질월개(阿叱月介)와 박지내(朴只乃) 등을 불러 보고 국서(國書)을 받았다. 이어 멀리 오느라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또 한추(汗酋)의 안부를 물으니, 호차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고 예단(禮單)을 올렸다. 다례(荼禮)를 행하고서 자리를 파하였다. 그 국서는 다음과 같다.
"대금국 한(大金國汗)은 조선국 왕제(朝鮮國王弟)에게 글을 전한다. 당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우호를 맺어 피차 무사하였다가 뒤에 모적(毛賊)으로 인하여 사단이 생겼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두 나라가 도로 우호하는 교분이 있어서 하늘이 거듭 화친을 맺게 하였으니, 피차가 우호를 잘 지켜 나간다면 두 나라가 함께 끝없는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명예가 멀리 천하에 전파될 것이다. 그러나 혹 마음 가짐이 부정하여 다시 화친의 일을 무너뜨리는 자는 하늘의 죄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군사가 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귀국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전에 우리 두 나라의 관계가 나빠진 것은 모두 모적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이므로 다행히 이루어진 화친을 모장이 다시 무너뜨릴까 두려워서 군대를 주둔시켜 방수(防守)하는 것이다. 지금 왕제(王弟)의 경내에 모적의 상륙을 용납하지 않고자 한다면 속히 사유를 갖추어 글로 우리에게 알려달라. 주민과 수호군이 의주에 도착하면 우리 군대는 즉시 강을 건너 돌아올 것이다. 만약 주민과 수호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 군대가 먼저 돌아올 경우에는 모적이 빈 틈을 타고 들어와 주둔하여 어지럽힐까 염려된다.
또 도망간 백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탈출해왔는데 다시 묶어 보내는 것은 결코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기미년에 귀국의 군대가 우리 경내에 들어와서 동와(東窩)·알아합실(穵兒哈失) 등처의 백성을 죽이기도 하고 포로로 잡아가기도 하였으며, 뒤에 모적을 받아들여 거주하게 하고 도주한 우리 요민(遼民)들을 수용(收容)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 비록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이기기는 하였지만 어찌 사람의 손실이 없었겠는가. 그 원래에 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공격하여 잡은 귀국 인민이 도망갔는데도 쇄환하려 하지 않고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한다.’ 하니, 과거 해를 입은 우리 나라 인민은 어찌 부모가 없으며 고향을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도망간 사람의 주인이 분이 나서 귀국까지 달려가 도망간 사람을 조사해 내어 모두 묶어 온다면 그때에 가서 두 나라의 화호가 도리어 무익하게 될까 염려된다. 이는 도망간 백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두 나라의 화친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이미 도망한 백성들은 머리를 깎고 귀순한 백성인데 서약(誓約)을 세운 뒤에 또 어찌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왕제는 잘 헤아려 도망간 백성들을 돌려보내기 바란다. 만약 도망간 백성의 부모 형제가 차마 헤어져 살 수 없어 하는 자가 있으면 조사해 내어 그들을 원주인에게 보내어 서로 의논해 속취(贖取)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국이 모두 우리가 강함을 믿고 이익을 도모하고 힘을 믿고 정벌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본래 그런 뜻이 없었다. 모두 남들에게 속임과 모욕을 당하여 마음이 불쾌해서 감히 일의 곡직을 하늘에 분명히 고하고 정벌을 한 것일 뿐이고, 일이 없는 나라를 힘을 믿고 정벌한 적은 없다. 전쟁을 어찌 길하게 여기고 태평을 어찌 흉하게 여기겠는가. 잘 헤아리기 바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2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上御崇政殿, 招見胡差阿叱月介、朴只乃等, 受其國書, 仍慰其遠來勞苦。 且問汗酋安否, 胡差辭以不敢, 仍獻禮單, 遂行茶禮而罷。 其書曰:
大金國汗, 致書於朝鮮國王弟。 當日我兩國相好, 彼此無事, 後因毛賊, 致生事端。 不意兩國, 還有相好之分, 故天使重成和事。 若彼此謹守, 不唯兩國共享無彊之福, 而美名遠播於天下矣。 倘立心不正, 復壞和事者, 難逃上天降罪。 我兵留住義州, 非疑貴國, 意謂兩國仇隙, 皆因毛賊所致, 幸得事成, 恐毛將復爲壞之, 故留兵防守耳。 今王弟邊內, 不容毛賊上岸, 宜速具書, 及發住民, 與護守之兵, 到了義州, 我兵卽時過江退回。 若住民、護兵未到, 我兵先回, 恐毛賊乘空住擾不便。 又爲逃民言: "懷思父母、鄕土, 舍命脫來, 而縛送之, 決不忍爲", 則己未年兵入我境, 殺擄東窩、穵兒哈失等處之民, 後容住毛賊, 收我逃走遼民, 以致起兵, 雖攻尅城池, 豈不損人? 其原受害之人, 舍命攻戰, 所得人民逃去, 不肯刷送, 仍言: "懷思父母、鄕土。" 昔日我國受害人民, 豈無父母、鄕土, 何嘗可離? 只恐逃人之主怯忿, 赶至貴國, 査原走之人, 混挐綁來, 那時兩國和好, 反致無益矣。 此非因得逃民, 恐兩國和事之壞也。 旣爲逃民, 則剃頭歸順之民, 立誓之後, 又何送回? 惟王弟裁思, 逃民務要與來。 若父母、兄弟, 不忍分離, 亦當査出, 交與原主, 兩相計議贖取可也。 但各國皆謂我恃强圖利, 倚力征戰, 原無此意。 皆因人之欺辱, 中心不快, 方敢以事之曲直, 昭告皇天, 以行征戰, 於無事之國, 恃力征戰者無之。 干戈何吉, 太平何凶? 尙冀裁度。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2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