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유흥조가 청과 조선이 화친하는 방법을 건의하다
유흥조(劉興祚)가 글을 올리기를,
"한인(漢人)이면서 금나라 관원인 유흥조는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대현왕 전하(大賢王殿下)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흥조는 예의의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몸으로 영락해서 오랑캐의 나라로 들어왔으나, 순역(順逆)의 분수와 종위(從違)의 이치는 약간 압니다. 지난날 금나라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귀국을 잠식할 때 백성이 유린되고 참살당한 시체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진 것을 목도하고서 흥조는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분골 쇄신토록 귀국의 군신을 위하여 난리를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줄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이 한몸의 부질없는 정성을 대왕께서는 살펴주소서.
이 나라는 풍속이 교만스럽고 탐욕스러운데, 흥조가 이미 권도로 그들의 관직을 받은 이상 어찌 감히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힘써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실로 겸손하지만 행적은 거만하였고 안에는 결백을 보존하였지만 겉은 더러움에 젖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권도(權道)에 따라 일을 하는 이 모두가 다 귀국을 위해서 주선하는 것인데, 고명하고 활달하신 전하께서 어찌 저를 밖으로 드러난 형상만 보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누차 전하의 은근하신 예우를 받았으므로 흥조는 감사한 생각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온 나라가 나에게 귀국의 동정을 묻기에 귀국 군신의 영원히 화호하려는 뜻을 간곡히 전하고, 또 방비하고 있는 금나라 군사가 소란을 부리는 것을 금하기 어려운 실정을 구체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믿지 않는 이가 없어 영원히 화호하기를 구하는 것은 우선 목전의 일만을 보아도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철병한 뒤에 수확하지 못한 의주의 벼는 묘(畝)를 계산해서 양곡으로 요구할 것과, 모수(毛帥)와는 원한이 깊으니 상륙을 용인하지 말 것과, 두 나라의 물화를 서로 무역할 것을 상의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따르면 화호가 이루어지고 병마도 철수할 것입니다마는, 귀국 군신이 뜻을 굽혀 따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진실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인데, 더구나 기한(飢寒)의 핍박을 당하는데이겠습니까. 후일 반드시 방자히 병탄하려 할 것이니, 부디 화가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편안히 지내다가 범과 동행하는 화란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귀국도 매우 다행이고 흥조도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흥조는 바로 유해(劉海)이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2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丙午/漢人金官劉興祚, 叩頭敬啓於大賢王殿下。
伏念興祚, 生長禮義之邦, 流落氈裘之鄕, 頗識順逆之分, 從違之理。 昨見此中, 倚强帥師, 蚕食貴國, 目覩生民蹂躪、肝腦塗地, 興祚恨不得痛哭流涕, 粉骨碎身, 不避艱險, 爲貴國君臣, 排亂解紛也, 一腔空懇, 天日可監。 但此國驕慢成風, 貪噬爲性, 興祚旣權受其職, 安敢不勉投所好? 所以心實謙卑, 而跡類倨侮; 內存潔白, 而外若沾濡。 摠之從權作事, 皆爲貴國周旋也。 高明曠達, 能索我於牝牡驪黃之外乎? 屢辱殿下, 禮意殷勤, 興祚銘刻五內。 一自奉使歸來, 擧國訊我動靜, 曲致貴國君臣, 願永爲和好之意, 備說設防兵馬, 難禁其擾害之情。 莫不信服, 永求相好, 姑據目前, 亦無異志。 相議撤兵之後, 義州未割田禾, 意欲計畝索糧, 毛帥仇深, 不容上岸; 兩國貨物, 相資貿易。 依此三者, 則和好可成, 而兵馬可撤, 未知貴國君相, 能曲從其情否耶? 雖然, 信不由中, 固難永久。 況爲飢寒所迫, 他日必肆倂呑, 愼毋貪處堂晏然, 以貽伴虎禍患, 則貴國幸甚, 興祚幸甚。 興祚卽海也。
-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221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