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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4월 1일 정유 6번째기사 1627년 명 천계(天啓) 7년

명나라에 청과 화친하기까지의 사정을 아뢰다

중국에 주문(奏聞)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朝鮮國王) 성모(姓某)【이종(李倧)】는 삼가 아룁니다. 사나운 오랑캐가 저돌하여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왔는데 화친하자는 저들의 요구에 따라 우선 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정이 너무 급하고 화(禍)가 절박하여 미처 아뢰어 명을 받들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진달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의정부의 장계에 의하면 ‘금년 정월 17일 평안도 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 윤훤(尹暄) 등 여러 장관이 잇따라 보낸 치계에 의거하건대 「이달 13일 4경에 노적(奴賊) 3만여 기(騎)가 갑자기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수구문(水口門)으로 들어와 수문장을 죽이고 몰래 성 안으로 들어왔으므로 군문(軍門)에서는 적군이 온 줄을 깨닫지 못했다. 본진(本鎭)의 절제사(節制使) 이완(李莞)이 급히 나아가 방어하면서 통판(通判) 최몽량(崔夢亮) 및 수하 장관들과 함께 아침까지 전투하여 적병을 많이 죽였으나 중과 부적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완·최몽량 등은 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께 죽었고 대소 장관과 수만의 민병(民兵)들도 남김없이 도륙당하였다. 이날 저녁에 적의 선봉은 벌써 정주(定州)까지 와서 한 떼의 대부대를 선천 포구(宣川浦口)로 갈라 보내어 모장(毛將)을 잡으려 하였지만 모장은 강에 얼음이 언 뒤로 운종도(雲從島)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들어가지 못했고, 사포(蛇浦)에 살고 있던 요동(遼東) 백성과 모진(毛陣)의 군병들은 모두 살해당하였다. 17일 적병이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곽산(郭山)능한 산성(凌漢山城)을 포위하고 전 병력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성을 지키던 장수 선천 절제사(宣川節制使) 기협(奇恊)은 피살되고, 정주 절제사 김진(金搢), 곽산 절제사 박유건(朴惟健)은 사로잡혔다. 20일 적이 청천강(淸川江)을 건너 안주(安州)를 급히 공격하였는데 절도사(節度使) 남이흥(南以興), 방어사(防禦使) 김준(金浚) 등이 성을 돌면서 굳게 지키자 적은 운제(雲梯)를 사용하여 전 병력이 개미떼처럼 붙어올라왔는데 세 차례 싸워 모두 물리치니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오랫동안 혈전하였으나 힘이 다해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김준 등 장관 수십 명은 진영 안에 화약(火藥)을 쌓고서 스스로 불타 죽었고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은 모두가 도륙당하였다. 적의 유기(游騎)가 갑자기 숙천(肅川)순안(順安)까지 다가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장만(張晩)의 치계에 의하면 「평양 대진(平壤大鎭)의 성을 지키는 군기(軍器)를 엄숙하게 갖추었는데 안주가 도륙당한 뒤로 군민(軍民)들이 넋이 나가서 줄을 타고 성을 넘어 도망치자, 도순찰사 윤훤이 금지시키지 못하고 그도 역시 도망쳤으므로 본성(本城)에 여러 해 동안 모아 놓았던 저축이 죄다 없어졌다. 중화(中和) 이동의 황주 대진(黃州大鎭) 및 봉산(鳳山)·서흥(瑞興)·평산(平山) 등 고을의 군민들은 새와 물고기 떼가 놀라 흩어지듯이 소문만 듣고도 지레 무너졌다. 적이 또 한 떼의 군대를 보내어 의주에서 강을 따라 올라와 창성부(昌城府)를 공격하자 절제사 김시약(金時若)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켰으나 힘이 다하고 원군도 없어서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시약이 적에게 잡히자 적이 칼로 위협하였으나 시약은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 전해오는 각처 장령(將領)들의 치보(馳報)에 의하면 「구성부(龜城府)청룡산(靑龍山), 의주금강산(金剛山)에 주둔해 있던 중국인 민병과 창성에 주둔해 있던 모진(毛鎭)의 표하군(標下軍)이 모두 적의 침범을 받았으며, 용천 절제사(龍川節制使) 이희건(李希建)용골성(龍骨城)이 격파된 뒤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전투하였고 적을 만나면 힘껏 싸워 많은 적을 쏘아 죽였는데 활시위가 갑자기 끊어지자 맨 주먹으로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적에게 살해되었다. 적이 줄곧 달려 깊숙이 들어와 평산(平山)에 이르러서는 세 진(陣)으로 나누어 주둔하고 군사를 풀어 사방에서 약탈하고 있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지하여 신(臣)이 문무 군신 및 장리(將吏)들과 회의하기를 ‘흉적(凶賊)의 선봉이 이미 서울에서 2백 리 거리인 평산(平山)까지 왔는데 다시 차단시킬 만한 곳이 없고, 제도(諸道)의 군사를 격문(檄文)으로 불렀으나 미처 다 모이지 않아 도성(都城)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장차 일이 잘못되어 손쓸 수 없는 형세가 될 것이므로 잠시 적의 흉봉(凶鋒)을 피해 후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종묘 사직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정월 그믐날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가서 한편으로는 서울을 진무(鎭撫)하고 한편으로는 기호(畿湖)지방을 진정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의 장자를 보내어 약간의 신료(臣僚)를 거느리고 먼저 전라도 등지로 가서 관군(官軍)과 의병(義兵)을 소집하고 공사(公私)의 양곡을 모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을 버리고 달아난 수신(守臣) 도순찰사 윤훤을 효수(梟首)하여 대중에게 보이고 각성(各城)의 진영에서 전사한 장관 남이흥 등에게는 포상으로 관작을 추증(追贈)하여 두터운 은전으로 구휼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자관(齎咨官) 부호군(副護軍) 황박(黃珀)을 특별히 보내어 병화를 입은 사항에 대해서 대략 한 통의 자문(咨文)을 갖추어 강화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급히 등주 군문(登州軍門)에 보고하여 조정에 전주(轉奏)하여 구원을 바라는 한편, 모 독부(毛督府)에 자문을 보내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또 의정부의 장계에 의하면 ‘적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화친을 요구하는 글을 내오자 변신(邊臣)이 치계하여 전해왔지만 본국이 미처 회답하지 못했고, 적은 또 능한 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을 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전했지만 수신(守臣)이 사자를 베고 받지 않자 적은 더욱 노하여 능한 산성을 급히 공격하여 거의 모두 살육하였다. 안주에 이르러 수신(帥臣) 남이흥에게 글을 보냈는데 남이흥이 항의하는 말로 답장하자 적은 또 병력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더욱 참혹하게 살육하였으며, 평양중화(中和)에 이른 뒤에도 계속 글을 보내 호(胡)의 차인(差人)이 세 차례 오가면서 힐책하였다. 정주에 이르러 보낸 글에 「대금국(大金國) 이왕자(二王子) 등 여러 왕자와 함께 조선 국왕에게 글을 전한다. 우리 두 나라는 본래 서로 원한이 없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남조(南朝)030) 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치는가? 이것이 첫째 조항이다. 그리고 우리가 요동을 차지하여 이웃 나라가 된 관계인데도 그대는 일찍이 우호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고, 모문룡(毛文龍)을 숨겨주고 그에게 양초(糧草)를 도와 주는 일을 아직까지 시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글을 그대 나라에 보내 모문룡을 묶어 와서 우리 두 나라가 서로 화친하자고 하였으나 그대가 또 하지 않았다. 신유년에 내가 와서 모문룡을 잡으려 할 때 그대 나라의 주민들이나 짐승들까지도 동요시키지 않았었는데 그대는 또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둘째 조항이다. 그리고 도리어 모문룡을 그대 나라에 데려다 두고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들을 불러들이고 우리의 지방을 도적질하였으니, 이것이 셋째 조항이다. 그리고 우리 선왕(先王)이 돌아가셨을 적에 원수 관계인 남조(南朝)도 와서 조문하였는가 하면 예물을 싸가지고 와서 신왕(新王)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더구나 우리 선왕께서 그대 나라에 대해 추호도 좋지 않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도 그대 나라는 조문 사절이나 축하 사절을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이 넷째 조항이다. 그리고 전년에 있었던 좋지 않은 사건은 글로 다 진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내가 대병(大兵)을 이끌고 그대 나라에 와서 강화를 요구하는 것이니 그대는 관원을 보내어 죄를 인증하고 속히 와서 강화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가 답서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그대 나라와 원한이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2백여 년이나 명(明)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겨왔다. 명나라가 그대 나라를 칠 적에 우리에게 병마를 요구하였는데, 천자의 칙명(勅命)이 있는 이상 어떻게 감히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가령 그대들도 명나라를 배반하기 전이라면 명나라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모장(毛將)은 바로 명나라의 장관(將官)이니 우리 경내에 와서 임시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리상 거절할 수가 없다. 우리 나라가 그대들과 이미 원한도 없고 또한 은덕도 없을 뿐더러 국경이 가로막혀 사신도 왕래하지 않았는데 그대 나라에 경조(慶吊)가 있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들어 알 수 있었겠는가. 과거에 우리 나라에 길흉사(吉凶事)가 있을 적에 그대들 역시 사절을 보낸 적이 있었는가. 전일에 우리 나라가 그대 나라와 우호를 갖지 않았던 것은 그대들이 명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인데 그대들이 이미 명나라와 우호를 갖는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대들과 좋게 지내지 않겠는가. 이번에 그대 나라가 까닭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뜻밖에 기습해 와서 우리의 성지(城池)를 공격하고 우리의 인민을 살상하였으니, 이는 우리 나라가 먼저 그대들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그대가 먼저 우리를 저버린 것이다. 하늘이 지각이 있다면 그대들을 잘 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두 나라가 서로 싸워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하늘이 좋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그대들이 만약 전쟁을 멈추고 통호하려 한다면 반드시 예의로써 서로 접대해야지 무력으로 위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는 대대로 예의를 지켜왔으니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그대들이 우리에게 화친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군사를 풀어 서쪽으로 돌아간 뒤에야 이 일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들이 안주(安州)에 와서 보낸 글의 내용도 앞의 것과 같았으나 또 일곱 가지의 조건을 첨가하였는데, 그 글에 「그대 나라는 우리 군대가 곧장 달려 서울까지 쳐들어가기를 바라는가? 만약 스스로 옳지 않음을 알았거든 속히 관원을 보내 와서 강화하여 두 나라가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하라. 우리 군대가 잠시 안주에 머무를 것이니 만약 차관(差官)이 오지 않으면 다시 지체하지 않고 진병할 것이다.」고 하였기에, 본국이 답서하기를 「연이어 두 통의 글을 받아 보건대, 전쟁을 멈추고 수호하여 함께 태평을 누리자는 요지였으니 그 뜻은 매우 좋다. 그러나 지난번에 수호를 바란다는 글을 보내고서 이내 군대가 그 뒤를 따라왔으니 이 점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피차 군대를 해산하고 두 나라가 우호를 갖는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적이 평양에 와서 또 보낸 글에 「보내온 글에, 천자의 칙명을 어떻게 감히 거역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금년에 복점태(卜占台)가 그대 나라의 성보(城堡)를 쳤을 때 우리가 일찍이 난을 해결하여 전쟁을 종식시켜 주었으니, 이 또한 두터운 은혜이다. 이미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래 원한이 없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명나라에는 은혜를 갚고 우리에게는 은혜를 잊는가. 기미년에 그대 나라가 군대를 내어 우리를 쳤으니 누가 누구를 저버린 것인가. 하늘의 명이 계시어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옳은 것을 알았거든 속히 강화할 사람을 보내어 와서 강화하게 하라. 그러면 나도 서둘러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대 나라의 성지(城池)를 탐내지 않고 인민을 죽이거나 약탈하고 싶지 않은데 단지 노여움을 참고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켰을 뿐이다.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다만 두 나라가 우호하여 함께 태평을 누리자는 것뿐이다.」고 하였기에, 본국이 답하기를 「보낸 사람 편에 자세한 회답을 받았다. 두 나라의 화친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많은 말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적이 중화(中和)에 와서 또 사람을 보내어 부쳐온 글에 「두 나라가 화친하는 것을 모두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한다. 귀국이 진심으로 강화를 바란다면 여전히 명나라를 섬길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통을 끊어야 한다. 만약 명나라가 꾸짖는다면 이웃 나라인 우리가 가까이 있으니 무슨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과연 이런 논의가 있게 되었으니 하늘에 고하여 맹서하고 영원한 형제의 나라가 되어 함께 태평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속히 대신을 보내어 빨리 우호를 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을 오가는데 지체되어 불편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본국이 답서하기를 「근자에 두 사신이 돌아갈 적에 바쁘게 글을 쓰다보니 미처 자세히 회답하지 못하였다. 두 나라가 서로 우호한 의리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귀국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강토 깊숙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속으로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겼다. 귀국이 보낸 전후의 이서(移書)를 보건대, 진정으로 열어 보여 태평을 누리기를 기약하였으나 글을 보낸 뒤를 이어 군사가 따라왔으니 반신반의되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근자에 초병(哨兵)의 보고를 듣건대, 귀국의 진영(陣營)이 이미 물러갔다 하니, 귀국이 화친을 구하는 것이 진정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진실로 두 나라의 복이다. 이에 사신을 보내어 휘하에게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2백여 년 동안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겨 명분이 이미 정해졌고 대의(大義)가 지극히 엄격하다. 우리 나라는 본래 예의가 밝은 나라로 일컬어졌는데, 하루아침에 명나라를 저버린다면 귀국도 장차 우리 나라를 무어라고 하겠는가.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에는 각기 그 도리가 있는 것이니, 지금 귀국과 화친하는 것은 교린이고 명나라를 섬기는 것은 사대인 것으로 이 두 가지는 같이 행해져도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각기 국경을 지켜 두 나라가 도리를 다할 뿐이니, 귀국도 이를 도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적이 평산(平山)에 도착하여 또 우리 나라가 군사를 모아 항전(抗戰)한다는 이유로 노하여 부장(副將) 유흥조(劉興祚)로 하여금 포로로 잡힌 우리 나라의 장관(將官) 강홍립(姜弘立)박난영(朴蘭英) 등을 대동하고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우리가 귀국과 강화하려 하자 귀국에서 즉시 관원을 보내와서 강화하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평양(平壤)황주(黃州)를 지키지 못한 장관들을 잡아가고 신관(新官)이 와서 군대를 정리하여 대로변과 강 연안에 모두 병마가 진을 치고 있는가 하면 각처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고 있다 하니, 이는 진심으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차인(差人)이 갔을 적에 귀국의 왕이 우리 차인을 불러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귀국의 관원들이 우리 차인을 불러다가 무릎을 꿇고 춤을 추며 예를 행하게 하였으니, 귀국의 관원들은 참으로 망자 존대(妄自尊大)하다. 이것을 보건대, 이는 대등한 예절로 대우한 것이 아니니 곧 팔도의 백성을 해치고 국가의 대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우리가 전에 귀국이 명나라와의 우호를 단절해야만 강화하겠다고 하였는데, 지금 보내온 글과 전에 보내온 글을 보건대, 명나라의 연호(年號)인 천계(天啓)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어떻게 강화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래 명나라 때문에 일으킨 것이니 일이 완결된다면 즉시 돌아갈 것이지만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서울로 가서 계속 주둔하여 농사를 지으며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귀국이 그때 가서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는 보내온 호인(胡人)을 성 밖에 머물게 하고 엄한 말로 꾸짖기를 「귀국이 까닭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우리는 진실로 화친할 수 없었으나 생민(生民)을 위해서 내키지 않는 화친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는 천지에 영구히 변치 않을 떳떳한 도리이니 이것에 죄를 얻는다면 인간의 도리가 끊어지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명나라와 부자(父子) 같은 나라인데 어떻게 나라의 존망이 위급하다 하여 신하의 절개를 바꿀 수 있겠는가. 천도(天道)는 순환하는 것이고 잘잘못은 분명히 있는 것이니 한때의 승패는 논할 것이 못된다. 전번의 글에 계속 언급하였는데 또다시 이런 말을 제기하여 천계(天啓)로 쓴 것을 말하기까지 하니, 그대 나라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 나라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차라리 나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따를 수 없다. 그대들이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이렇게 깊숙이 쳐들어왔지만, 지금은 제도(諸道)의 군사가 모두 모이고 곳곳에 의병이 일어나서 모두 일전(一戰)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이 화친을 청하기 때문에 우리도 화친을 허락하여 우선 군사를 정돈하여 기다리고 있게 했던 것인데, 그대들은 또 따르기 어려운 말로 가탈을 일으키려 하니 이는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군신은 성을 지키며 한번 싸우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면서 연일 강력히 논쟁하였더니, 유흥조도 감동하여 말하기를 「귀국은 과연 예의의 나라이다. 섬으로 피란하여 이토록 위급하고 곤궁한데도 여전히 정의(正義)를 지켜 굽히지 않으니 진실로 가상하여 감탄할 만하다.」 하였다. 그리고 유흥조가 즉시 이런 내용을 저희 왕자에게 보고하니, 왕자는 「조선이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역시 좋은 뜻이니 그들의 의사를 따라주고, 국왕의 자제를 보내어 와서 화친의 조약을 강정(講定)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의거해서 신들이 상의하기를 「이 적이 한편으로는 군사를 진격시키고 한편으로는 화친을 요구하면서 흉악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하니 배척하여 회답하지 않고서 결사의 일전(一戰)을 하는 것이 도리상 마땅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건대, 오랑캐는 금수와 같으니 금수에게 좋은 말을 듣더라도 기쁠 것이 없고 나쁜 말을 듣더라도 노여울 것이 없다. 현재 광포한 칼날이 매우 예리하여 화가 조석에 박두하였는데, 앞에는 웅거하여 지킬 만한 성지(城池)가 없고 뒤에는 믿을 만한 원군(援軍)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대의(大義)에 관해서는 저들도 우리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서 다시 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기를, 『명나라도 이미 우리와 화친을 허락하였는데 그대 나라가 유독 허락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하니, 교활한 계책이 있어 믿기는 어려우나 저들이 이미 화친을 청하는 것이 매우 정성스러우니 우선 기미책(羈縻策)으로 화친을 허락하여 병화를 늦추는 것이 오랑캐를 대처하는 방책에 합당할 듯하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를 왕제(王弟)라 호칭하여 포백(布帛) 등 예물을 가지고 오랑캐 진영으로 가게 하고 이어 본국 대신으로 하여금 유흥조와 강화부(江華府)에서 맹약하도록 하였는데, 그 맹서문(盟誓文)에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강정(講定)하였으니 오늘 이후로 두 나라는 각각 맹약을 준행하여 자기의 국경을 지키면서 작은 일로 다투지 말고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조선이 금(金)나라에 원수 갚기를 계획하여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면 하늘이 화를 내릴 것이고, 금나라가 여전히 좋지 않은 마음을 가져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하면 역시 하늘이 화를 내릴 것이다. 하늘과 땅이 이 맹약의 말을 살펴 들으신 바이다.」 하였다.

맹약을 맺은 뒤에 적이 물러가기는 하였지만 세 길로 나누어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게 하였으므로 황해도 군읍(郡邑)의 마을들이 유린당하지 않은 곳이 없어 닭이나 개조차 남아나지 않았다. 그리고 적들이 현재 평안도 지방에 주둔하여 진을 치고 있으니 앞으로의 정황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후의 적서(賊書)와 본국의 답서 및 맹서문을 개록(開錄)하여 모두 아뢰는 것이 도리에 마땅하므로 그 사유를 숨김없이 진술하여 아뢰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의거하여 보건대, 저 적은 본래 한낱 하찮은 오랑캐로서 스스로 대단한 체 날뛰어 우리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하기도 하고, 혹은 물품을 바치며 화친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버려두고 간섭하지 않는 방법을 써서 오면 받아들이고 떠나면 뒤쫓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건주(建州)적추(賊酋)가 군대를 일으켜 명나라에 반역한 뒤로 우리 나라도 명나라와 같이 저들을 원수로 여겼는데, 기미년 전쟁031) 이후로 점점 좋지 못한 관계가 이루어져 저 적이 우리 나라를 위협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저들의 소굴이 우리 나라와 매우 가까워서 다만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니 무장한 기마(騎馬)가 달려온다면 수일 이내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10년의 전쟁으로 중외(中外)가 함께 곤궁하여 국력이 이미 고갈되었고 백성들의 생명이 거의 다하였으니 아무리 엄중히 단속하여 방비하더라도 엉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위로는 천조(天朝)의 우레 같은 위엄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모장(毛將)의 범 같은 위세에 의지하여 우리의 적개심을 조금이나마 펴보기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금번 흉적이 정예병을 모두 동원하여 급히 달려와서 군대를 잠복시켰다가 은밀히 습격하였는데, 그 기세가 마치 하늘에 닿을 듯하고 빠르기가 풍우(風雨)와 같아서 서로(西路)의 큰 진(鎭)들이 차례로 함락되었습니다.

일이 창졸간에 생겨 외방의 군사가 미처 모이지 못했는데, 신은 단시 금군(禁軍)의 나머지 병졸만을 거느리고 텅 빈 성을 사수(死守)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해도(海島)로 피해 와서 초야에서 유랑하고 있습니다. 천조와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막혔으므로 달려가 호소하여 구원을 청할 겨를이 없고 모진(毛陣)도 섬 안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바다를 나와 구원할 수 없는 형세이니, 신의 사정을 ‘사방을 바라보아도 좁기만 하여 달려갈 곳이 없다.[蹙蹙而靡騁]’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저 적이 정주(定州)·안주(安州)에서부터 평산(平山)에 당도하기까지 연이어 화친을 청하는 글을 보내왔는데 수신(帥臣)이 그 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차례 무찔러 모조리 죽이고, 국서(國書)를 허락하지 않으면 다시 30리를 진격하면서 맹약하기를 위협하는 계책이 날로 더욱 흉악하고 교활하였습니다. 늦추었다 당겼다하는 속셈을 실로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짐승 같은 무리의 마음엔 신의가 없다는 것을 고사(故事)를 거울삼아 볼 수 있으니 신이 아무리 혼매하더라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사세는 이미 막판에 이르러서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어달린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군신의 분의에 조금이라도 범하는 일이 있다면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화친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도 이미 감동되어 깨닫고서 다시 서로 핍박하지 않을 경우 우호를 청하는 저들의 뜻에 따라 사신을 보내어 서약함으로써 온 나라의 생민이 살육당하는 참회를 구제하고, 이로 인하여 병화(兵禍)를 조금이라도 늦추어 강토를 보존해 지켜서 선대의 왕업을 실추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오늘날 북쪽 오랑캐의 모욕을 참는 것이 와신상담하며 스스로를 격려하여 쇠퇴(衰退)를 부흥시키고 치욕을 씻는 것이 될뿐더러 어떤 난관이 있어도 중국 조정을 저버리지 않는 충성을 후일에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은 재주가 용렬하고 복이 박하여 어려운 때를 만나서 황제의 은혜를 입고도 조금의 보답도 하지 못하였고, 사전에 미리 대비하는 일에 소홀하고 자강(自强)의 계책에 어두워 광포한 적에게 한번 핍박당하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이미 흉적의 칼날에 강력히 대항하여 도성을 지키지 못하였고, 또 적의 사신을 베고 적의 국서(國書)를 불태워 죄를 성토(聲討)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흉악한 무리와 국서를 통하며 서약을 맺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만 스스로 가슴만 칠 뿐입니다. 비록 황제를 받드는 일념이 분명한 진심이지만 장차 무슨 말로써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생각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부모의 꾸중을 두려워하여 즉시 실정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불효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고 지난날 속이지 않고 섬겼던 정성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진정을 토로하여 이 글을 올리고 삼가 꾸중을 기다리는 바이니 천지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는 애처롭게 여기시어 살펴주소서."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189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註 030]
    남조(南朝) : 명(明)나라.
  • [註 031]
    기미년 전쟁 : 1619(광해군 11년) 명나라가 약 12만의 대군으로 후금을 정벌하러 갔다가 후금군에게 참패한 전투로,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이 1만 3천의 조총수를 위주로 전투에 파견했다. 후금군의 공격으로 부차(富車)에서 패전해서 8천 명이 죽자, 강홍립은 나머지 5천명을 거느리고 후금에 항복했다.

○奏聞于皇朝。 其文曰:

朝鮮國王姓某謹奏。 爲狂虜豕突, 猝逼京邑, 因其要和, 且與羈縻。 勢急禍迫, 無暇稟承。 備陳情實, 冀蒙照察事。 據議政府狀啓云: "本年正月十七日, 據平安道都巡察使尹暄等諸將官, 節續馳啓: ‘本月十三日四更時分, 奴賊三萬餘騎, 卒襲義州, 從水口門, 殺其門將, 潛師以入城中, 軍門不覺兵至。 本鎭節制使李莞, 倉卒出禦, 與通判崔夢亮及手下將官, 搏戰至朝, 賊兵多死, 而衆寡不敵, 力不能支, 李莞崔夢亮等抗賊不屈, 同被磔殺, 大小將官、數萬民兵, 屠戮無遺。 是日夕, 前鋒已至定州, 一枝大隊, 分向宣川浦口, 要搶毛將, 毛將自氷合後, 駐雲從島, 賊兵不得入, 將蛇浦所住民及鎭軍兵, 盡行厮殺。 十七日, 賊兵乘勝進圍郭山 凌漢山城, 悉衆攻陷, 守城將宣川節制使奇協被殺, 定州節制使金搢郭山節制使朴惟健被擄。 二十日, 賊渡淸川江, 急攻安州, 節度使南以興、防禦使金浚等, 嬰城固守, 賊用雲梯, 悉衆蟻附, 三戰三退, 賊亦死傷頗多。 血戰良久, 力盡城陷。 南以興金浚等將官數十員, 積火藥於中營, 自燒死, 守城兵民數萬口, 屠戮殆盡。 游騎遽迫肅川順安等因。’ 據都體察使張晩馳啓: ‘平壤大鎭, 守城軍械, 始甚嚴備, 而自見安州屠戮, 軍民褫魄, 縋城逃潰, 都巡察使尹暄不能禁制, 亦自遁避, 本城積年蓄聚, 蕩然都盡。 中和以東黃州大鎭及鳳山瑞興平山等邑軍民, 鳥驚魚駭, 望風先潰。 賊又送一枝兵, 自義州沿江而上, 攻打昌城府。 節制使金時若, 獨守孤城, 力盡無援, 城遂陷。 時若被執, 賊以刃脅之, 時若罵賊不屈, 與其二子俱被殺。’ 又續據各處將領馳報: ‘龜城府 靑龍山義州 金剛山屯駐漢人兵民及昌城留屯鎭標下軍兵, 俱被賊兵搶犯, 龍川節制使李希建, 自龍骨城潰破之後, 收散兵轉鬪, 遇賊力戰, 射賊甚多, 弓弦忽斷, 空拳冒刃, 被賊殺死。 賊長驅深入, 至于平山, 分屯三陣, 放兵四掠等因。’" 據此, 臣與文武群臣、將吏, 會議得以爲: "兇賊先鋒, 已到平山, 距王京僅二百里, 更無〔遮截〕 之地。 諸道之兵, 雖已檄召, 未及畢集, 都城震駭, 將有土崩之勢, 不可不暫避兇鋒, 以爲後圖。" 不得已奉廟社主, 乃於正月晦日, 遷入江華島中, 一以鎭撫京城, 一以控制畿湖。 分送臣長子某, 率若干臣僚, 先往全羅等道, 號召官軍、義旅, 召募公私糧穀。 將棄城守臣都巡察使尹暄, 梟首示衆; 各城陣亡將官南以興等, 褒贈優恤。 專差齎咨官副護軍黃珀, 將被兵等項, 略具一咨, 從江華海路, 飛報登州軍門, 以冀轉奏援救, 且移咨督府, 以通聲息。 又據議政府狀啓: "賊至定州, 送書求和, 邊臣馳啓以傳, 而本國未及回答。 賊又於凌漢圍城之時, 差人投書, 守臣斬使不受, 賊益怒, 急攻凌漢, 殺掠殆盡。 至安州投書於帥臣南以興, 以興等抗辭答之, 賊又悉衆攻陷, 屠殺尤慘, 至平壤、至中和以後, 連次送書, 差三至, 往復辨詰。 至定州書曰: ‘大金國二王子同衆王, 致書于朝鮮國王。 我兩國, 原無仇恨, 今何爲助南朝, 兵馬欽伐我國? 此一宗也。 我得遼東, 旣係隣國, 爾曾無一句好語, 及窩隱毛文龍, 助他糧草, 尙不較正。 寫書與爾國, 毛文龍等綁來, 我兩國和好, 爾又不肯。 辛酉年, 我來挐毛文龍, 爾國屯民、鷄犬不動, 爾又不謝, 此二宗也。 爾還把毛文龍, 放在爾國, 招我逃民, 偸我地方, 此三宗也。 我先汗歸天, 有仇如南朝, 而尙來弔問, 齎禮來賀新汗。 況我先汗, 與爾國毫無不好心腸, 爾國無一人弔賀, 此四宗也。 先年尙有不好事件, 筆難盡述。 用此, 我方統大兵, 來爾國要和好, 差官認罪, 火速來講。’ 我國答書曰: ‘我國與爾, 本來無怨恨。 我國臣事皇朝二百餘年。 皇朝伐爾國時, 要我兵馬, 旣有天子勑命, 何敢違也? 且如爾未背皇朝時, 皇朝有命, 爾其不從乎? 毛將旣是天朝將官, 來寄我壃, 義不可拒。 我國與爾旣無怨, 又無恩。 壃域阻隔, 信使不通。 爾國有慶弔, 我豈聞知? 向來我有吉凶, 爾亦嘗通問乎? 前日, 我國不與爾通好者, 以爾之背皇朝也。 爾旣與皇朝通好, 則我國何故, 與爾不好也? 今者, 爾國無故動兵, 出我不意, 攻我城池, 殺我人民, 是我國未嘗負爾, 而爾先負我。 上天有知, 其將以爾爲直乎? 雖然, 兩國相戰, 多殺人命, 非天所好也。 爾若息兵通好, 則必以禮義相接, 不可以兵戈相脅。 我國世守禮義, 不忍爲此。 爾若要我通和, 須先解兵西歸, 方講是事。’ 其至安州書, 大意如前, 又添七宗惱恨。 又曰: ‘爾國, 要我兵長驅直到耶? 若自知不是, 快速差官來講, 兩國共享太平。 我兵暫駐安州, 若差官不到, 再進兵不遲。’ 本國答書曰: ‘連得二書, 要息兵、修好, 共享太平, 其意甚好。 但前書旣云 「要好」, 而兵隨其後, 此我之所未曉也。 自今以往, 彼此解兵, 兩國和好, 豈不美哉?’ 賊到平壤, 又送書曰: ‘來徵云: 「旣有天子勑, 何敢違也?」 當年卜占台搶爾國城堡, 我曾解難息兵, 亦厚恩也。 旣稱兩國原無仇恨, 何報恩于南朝, 而忘恩于我也? 己未年爾國出兵伐我, 誰負誰也? 上天有(令)〔命〕 , 我有今日矣。 如今自知可是, 速差好人來講。 我亦快速回去。 我不要爾國城池, 不要殺掠人民, 只因氣忍不過, 故此發兵。 旣差人, 直是兩國和好, 共享太平。’ 本國答書曰: ‘差人來, 承縷縷報示。 兩國和好已定, 不用多少說話。’ 賊到中和, 又差人送書曰: ‘兩國和好, 共言美事。 貴國實心要講, 不必仍事南朝, 絶其交往。 若南朝嗔怪, 有我隣國相近, 何懼之有? 果有此議, 告天誓盟, 永爲兄弟, 共享太平。 速差大臣, 快定和好。 不然, 道路往返, 遲滯不便。’ 本國答書曰: ‘日者兩价之還, 怱怱作書, 未及詳覆。 兩國相好之義, 其來有日。 貴國無故動兵, 深入我境, 私怪其故。 蒙貴國前後移書, 開示悃愊, 期享太平, 而兵隨書後, 事與言異, 乍信乍疑, 未以爲然。 近接哨報, 聞貴陣已爲退舍, 足見貴國求和, 出於眞情, 此固兩國之福也。 玆以專差使臣, 進詣麾下。 我國臣事皇朝, 二百餘年, 名分已定, 大義至嚴。 我國素以禮義著稱, 如使一朝而負皇朝, 則貴國亦將以我國何如哉? 事大交隣, 各有其道。 今和貴國者, 所以交隣也; 事皇朝者, 所以事大也。 斯二者, 竝行而不相悖耳。 唯有各守封壃, 兩盡道理, 惟貴國圖之。’ 賊到平山, 又以我國聚兵拒戰爲怒, 令副將劉興祚, 帶同本國被擄將官姜弘立朴蘭英等齎書以來。 其書曰: ‘我欲講好, 貴國卽差官來講, 我以爲實。 今聽, 平壤黃州失守將官拿去, 新官來, 整理兵丁, 緣路、沿江, 俱是兵馬下營。 又各處聚兵、練士, 非實心講好。 且我差人去, 貴國王不唯不叫見, 貴國之官, 叫我差人, 跪舞行禮, 爾的官員, 妄自尊大。 看來, 不是爭禮節, 是害八部道之小民, 壞國家之大事也。 我向說: 「貴國, 與南朝斷絶, 我方講和。」 今見來文, 照舊書天啓年月, 旣如此, 怎麽講得好? 我起兵, 原是爲南朝而起。 事若完, 卽去, 若事不完, 我到王京, 駐下耕種, 也不回去。 貴國那時, 追悔何及?’ 本國館接差於城外, 嚴辭斥之曰: ‘貴國無故興兵, 我固不當相和, 而爲生民, 雖逆意許和, 至於君臣分義, 天地常經, 得罪於此, 人道絶矣。 我國於天朝, 父子之國, 豈可以危急存亡, 變易臣節乎? 天道好還, 曲直有在。 一時勝敗, 非所論也。 前書縷縷及之, 而又復提起此說, 至以不書天啓爲言, 不料爾國無禮無義, 至於如此, 寧以國斃, 斷不可從。 爾雖乘我不備, 深入至此, 今則諸道之兵俱集, 處處義兵, 皆願一戰, 而爾旣請和, 我亦許和, 姑令嚴兵以待。 今爾又以難從之言, 欲爲生梗, 是不欲和也。 唯有君臣上下, 背城一戰而已。’ 連日力爭, 則劉興祚亦感悟曰: ‘貴國, 果是禮義之邦。 播越海島, 危困如此, 而猶得守正不撓, 誠可嘉歎。’ 興祚卽以此意, 揭報于其王子則曰: ‘朝鮮不負天朝, 亦是好意思, 宜從其意, 可遣國王子弟, 來此講約。’ 據此, 臣等商議得: ‘此賊一邊進兵, 一邊求和, 兇辭、悖語, 不一而足。 理宜斥絶不報, 決一死戰, 而第念夷狄禽獸也。 得其善言, 不足喜; 得其惡言, 不足怒。 目今狂鋒盛銳, 禍迫朝夕, 前無可據之險, 後無可恃之援。 至於天朝, 大義所在, 則渠亦知我志不可奪, 不復相迫。 且云: 「天朝亦已許和, 爾國何獨不許?」 狡計所在, 雖難憑信, 渠旣請和甚懇, 姑許羈縻, 以緩兵禍, 似合待夷之策。’ 差原昌君 李玖, 稱爲王弟, 齎布帛等送禮之物, 前赴營, 隨令本國大臣, 與劉興祚盟於江華之府。 其誓文曰: ‘我兩國, 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約誓, 各守封壃, 無爭競細故, 無非理徵求。 若我國, 與金國計仇, 違背盟好, 興兵侵伐, 則亦皇天降禍; 若金國仍起不良之心, 違背和好, 興兵侵伐, 則亦皇天降禍。 皇天、后土, 鑑聽此言。’ 立誓之後, 賊雖退歸, 而分三路, 縱兵大掠, 黃海道郡邑村閭, 無不被其蹂躪, 鷄犬不遺。 今方屯結於平安道地方, 日後情形, 雖難測知, 而其前後賊書、本國答書及誓文, 理宜開錄具奏, 洞陳無隱等因具啓。" 據此臣竊照, 伊賊本一小醜, 跳梁自大, 或侵掠我邊, 或獻物求款。 小邦治以不治, 來則受之, 去則勿追而已。 自建酋稱兵作逆之後, 小邦便有同仇之義, 己未之役, 轉成讎釁, 伊賊之狺然小邦, 蓋已久矣。 巢窟迫近, 只隔一水, 鐵騎一馳, 數日可至。 小邦兵興十年, 中外俱困, 國力已竭, 民命垂盡, 雖申嚴隄備, 未免踈虛。 惟思仰仗天朝雷霆之威, 下依毛將虎豹之勢, 小伸區區敵愾之意。 不意今者, 兇賊悉銳疾驅, 潛師暗襲, 勢若滔天, 急如風雨, 西路大鎭, 次第摧陷。 事出蒼皇, 外兵未集, 臣只率禁旅殘卒, 勢難死守空城, 播棲海島, 越在草莽。 天朝道路阻絶, 旣無暇馳籲請救; 毛鎭駐箚島中, 勢未及出海而相援。 臣之情事, 可謂蹙蹙而靡騁。 伊賊自定州安州, 至于平山, 連送請和之書, 帥臣不受, 則鏖殺一番; 國書不許, 則進兵一舍, 脅盟之計, 日益兇狡。 操縱情僞, 實難測度; 獸心無信, 故事可鑑。 臣雖昏昧, 豈不知此, 而但今日之勢, 已到十分, 宗社之危, 僅如一髮。 若君臣分義, 或有干犯, 則雖身殞、國亡, 決不可許。 渠旣感悟, 不復相迫, 因其請好, 遣使約誓, 以救一域生民魚肉之慘, 倘得因此, 小緩兵禍, 保守疆土, 免墜先業, 則今日之忍辱北, 無非所以薪膽自勵, 興衰雪恥之圖, 而萬折必東之誠, 庶可暴白於他日矣。 但念臣才劣、祚薄, 遭時艱難, 蒙被皇恩, 未效涓埃。 忽於先事之備, 昧於自强之策, 一逼狂寇, 顚沛失措。 旣不能力抗兇鋒, 固守都城; 又不能斬使焚書, 聲罪致討, 忍與兇醜, 通書講誓, 思之至此, 只自搥胸。 雖拱北一念, 炳然如丹, 亦將何辭而自解哉? 仍念臣之事君, 猶子事父。 子有過犯, 恐父母之譴怒, 不卽開陳情實, 則是愈重其不孝之罪, 而從前事上勿欺之誠, 掃地盡矣。 玆敢瀝血封章, 恭竢誅譴, 伏惟天地父母, 哀憐垂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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