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립·박난영을 불러보고 청의 정황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강홍립과 박난영을 인견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패전한 뒤에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오랑캐에 함몰되어 있은 지가 지금 이미 9년이 되었는데, 다시 전하를 뵈니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랑캐의 정세가 어떠한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군대가 뜻밖에 출동되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작년 10월에 유해(劉海)·대해(大海) 등이 와서 신에게 묻기를 ‘중원이 우리와 원수진 것이 이미 깊은데도 선한(先汗)025) 이 사망하고 신한(新汗)이 즉위한 것을 이유로 오히려 차인이 와서 경조(慶弔)의 예를 행하였는데, 조선은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았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당신 나라와 원수진 것이 없으니, 과연 들어서 알았다면 어찌 사람을 보내지 않았겠는가. 다만 모문룡(毛文龍)에 의해 막혔기 때문에 미처 듣지 못한 성싶다.’ 하였습니다. 그 뒤에 유해가 또 와서 묻기에 신이 전일의 뜻으로 답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7일 신이 오신남(吳信男)·박난영(朴蘭英)·박규영(朴葵英) 등과 한 장소에 있었는데 말을 주고 갖옷도 주면서 말하기를 ‘군중(軍中)을 따라가야 하겠다.’ 하더니 이튿날 비로소 행군하였습니다. 요동을 지난 지 3일 만에 노장(虜將)이 불러 묻기를 ‘우리가 모문룡을 포박하여 보내달라고 하면 조선이 장차 따르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포박하여 보내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우리 나라가 어찌 애석하게 여길 리야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신들이 전진하니 의주(義州)가 이미 함락당하였고 그 이튿날 또 능한 산성(凌漢山城)도 함락되었습니다.
정주(定州)에 있을 때 호장(胡將)이 신에게 ‘당신 나라에 사람을 시켜 심부름보내고 싶다.’ 하기에, 신이 ‘만약 사람을 심부름보내면 우리 나라에서 반드시 다행으로 여길 것이다.’ 하니, 호장이 바로 허락하여 체두(剃頭)를 하지 않은 사람 및 신의 종을 선택하여 능한 산성에 보냈는데 받아주지 않아 되돌아왔습니다. 안주(安州)가 함락됨에 이르러서는 호장이 또 ‘안주가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화친을 허락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문서를 보낸 뒤에 27일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또 다시 군사를 출동시켜 평양에 이른 뒤에 한 절반은 돌아가자고 하고 절반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다시 병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였는데 중화(中和)에 이르니 국서가 이미 왔었습니다.
귀영개(貴永介)의 아들 요토(要土)가 ‘조선은 우리와 원수가 아닌만큼 이미 1도를 쳐부셨으니 지금 또 진군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에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수장(首將)인 왕자라고 칭하는 자가 불가하다고 하여 드디어 황주(黃州)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날 박립이 먼저 가서 사신을 보내왔다는 말을 보고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호차가 돌아옴에 이르러서는 호장이 성을 내어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부르기에 신들이 나아가니 국서가 이미 개봉되었었습니다. 저 적은 언제나 황조(皇朝)를 신하로 섬기는 것을 불가하게 여겼는데, 국서를 본 뒤부터는 이에 말하기를 ‘조선이 2백 년 동안 황조를 신하로 섬겼다는 말이 극히 신의가 있으니, 이들과 우호를 통하면 오래 지속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숙부가 볼모로 있기 때문에 신을 보내어 화친을 결정하고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방이 강홍립에게 말하기를,
"그것이 과연 진정에서 나온 말이오?"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平山)의 군량과 꼴이 이미 다하였으니 속히 회답하면 깊숙이 들어오는 걱정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해(劉海)가 무슨 일로 나왔는가?"
하니, 홍립이 아뢰기를,
"유해가 요구하는 물건은 온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도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으므로 감히 다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저들의 칼날이 어디까지 미칠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소."
하였다. 윤방이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던가?"
하니, 홍립이 말하기를,
"평산에서 물러가 평양에 머무르다가 풀이 자란 뒤에 돌아갈 것이라고 하오."
하였다. 상이 박난영을 불러 이르기를,
"보고 들은 것을 다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적정은 홍립이 이미 모두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전한(前汗) 때부터 언제나 ‘두 나라가 화친을 통하면 그대들은 마땅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면서 항상 손님의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지금 화친을 청한 것이 진정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화친하고 싶으면 마땅히 신의를 지켜야 되는데, 지금 도리어 화친을 청하면서 한결같이 진군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아뢰기를,
"자기네들 중에서 진군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신이 들어간 뒤부터는 군중(軍中)이 퍽 기뻐하였습니다. 저들이 요구한 것이 많으나 어찌 끝없는 욕심을 다 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화친을 결정하게 되면 즉시 군사를 퇴각시켜야 되는데 평양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난영이 말하기를,
"저들은 언제나 ‘조선은 마땅히 강화만 해야 할 뿐이지 우리들의 소유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7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註 025]선한(先汗) : 선대의 군주(君主).
○上引見姜弘立、朴蘭英。 弘立曰: "僨事之後, 頑命不死, 陷沒虜中, 今已九年。 復見天日, 不知所達。" 上曰: "虜情如何?" 弘立曰: "兵出不意, 未知所以, 而上年十月, 劉海、大海等, 來問於臣曰: ‘中原與我讎怨已深, 而以先汗亡、新汗立, 故尙有差人來修慶弔之禮, 朝鮮何不送人來耶?" 臣答曰: ‘我國, 與爾無怨, 果若聞知, 豈不送人? 但恐道路爲毛文龍所阻, 未及聞也。’ 其後劉海又來問, 臣以前意答之。 今年正月初七日, 臣與吳信男、朴蘭英、朴葵英等, 同在一處, 給馬、給裘曰: ‘當於軍中從行。’ 翌日始乃行軍。 過遼東三日, 虜將招問曰: ‘我令縛送毛文龍, 則朝鮮將從之乎?’ 臣答曰: ‘縛送則未可知, 而我國豈有顧惜之理?’ 云矣。 其明日, 臣等前進則義州已陷矣, 其翌日又陷凌漢。 在定州時, 胡將謂臣曰: ‘欲伻人爾國’云, 臣曰: ‘若伻人則我國必以爲幸。’ 胡將卽許之, 擇送不剃頭之人及臣奴於凌漢, 則不納而還。 及陷安州, 胡將又曰: ‘安州已陷, 亦不許和乎?’ 旣送文書之後, 不待二十七日之限, 又復動兵, 到平壤之後, 一半則欲還, 一半則以爲不可, 更欲動兵, 到中和則國書已來矣。 貴永介之子要土以爲: ‘朝鮮與我非讎, 旣破一道, 今又不可進兵。’ 諸將皆欲從之, 而首將稱王子者, 以爲不可, 遂進兵黃州。 其日朴雴先往, 報以遣使臣之言, 則諸胡皆喜, 及胡差還, 胡將發怒進兵。 聞使臣之來, 招臣等, 臣等進去, 則國書已拆矣。 彼賊每以臣事皇朝爲不可, 自見國書, 乃曰: ‘朝鮮二百年臣事皇朝之言, 極有信義。 若與之交好則可久矣。 今者臣叔父爲質, 故乃遣臣, 使之定和以來矣。" 尹昉謂弘立曰: "此果出於眞情耶?" 弘立曰: "平山糧草已盡, 須速回答, 可免深入之患。" 上曰: "劉海以何事出來耶?" 弘立曰: "劉海所求之物, 雖竭一國之力, 似難應副, 而不敢盡達。" 金瑬曰: "和若不成, 則渠欲何爲?" 弘立曰: "渠之兵鋒所及, 與夫歲月遲速, 未可知也。" 昉曰: "若定和則何以爲之云耶?" 弘立曰: "當自平山, 退留平壤, 待草長, 乃還云。" 上召朴蘭英曰: "可悉陳聞見。" 對曰: "賊情則弘立旣已盡達, 而自前汗時每言: ‘兩國通和, 則爾等當還。’ 常以客禮待之。 今之請和, 似是眞情。" 上曰: "欲和則當守信義, 今乃請和, 而一向進兵, 何也?" 蘭英曰: "自中亦有以進兵爲不可者, 自使臣入往之後, 軍中頗喜。 渠之所求雖多, 豈可盡副溪壑之慾乎?" 瑬曰: "旣已定和, 當卽退師, 而欲留平壤, 何也?" 蘭英曰: "渠等每言: ‘朝鮮當講和而已, 不可爲己有’ 云矣。"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1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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