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인조실록 12권, 인조 4년 3월 21일 갑자 7번째기사 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대제학 김류가 쓴 계운궁의 묘지문

상이 계운궁(啓運宮)045) 의 행장(行狀)을 내려 대제학 김류(金瑬)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써 올리도록 하였다. 그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대통(大統)을 이은 지 4년째 되는 병인년 1월 14일 무오에 계운궁의 병세가 악화되어 경덕궁(慶德宮)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하직하시니, 그때 춘추가 49세였다. 초빈하고 난 다음달 성상께서 세계(世系)와 언행에 관한 일체 사항을 써 주시면서 신 유(瑬)에게 그것을 토대로 묘지명을 쓰도록 명하시었다. 신 는 상소하여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일단 그 행장을 읽고나서 삼가 생각건대 옛날 주공(周公)문왕(文王)·무왕(武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대명(大明)생민(生民)의 시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내용은 모두 선조(先祖)와 선비(先妃)의 덕을 추모한 것들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이들치고 그 조상 적부터 장차 경운(景運)이 크게 열릴 수 있도록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대명을 맞아들일 소지를 마련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계운궁이라고 이름한 것이 그 얼마나 걸맞는 칭호인가. 아, 훌륭하다 하겠다. 이에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계운궁은 성이 구씨(具氏)이고 파계는 능성(綾城)이다. 먼 조상인 휘(諱) 존유(存裕)가 고려조에 벼슬하여 이름이 있었고 국조(國祖)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벼슬이 끊기지 않아 마침내 크게 현달했다. 증조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휘는 희증(希曾)이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사헌부 감찰로 휘가 순(諄)인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휘 사맹(思孟)은 문학으로 문과에 우등으로 뽑히고 세상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명종(明宗) 이래로 임금을 계속 섬겨 요직과 현직을 역임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마감하였는데, 아들 구성(具宬)구굉(具宏)이 호성 공신(扈聖功臣)과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됨을 인하여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순충 병의 보조(純忠秉義補祚)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의정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신씨는 고려조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서 영의정과 평주 부원군(平洲府院君)에 추증된 화국(華國)의 따님이었다. 이 사이에서 바로 계운궁이 출생하였으니 때는 무인년 4월 17일 무술이었다.

계운궁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겨우 4세에 이미 예(禮)로 몸가짐을 할 줄 알았고 5세가 되자 어린 티가 없이 의연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하루는 부모를 모시고 음식을 먹다가 몇 수저 뜨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이상히 여긴 부모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부르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밥상을 물릴 때 보니 그 음식에 오물이 섞여 있었다. 이때부터 부모는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부모는 그의 행동을 보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에게만 주고 계운궁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에 부모가 그를 사랑하여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내 딸은 진짜 딸이다. 다음에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 하였다.

선조 대왕은 평소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046) 을 기국이 있다고 여겨 사랑하였는데 경인년에 가례(嘉禮)를 치르려고 대등한 짝을 고르기 위해 사대부 집 딸들을 모두 대궐로 모이게 하고 친히 간선(簡選)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를 하고도 맞는 짝을 찾지 못하다가 계운궁을 한 번 보고는 금방 마음에 들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빈어(嬪御)들도 모두 하례하였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그 해 10월 3일에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게 하였다. 대원군은 인빈(仁嬪)의 소생이었는데, 덕이 있고 식견이 높은 인빈도 늘 훌륭한 우리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선조 대왕이 여사(女史)에게 명하여 《소학(小學)》 등 여러 서적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는 다 읽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음의(音義)를 통하였다. 또 따스하고 인자한 가운데 말이 적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높은 이는 높은 이대로 낮은 이는 낮은 이대로 맞게 행동하였으므로 궁중에서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대원군을 섬기면서도 순하고도 올바르게 받들어 활기차고 고운 얼굴로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감히 아내의 위치에 있다고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측출(側出)에게도 사랑으로 대하고 동사(僮使)에게도 너그럽게 대하여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위아래 할 것이 없이 모두 법식이 있었으므로 대원군도 그를 매우 높이고 소중히 여기었다. 급기야 하늘이 돌보시어 성자(聖子)를 낳게 되었는데 때는 만력(萬曆)047) 을미년048) 이었다. 이른바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아 경운(景運)이 크게 열리게 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무신년에 선조께서 승하하시자 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였고 인빈의 초상 때에도 그러하였다. 을묘년049) 에 막내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참혹한 화를 당하자 대원군이 비통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이때 계운궁은 병석을 떠나지 않고 여러 해 병시중을 들면서 약을 달이거나 더럽혀진 의복을 세탁하는 일 등을 남에게 시키지 않고 모두 손수하였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는 물 한 모금 입에 넣지않고 울부짖다가 졸도까지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으로만 연명하였다. 그리고 동기간의 대접과 잉첩(媵妾)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대원군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후하게 대하였다. 겨레붙이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남의 급한 일을 보살피는데 있어서도 가난하고 천한 이부터 우선 하였으며, 처음 능창군의 참화가 있었을 때 친속 중에서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발걸음을 끊은 자도 있었지만 그들을 대할 때도 말이나 얼굴에 기색을 나타내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대하였다.

한 평생 부귀의 티 없이 화사한 비단옷을 몸에 걸친 일이 없었고, 언제가 깊이 간직해두었던 진귀한 보배를 잃어버렸을 때 숨겨놓은 곳을 알면서도 그것을 불문에 부치고 말하기를 ‘남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대의(大義)에 밝아 경중과 완급을 알았는데 반정 때에는 금백(金帛)을 모두 꺼내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기도 하였으며, 거의(擧義)하던 날에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다. 위기와 변란을 당하면서도 그때그때 알맞게 처리하여 대업을 달성하는데 한 몫을 하였고 그리하여 큰 터전을 다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덕택이었던가. 갑자년 봄 역적 이괄(李适)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육박하여 왔을 때 대가가 남쪽으로 옮겨 수원(水原)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따르는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싸여 뿔뿔히 흩어질 기미를 보이자 주머니를 털어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고, 대비(大妃)를 극진한 효성과 공경으로 받들고 곡진하게 순종하면서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해이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병이 들어도 푸닥거리 같은 것을 일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비는 것이 헛된 일이라면 애당초 말아야 할 것이고, 응험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미망인(未亡人)인데 빌어 무엇을 할 것인가.’ 할 정도로 사리에 밝아 현혹됨이 없었다. 무신년 이후 언젠가 꿈에 선왕(先王)이 계운궁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집에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를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옥새를 내어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특별히 그에게 주고 나의 가르친 말을 전하라.’ 하자 계운궁이 절하고 사례한 후 묻기를 ‘신정(新政)에 최선을 다하면 이 나라를 진압하고 창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였는데, 그 역시 신묘한 일이었다. 아, 빛나신 열조(列祖)의 영령이 우리 성상을 격려하여 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뒤를 이어 복을 받아 이 나라에 억만년토록 끝없이 빛나는 길을 열게 하였으니, 그 꿈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었다.

계운궁은 계해년에 병이 들어 갑자년에 점점 심해지다가 병인년에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예빈(禮殯)을 하고 예장 도감(禮葬都監)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니 종백(宗伯)이 상례를 맡고 탁지(度支)가 일을 주관하였으며 빈궁(殯宮)은 장작(匠作)이 맡아 다스려 위아래가 총동원되어 일을 마쳤다. 반정 초기에 조정 대신의 논의에 따라 정원군(定遠君)에게 대원군(大院君)의 칭호를 붙였고 궁(宮)의 호를 계운으로 하였다. 누차에 걸쳐 임금이 근성(覲省)하려고 사제(私弟)에 납시다가 그것으로 부족하여 직접 대내(大內)에 옮겨 모시고 별공(別供)과 시선(時膳)을 빠짐없이 갖추어 끝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새 택조(宅兆)를 김포현(金浦縣) 뒷산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였는데, 그해 4월 25일 장례를 모시고 그 바른편 자좌 오향(子坐午向) 자리는 대원군을 옮겨 모시기 위하여 비워두었다.

계운궁은 아들이 세 분인데, 맏이가 바로 당저(當宁)로서 청주 한씨(淸州韓氏)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謙)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보위에 올라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늘로부터 복을 받아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왕()으로 왕세자에 책봉되고 다음은 아무 【 금상(今上)으로 휘는 호(淏).】 이고 다음은 요(㴭)이고 다음은 곤(滾)인데 모두 어려 아직 봉호가 없으며 딸은 맨 끝이다. 그리고 계운궁의 둘째 아들은 능원군(綾運君) 이보(李俌)인데 현재 슬하에 자녀가 없이 정원 대원군의 제사를 맡고 있고, 셋째는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으로 호협하고 재주가 영특하였으나 지난 혼조(昏朝) 때 간사한 무리들의 날조된 모함에 빠져 섬으로 귀양갔다가 17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아직 부인을 맞이하기 전의 일이었다. 명(銘)하기를,

어느 산 이보다 더 높으며

어느 시내 이보다 더 깊을까

근원이 깊어 멀리 흐르듯

쌓임이 많으면 동나지 않는다네

구씨라면 대단한 문벌로서

선덕이 쌓여 복조가 열렸다

그 문호를 의정공이 더 넓혀

전대에 비하여 더욱 빛이 나네

훌륭한 따님이 탄생한 것은

그 덕과 그 유래가 있어서라네

맑은 자질과 어른다운 법도

어린 시절부터 양성되었네

배우지 않고도 그리 되었던 것

어짜 타고나서만 그랬겠는가

올바른 일만 하는 가문의 전통에

귀에 젖고 눈에 젖어 그런 것이겠지

혼기를 맞은 대원군을 위하여

걸맞은 어진 짝을 찾고 있을 때

왕께서 한 번 보고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보다 앞설 자 그 누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를 왕자비로 맞고서는

법도와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모든 영령들이 그를 돌보아

성자를 탄생시켜 양육케 하였네

아, 빛나신 성조께옵서도

오르내린 넋이 하늘에 계시면서

어느날 밤 갑자기 꿈에 나타나

옥새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네

선왕을 이어 갈 신손께서

탈없이 이 나라 장래를 걸머졌다네

대의를 밝혀 떨쳐 일어나자

하늘과 땅이 제대로 운행되었네

떳떳한 윤리가 바로 잡히고

흐렸던 해와 달도 빛을 다시 찾았네

어머니 공로가 크기도 하였으나

인력으로 된 것만은 아니었다네

예를 갖춘 융숭한 대접으로

오래오래 사시리라 여겼더니

무정한 병마가 점점 심하여

흐려진 정신이 육신을 떠났네

예부터 일궈 온 김포 고을

한강 서쪽에 자리잡은 곳에

무덤 자리 마련하여 일을 마치니

새로운 묘역이 이에 열렸네

야무지고 단단한 돌을 골라서

갈고 다듬어 거기에 새기려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지어

현궁 속에 함께 묻으려 하네

라 한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8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註 045]
    계운궁(啓運宮) : 인헌 왕후(仁獻王后) 인조(仁祖)의 생모.
  • [註 046]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 : 원종(元宗) 이부(李琈)로서 인조의 생부.
  • [註 047]
    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 [註 048]
    을미년 : 1595 선조 28년.
  • [註 049]
    을묘년 : 1615 광해군 7년.

○上下啓運宮行狀, 令大提學金瑬, 製進誌銘。 其文曰:

恭惟我聖上, 纉承大統之越四年丙寅正月十四日戊午, 啓運宮寢疾, 卒于慶德宮會祥殿, 春秋四十九。 旣殯之翌月, 自上撰次世系、言行事始終, 命臣誌之。 臣拜疏, 謝不敢, 不獲已。 旣讀狀, 仍竊伏念, 昔周公論歌之烈, 作爲《大明》《生民》之詩, 追本其所從來。 自古受命之君, 其先曷嘗不種德衍慶, 光啓景運, 以能迓天之休也? 啓運宮之得其名, 顧不韙歟? 於戲盛哉! 謹拜稽首而敍之曰: 啓運宮具氏, 系出綾城。 遠祖諱存裕, 仕高麗有名。 入國朝以來, 世有冠冕, 遂大顯。 曾祖永柔縣令諱希曾, 贈吏曹判書。 祖司憲府監察諱, 贈議政府領議政。 考諱思孟, 用文學擢高第, 淸名、宿德, 爲世所推。 歷事明廟, 踐敭要顯, 卒官議政府左贊成。 以子, 參錄扈聖靖社功, 贈議政府領議政, 賜純忠秉義補祚功臣號, 封綾安府院君。 議政娶平山 申氏, 高麗 壯節公 崇謙之後, 贈領議政平洲府院君 華國之女。 寔生啓運宮, 乃戊寅四月十七日戊戌也。 啓運宮, 生而姿質秀異, 聰明孝友, 出於天性。 甫四歲, 知以禮自持。 至五歲, 已無幼志, 儼若成人。 一日侍父母, 食數匙而止。 父母怪而問之, 對曰: "飽矣。" 及撤視之, 有穢物。 自是父母甚異之。 嘗欲觀其爲, 試以玩具遍給他兒, 而獨不及, 不以爲意。 父母愛而拊之曰: "吾女, 女也。 終必大吾門。" 宣祖大王素器愛定遠大院君。 庚寅將行嘉禮, 擇其配之可與齊者, 命士大夫女, 咸詣闕, 親簡焉。 簡至再而未定, 啓運宮一見, 可上意, 天顔喜甚, 嬪御皆賀。 爰命有司, 以是年十月三日, 備禮以聘焉。 大院君, 卽仁嬪出也。 仁嬪有令德、高識, 亟稱以吾佳婦。 宣祖大王命女史, 授以《小學》諸書, 讀未竟, 已通音義。 溫仁簡默, 喜怒不形, 處尊卑間, 無不適順, 宮中愈敬。 事大院君, 旣順而正, 和容婉色, 未嘗有違, 不敢以齊體惰見。 撫側出以慈, 御僮使以寬, 治家逮下, 皆有法式, 大院君深重敬之。 皇天眷佑, 篤生聖子, 時則萬曆紀元之乙未也。 其所謂種德衍慶, 光啓景運者, 亶在玆乎! 歲戊申, 宣祖賓天, 哀毁踰制, 仁嬪之喪, 亦如之。 乙卯, 季子綾昌, 被酷禍, 大院君悲慟成疾, 不離床褥, 啓運宮侍疾累歲, 奉湯劑、洗廁褕, 皆自執不屬人。 及卒, 勺水不入口, 號擗隕絶, 迄制盡, 只歠餰粥。 待同氣、視媵妾, 踰於大院君之在世之日。 好施族黨, 賑人之急, 先從貧賤始。 親屬有怵禍者, 畏其染, 一不過門省顧, 待之如初, 略不形言面。 平生, 未嘗爲富貴容, 奢華綺麗, 不設於身。 嘗亡厚藏珍寶, 知其匿所, 故不問曰: "不欲彰人惡也。" 自少洞知大義, 能輕重、緩急, 癸亥之事, 盡散金帛, 以慰將士, 擧義之日, 無怖容; 戡亂之後, 無喜色。 履危蹈變, 權時動宜, 贊成大業, 保定洪基, 繄誰賴也? 甲子春, 賊臣, 擧兵薄京邑, 車駕南遷, 次水原, 從者色懼, 皆懷潰散, 乃罄橐而分之坐, 牢其心。 奉大妃, 極盡孝敬, 委曲承順, 愉愉如也, 雖在顚仆, 罔或少懈。 時有疾恙, 不事巫祝曰: "禱而虛也, 不可爲也。 如其應也, 余未亡人也, 禱而何爲?" 其達理不惑如此。 戊申後, 嘗夢先王, 召謂啓運宮曰: "而家當有受命而興者", 仍賜以玉璽曰: "特以付之, 諭予敎訓。" 啓運宮拜謝問曰: "克勤新政, 鎭昌本國?" 其亦神矣哉! 噫! 於皇烈祖陟降之靈, 勉我聖上, 耆定大亂, 嗣武受祉, 以啓我東方億萬年無彊之休, 斯可驗矣。 啓運宮, 自癸亥而嬰疾, 至甲子而轉篤, 至丙寅而遂不起, 嗚呼慟哉! 命設禮殯、禮葬都監, 宗伯主喪禮, 度支辦喪事, 匠作治殯宮, 大小駿奔而敦事焉。 反正之初, 因廷臣議, 加定遠君以大院君, 進宮號以啓運。 屢備法駕, 就覲私第, 猶以曠省爲歉, 遂移奉于大內, 別供時膳, 克備無闕, 以迄于終。 新卜兆于金浦縣後崗癸坐丁向之原, 以是歲四月二十五日葬, 虛其右子坐午向之原, 將爲遷大院君葬也。 有三子, 長卽當宁, 聘淸州 韓氏, 西平府院君 浚謙之女, 正位承乾, 受祿于天, 生四男一女。 長 , 封王世子, 次某 【今上諱淏。】 , 次、次, 皆幼未封, 女最幼。 二曰綾原君 , 時無子女, 主定遠大院君祀。 三曰綾昌君 , 氣豪有俊才, 往在昏朝, 爲奸誣捏, 竄海島, 抱冤而歿, 年十七, 未有室。 銘曰: 莫崇維嶽, 莫濬維川。 源長流遠, 積厚不騫。 惟巨閥, 祚由善綿。 議政廓之, 緖業光前。 誕生碩媛。 之德之淵。 淑質懿範, 成自幼年。 豈惟良能, 天賦其全。 法家行誼, 濡染而然。 大院禮聘, 求配之賢。 王曰汝嘉, 疇敢或先。 壼儀旣正, 陰敎斯宣。 百靈保佑, 聖躬育焉。 於皇聖祖, 陟降在天。 啓寤夢寐, 大寶有傳。 神孫克肖, 負荷靡愆。 奮揚大義, 坤轉乾旋。 彝倫賴植, 日月重懸。 母儀寔多, 功豈人專。 禮養備隆, 壽考宜延。 宿(𧏮)〔恙〕 漸篤, 神昧精虔。 金浦舊治, 漢水西偏。 塋兆訖功, 有闢新阡。 有貞斯石, 載磨載鐫。 是欽是撫, 掩諸幽玄。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8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